87. 공략 포인트 - 3.
“오늘 회의를 여기서 마치고 내일 오전 10시에 속개하겠습니다.”
땅, 땅, 땅.
위원장석의 심남진이 조금 지친 표정으로 의사봉을 두들겼다.
의원들이 앉은 상태에서 한숨을 내쉬거나 등받이에 기대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등 피로한 모습을 보였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던 도훈이 시청 간부들을 데리고 대회의실을 나갔다.
그나마 다른 의원들에 비해 덜 피곤해 보이는 안준식이 그런 도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오늘은 맛뵈기인가?”
안준식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오후 9시가 살짝 넘은 시각.
2시에 개회했다가 저녁 식사를 위해 정회하고 다시 속개해 지금껏 회의가 이어졌다.
40대 초반인 안준식도 눈이 뻑뻑할 정도니 나이 든 의원들은 어떠하랴.
하지만, 의원들이 저렇게 피로한 모습을 보이는 건 꼭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없었다.
‘... 생각보다는 덜했지만, 그래도 꽤 스트레스를 받았겠지.’
안준식이 의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위원장석의 심남진은 눈가를 주무르고 있었고, 눈가가 거뭇해진 서태기는 잔뜩 인상을 구기고 서류를 챙기고 있었다.
송지은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는 모양새였고, 장민호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서류를 들추며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뭐라 뭐라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의원들의 기분과 표정이 제각각인 건 도훈에게 ‘당한’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표정으로만 본다면 서태기, 장민호, 심남진, 송지은 순으로 기분이 나쁜 것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그건 도훈에게 많이 논박당한 횟수나 정도와 거의 같았다.
서태기는 점잖은 말투로 조정요청을 할 때마다 차분한 말투의 도훈에게 ‘밟혔고’, 장민호는 아무 근거도 없이 주민이 원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웠다가 주민센터에서 조사한 결과를 내놓은 도훈에게 망신당했다.
심남진과 송지은은 소극적으로 ‘검토 요청’을 했다가 ‘검토는 해보겠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식으로 점잖게 거절당했고, 안준식은 거의 유일하게 도훈에게 ‘증액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어쨌든, 오늘 의원들은 도훈을 상대로 판정패했다.
일방적인 패배가 아니라 판정패라 한 것은 의원들이 분투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은 의원들이 스스로 자제했고, 도훈이 그런 의원들을 전력을 다하지 않고 ‘적당히’ 상대해줬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 차 의원은 어쩌고 있으려나?’
가방을 챙겨 일어서며 안준식이 중얼거렸다.
오후에 시작된 회의 초반부터 도훈과 신경전을 벌이던 차혜진은 오후 느지막한 시간, 기어코 도훈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공개적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 아니, 매번 그렇게 안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실 거면 이런 조정이 도대체 왜 필요한 겁니까? 그냥 시장님 맘대로 예산안 짜고 말지!
- 시 집행부의 예산안에 대한 심의의결권이 의회에 있다는 건 잘 아실 테고요. 저는 소중한 예산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뿐입니다.
- 뭐라고요? 허투루? 그럼 제가 지금 예산을 낭비하려고 이러고 있다는 겁니까?
- 솔직히 말씀드리면, 의원님이 요청하신 사안 중 상당수가 불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이건 과거 논의 중에 다수 의원님들이 동의하신 부분이기도 하고요.
- 저는 동의한 적 없어요! 필요하니까 요청하는 거지 그렇지 않은 걸 왜 요청한단 말이에요!
- ... 필요하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드릴까요?
- ... 증거라뇨?
차혜진이 당황했고, 도훈은 위원장에게 허락을 얻어 영상 하나를 고속재생했다.
차혜진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도훈이 그녀에게 정면 대응하기로 마음먹고 직원들에게 ‘증거’를 갖추게 했다는 걸.
하루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모든 의원의 요청안에 그런 자료를 마련하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차혜진 한 사람의 요청안에 ‘대응’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았다.
- 다 아시겠지만, 여긴 시청 앞 인도입니다. 차 의원님께서 요청하신 남가동 보도블록 교체 요청은 이곳을 말하죠. 이 영상은 인도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부분을 찍은 겁니다. 제가 직접 찍은 건 아니지만, 이 영상을 보면 공사가 필요할 정도로 블록이 깨졌거나 훼손된 부분이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영상이 재생됐고, 도훈이 말을 이었다.
- 여긴 오상리로 진입하는 길입니다. 보시다시피 다 멀쩡합니다. 낡은 건 사실입니다만, 보수하거나 관리를 잘한다면 충분히 몇 년 더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스크린 속 영상이 낮에서 밤으로 바뀌었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 모든 가로등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 보시는 것처럼 당장은 교체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등장한 건 영상이 아닌 사진.
- 보수공사가 필요하다고 한 현장입니다. 외관상 전혀 균열이나 파손 부위가 없습니다. 제 의견만 이런 게 아니고 현장을 상세히 영상으로 촬영해 건축사에게 보여줬습니다. 두 명의 건축사 역시 당장은 보수할 필요가 없다고 했답니다.
이후에도 빠르게 영상 혹은 사진이 올라왔고 도훈이 왜 요청된 예산이 불필요한지를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중간에 차혜진이 반발해 심남진이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조정 요청한 사안 전체가 언급됐을지도 몰랐다.
차혜진이 도훈의 말을 중간에 잘랐지만, 도훈은 기어이 위원장에게 요청해 발언을 허락받고는 못을 박았다.
- 저는 차혜진 의원님께서 지역 주민들의 요청을 수렴하시는 건 좋은데, 좀 더 세심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 사안을 요청한 분들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낄 수 있겠습니다만, 한정된 예산을 대흥시 시민 모두를 위해 좀 더 효율적이고 가치 있게 쓰기 위해서는 우선순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요청을 수렴하시되, 확인작업도 꼼꼼히 하셔야 한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조금 전에 보신 것처럼, 그 현장을 직접 확인하셨더라면 이게 당장 내년 예산에 반영되어야 하는지 아닌지가 너무도 명확하게 판단이 되는 사안들이니까 말입니다.
- ......
이를 악문 차혜진이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푸들푸들 몸을 떨었다.
물론, 그녀가 요청한 조정안이 전부 자잘한 공사, 교체와 관련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도훈은 그녀가 요청한 것 중 그런 부분을 골라 현장 영상이나 사진을 들이밀고, 일부 전문가의 의견까지 확인해 당장 필요하지 않음을 입증했다.
즉, 차혜진이 뭉텅이로 요청안을 들이밀긴 했지만 스스로 그 긴급성이나 필요성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달까?
그것도 시청 간부들에 기자까지 앉아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말이다.
쿵!
씩씩거리던 차혜진이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고, 움찔한 심남진이 얼른 정회를 선언했다.
자칫, 차혜진이 회의 중에 폭발해 돌발행동이라도 할 걸 우려해서 말이다.
- 저녁 식사를 위해 정회하고 한 시간 후에 속개하겠습니다.
그렇게, 차혜진은 일방적으로 당하고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회의장을 나갔고, 회의가 속개될 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걸음을 옮기려는 안준식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의장님,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좀 하시겠습니까?”
도훈과 함께 회의실을 나갔던 두진이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요?”
“당연히 예산안 관련한 거죠. 시장님이 의장님께 한 가지 제안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대신 전하려고요.”
솔깃.
아직 회의장에 남았던 의원 모두가 두진의 말을 들었고, 어느새 모두의 시선이 두진과 안준식을 향하고 있었다.
“... 이건 의장님 개인께 하는 제안이라서···.”
두진이 담담하게 의원들을 둘러보며 말했고, 의원들이 머쓱한 표정을 했다.
안준식과 도훈이 잠시 논쟁하긴 했지만, 예산안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인식이 같으니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과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도훈이 안준식의 의견에 긍정적인 의견을 표했을 정도니, 현재 안준식은 도훈에게 ‘찍히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의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제 방으로 가시죠.”
“네.”
안준식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두진이 몸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제가 다시 생각해보니까 혹시 시장님 제안이 궁금하신 분은 함께 들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안 의장님께 하는 제안이긴 한데, 다른 의원님도 함께 하시면 더 좋을 것 같긴 하니까요.”
말을 마친 두진이 안준식과 회의실을 나갔고 남겨진 의원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부의장님.”
“네.”
“의장실 안 가실래요?”
“... 의장실에요?”
“네. 내일은 애들이랑 선생님이 견학한다는데, 오늘처럼 회의가 진행되면 안 될 것 같아요.”
송지은이 더없이 진지하게 말했고, 잠시 고민하던 심남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갑시다.”
송지은과 심남진이 함께 회의실을 나갔다.
목적지가 어디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커흠! 먼저 가겠습니다.”
가방을 챙겨 든 장민호가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사라지는 게, 분명 집이나 사무실로 가는 게 아닌 의회 의장실을 향하는 것일 터.
그 역시 오늘 도훈에게 당하긴 했지만, 내내 별말 없다가 정작 예산 시즌이 되자 마음먹고 조정안을 왕창 들이민 서태기와는 처지가 달랐으니까.
“... 빌어먹을···.”
회의실에 홀로 남은 서태기가 안 그래도 구겼던 얼굴을 더 일그러뜨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예산안과 관련해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렸다는 걸 그는 모르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차혜진이 ‘사고’를 치기 전에 서태기는 충분히 도훈을 도발했고 대부분 실패했으니까.
“...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몇 시간 전부터 비워진 차혜진의 자리를 바라보며 서태기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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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후.
“이상으로 집행부가 제출한 2019년 대흥시 예산안 심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흥시 의원 및 집행부 여러분, 지난 4일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탕, 탕, 탕.
짝짝짝.
위원장의 종료 선언과 함께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예산 심사가 끝났다.
특별위원회는 시 집행부가 제출한 예산안에 큰 변화 없이 일부 조정을 마치고 본회의에 보고하기로 결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위원장 및 의원들과 인사를 마친 도훈이 대회의실을 나섰다.
불과 며칠 전, 아주 제대로 화가 났고 그 이후로 계속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니던 것과 달리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인터뷰 기회 넘긴 거 후회 안 하십니까?”
옆에서 걷던 두진이 물었고, 도훈이 웃으며 답했다.
“저야 또 기회가 있겠죠.”
“뭐, 그렇기야 하겠습니다만.”
안준식 의장을 비롯한 심남진, 송지은, 장민호까지 네 명의 시의원은 곧바로 우리 뉴스 기자와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제 위원회가 늦게까지 이어져 하지 못한 인터뷰는 어제 조정을 거쳐 오늘 의원 넷만의 인터뷰로 변경됐다.
도훈이 왕민상 기자와 ‘협의’한 결과였는데, 나중에 독점 인터뷰에 응하기로 하고 설득하느라 꽤 애를 먹어야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쉽게 끝났습니다.”
“네. 정말 쉽게 끝났습니다.”
도훈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듯 두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의원들이 변심한 것을 확인한 도훈은 고심 끝에 각 의원의 성향을 고려한 공략 포인트를 잡았다.
마음먹고 뒤통수 친 차혜진과 서태기는 논외로 했고, 안준식이야 공략할 필요가 없었다.
‘존재감’에 목말라하는 심남진은 방청석에 우리 뉴스 기자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을 받았다.
자신이 열심인 게 알려지지 않는 것도 모자라 ‘구태의연한 의원’으로 기사가 나가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을 터.
기자의 존재가 다른 의원에게도 신경 쓰였겠지만, 주되게는 역시 심남진을 노린 것이었다.
아이들과 선생님을 초청해 의회를 견학하게 한 건 역시 아동, 복지 분야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송지은을 노린 것이었다.
다행히, 도훈이 화요일 저녁 협상을 청해서, 송지은은 아이들, 특히 선생님 앞에서 활약을 보여주기는커녕 복지 정책 내실화를 훼방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장민호의 경우 앞선 두 사람과 사정이 좀 달랐지만, 시청 간부에게 부정적 인상을 남기지 않고, ‘초선 시장과 함께 시정 개혁을 실천하는 시의원들’이라는 인터뷰에 낄 수 있었다.
예산안 조정으로 빛 보기는 글렀다고 판단한 장민호가 입장을 선회한 건, 도훈이 마지막까지 우려했던 부분인데 예상보다 쉽게 넘어왔다.
이렇게 안준식까지 포함한 전체 의원 6명 중 4명이 의견을 모음으로써, 위원회는 물론 본회의에서도 예산안 통과가 무난해졌다.
다만, 조정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두진이 건의해 도훈은 의원마다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안건을 하나씩 선택하도록 물러섰고, 차혜진, 서태기를 포함한 6인의 시의원이 요청한 조정을 수용했다.
다행스럽게도, 조정 폭이 크지 않아 도훈이 주력한 부분은 거의 감액이 없었다.
여하튼, 그렇게 자칫 시장과 의회의 정면대결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예산안 논의는 예상보다 순탄하게 마무리됐다.
물론, 모두가 만족한 건 아니었다.
“앞으로 차 의원님, 서 의원님 마주할 게 걱정입니다.”
“뭐, 지금까지도 그랬잖습니까.”
두진의 말에 도훈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더 나빠졌을지는 모르지만, 원래도 나빴던 관계.
집행부와 의회가 적절히 협력하고 견제해야 시정이 제대로 된다는 걸 도훈도 모르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더 나빠진 원인은 물론이고 과정에서도 도훈보다 두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이 있었다.
“여하튼, 한고비 넘겼습니다.”
“네.”
시의회 청사를 나선 도훈과 두진이 밝은 표정으로 시청사를 향해 걸었다.
그런 자신들을 누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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