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공략 포인트 - 2.
예결특위의 오전 회의는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혹은 심심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물론, 부드럽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다른 의원들은 발언의 수위와 톤을 절제했지만, 전혀 그러지 않은 의원도 한 사람 있었으니까.
대자당의 차혜진 의원이 바로 그 사람으로 그녀는 오전 회의에서 거의 독보적인 ‘활약’을 했다.
“점심을 위해 정회합니다. 오후 2시에 회의 속개하겠습니다.”
땅, 땅, 땅.
심남진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들겼다.
공무원들은 한숨을 돌리면서도 뭔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고, 의원들은 제각기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대회의실 문을 나선 공무원들이 소곤거렸다.
“과장님, 의원님들이 왜 저러는 겁니까?”
“아, 그거? 나도 중간에 들었는데 방청석에 기자가 한 명 앉아 있었대.”
“기자요?”
“어, 우리 뉴스 기자라던데?”
“아, 그래서···.”
“응. 짐작하는 게 맞을 거야.”
의원들이 매우 공격적으로 나올 거란 예상이 깨진 이유를 뒤늦게 알아챈 직원이 씁쓸한 표정을 했다.
위원회 개회 전, 눈치 빠른 의회 사무과 직원이 의원들에게 기자가 방청 중이라는 걸 슬쩍 알렸다.
의원들은 공무원들이 딱해서가 아니라. 예산 조정에 대한 의견을 바꿔서도 아니라, 자신들의 이미지를 위해 이른바 ‘관리’를 한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우리에게는 다행이지.”
“그렇긴 합니다만, 오후엔 시장님도 출석하실 텐데···. 의원들은 몰라도 시장님은 기자 앞이라고 말 가리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그게 우리 시장님 매력이잖아.”
공무원들이 수군거리던 순간 대회의실 문으로 문제의 기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공무원들이 얼른 멀어져갔다.
문 옆 복도에 등을 기댄 기자가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적으며 중얼거렸다.
“... 생각보다 심심한데···.”
왕민상이 의회를 취재하기 위해 온 것은 맞았다.
그리고 도훈의 시정 철학이 스며든 예산안에 관심이 있는 것도 맞았다.
전국 최연소 기초자치단체장인 도훈의 ‘뉴스 가치’는 다른 누구보다 컸으니까.
그러나 왕민상은 오늘 시장과 의원들이 예산안을 놓고 ‘극한 대립’을 벌일 것이라는 ‘제보’를 받고 왔다.
즉, 그가 기대한 기삿거리는 구태를 버리지 못한 의원들이 개혁 행보를 이어가는 시장의 발목을 붙잡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오후에는 시장 본인이 출석한다니까 좀 달라지려나?”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린 왕민상이 걸음을 옮겼다.
왕민상이 자리를 벗어난 직후, 회의실 문으로 차혜진과 서태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혜진이 서태기를 살짝 째려보며 말을 걸었다.
“오전에 너무 점잔 떠신 거 아니에요?”
“그러는 차 의원은 너무 오버한 거 아닙니까? 기자가 시퍼렇게 눈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말이오.”
“저야 지역 주민을 위해 예산안 조정 요청한 것뿐이죠.”
“허허. 누군 아니랍니까? 다만, 품위를 갖춰서 한 것뿐이에요.”
오전에 차혜진이 ‘활약’했다지만, 서태기라고 잠자코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전체 조정요청안의 과반이 두 사람이 제출한 것이니 서태기 역시 여러 번 발언했다.
다만, 차혜진이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날 선 태도로 시청 간부를 상대했다면, 서태기는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으로 ‘점잔’을 떤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오후에는 김 시장이 출석하는데, 품위 갖추시는 게 가능하겠어요?”
차혜진이 좀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묻자, 서태기가 얼굴을 찌푸리고 답했다.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게 품위요? 사람의 품위는 그 사람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흠, 글쎄요.”
“그러는 차 의원이야말로 김 시장 상대할 수 있겠어요?”
“네?”
“막말로, 의회에서 김 시장한테 덤볐다가 제일 많이 피 본 게 누구시더라?”
“뭐에요?”
“커험!”
차혜진을 ‘긁은’ 서태기가 헛기침하고 걸음을 서둘렀고, 그의 등을 노려보던 차혜진이 반대 방향으로 멀어져갔다.
한편, 아직 대회의실 안에 남은 세 시의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 혹시 김 시장이 부른 걸까요?”
“글쎄요. 그랬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의회에 기자가 취재 오는 거 드문 일이 아니잖습니까.”
씁쓸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 송지은 의원과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한 안준식.
갑작스러운 세 사람의 미팅은 심남진이 제안해 이루어졌다.
송지은이야 단박에 응했지만, 안준식은 심남진과 송지은이 몇 번이나 청하고서야 마지 못한 듯 응했다.
“빨리 끝내죠. 얼른 점심 먹고 자료 봐야 합니다.”
“... 아, 네.”
안준식의 말에 송지은이 낯빛이 어두워졌고, 비슷한 표정의 심남진이 안준식에게 물었다.
“요즘 시장님과 만나거나 연락하신 적 있으신가요, 의장님?”
“아뇨. 지난주에 두 분 얘기 전하려고 점심을 같이한 뒤로는 없습니다.”
“... 네.”
말끝을 흐리는 심남진과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하는 송지은.
안준식은 두 의원이 좀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초선이라지만, 자기가 감당해야 할 건 감당해야지.’
도훈이 이들에게 화가 난 것처럼 안준식도 이들에게 화가 난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안준식 역시 시의원이라서 눈앞의 두 사람이 예상보다 훨씬 강한 지역 당원의 반발을 못 이긴 점이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반발은 이들뿐만이 아닌 안준식 본인도 겪고 있었다.
안준식의 지역구라고 자잘한 현안이 없는 게 아니었고, 시의원이자 의장으로서 그런 걸 챙겨야 한다는 요구가 분명 있었다.
더군다나, 같은 지역구의 차혜진이 그런 현안 관련 예산 조정을 ‘뭉텅이’로 요청했기에 다른 지역구의 심남진이나 비례대표인 송지은보다 더 상황이 나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시민단체 활동을 오래 했고, 그 와중에 의회와 관련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기에 끈질기게 버티며 설득하고 있는 게 다를 뿐.
“의장님은 조정요청 더 안 하실 건가요?”
“네.”
“... 괜찮으세요?”
“견디는 거죠, 뭐.”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하는 안준식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는 듯한 두 의원.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짜증이 치민 안준식이 애써 그걸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용건이 뭔지 모르겠지만, 얼른 얘기하고 끝내시죠. 두 분도 오후 회의 준비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오후에 김 시장이 직접 출석하는데요.”
“... 네.”
오전에 차혜진이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서태기가 점잖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도, 송지은이나 장민호가 어물쩍 요지만 전달하고 말 수 있었던 것도, 심남진이 별 무리 없이 회의 진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도훈이 없었던 이유가 컸다.
의원들의 질의와 요청에 답하는 간부들은 기본적으로 의원들의 심기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 요청하신 사안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 다시 논의해 보고드리겠습니다.
- 수용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 그 부분은 좀 오해가 있으신 건 같습니다. 이 사안의 핵심은···.
심기를 건드리기는커녕, 논박조차 가급적 피하는 게 공통된 태도였기에 오전 회의가 큰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장이 출석하는 오후부터는 다를 터.
도훈은 기본적으로 시의회에 ‘전투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논쟁을 피하지 않는다.
사실관계 해명 혹은 논쟁을 통해 시의회에서 시의원을 바보로 만드는 것도 직접 본 적이 있는 의원들이었다.
여기 모인 안준식 이하 셋은 다행히도 그 대상이 된 적이 없었고, 크게 의견 차이를 보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논리’와 ‘화술’에서 도훈을 압도하거나 능가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없었다.
“더 할 말씀 없으시면 저는 이만···.”
위이잉.
심남진과 송지은이 말이 없자 안준식이 먼저 일어서려는데, 심남진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가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예, 무슨 일입니까?”
의회 사무과 직원과 통화하는 심남진의 표정이 급변했다.
“인터뷰? 나랑 말이에요?”
좀 많이 놀란 심남진이 직원의 이야기를 듣다가 말을 이었다.
“옆에 왕 기자 있다고 했죠. 잠깐 바꿔주세요.”
기자가 등장하길 기다렸다가 심남진이 말했다.
“아, 왕 기자님. 저와 인터뷰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어떤 이유로···. 아, 네. 네? 아, 그래요?”
기자와 통화하는 심남진이 무척 다채로운 표정변화를 보이는 걸 안준식과 송지은이 얼마간 지켜보는데, 통화하는 상대가 다시 직원으로 바뀌었다.
“네. 다른 일? 내일 오후에 견학 신청이요?”
심남진이 말문을 잃은 채로 직원의 설명을 한참 들었다.
그의 시선이 문득 송지은을 향했다가 허공으로 옮겨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허락해야죠.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요. 네, 끊겠습니다.”
심남진이 통화를 마치자 송지은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인터뷰는 뭐고 견학 신청은 또 뭐에요?”
“왕 기자가 오후 회의 끝나고 인터뷰를 하고 싶답니다. 저에게만 요청한 게 아니고 의장님께도 요청할 거라고 하네요. 아마, 지금쯤 의장님 비서실에 연락이 갔을 겁니다.”
“... 혹시 그럼 김 시장도?”
“네. 그럴 모양인 것 같습니다. 예산과 그 예산에 반영된 김 시장의 시정 철학, 의원들의 평가를 듣고 싶다는 얘기였어요.”
“... 오후 회의 끝나고요?”
“네.”
“......”
말을 마친 심남진이 말문을 잃었다.
오전에 위원회는 그냥 잔잔한 바람이 부는 수준이었다면, 오후의 위원회는 엄청난 폭풍이 몰아칠 게 뻔했다.
그렇기에 이들이 모여 앉은 것 아니던가.
비록, 실질적인 논의는 전혀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폭풍을 다 목격한 기자가 회의 이후에 시의회 의장,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시장을 인터뷰한다면 도대체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내용의 기사가 나가게 될 것인가?
송지은과 심남진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고,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던 안준식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견학을 신청한다는 건 무슨 얘깁니까?”
“아, 그건 초등학생 견학 건으로 시장실에서 협조요청이 들어왔답니다.”
“초등학생 견학이요? 그런데 그걸 왜 시장실에서 협조요청을 합니까?”
“시장님 취임 직후에, 초등학교에 초청받아서 가신 적이 있답니다.”
“맞을 겁니다. 첫 외부 일정이 초등학교 방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네. 그때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점심도 드셨다는데, 내일 그 반 아이들과 선생님을 초청해 점심을 먹고 시장이 일하는 모습, 그리고 의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다는군요.”
안준식과 심남진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송지은을 향했다.
안 그래도 어둡던 송지은의 표정은 더 어두워진 상태였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자연스레 아이들과 관련된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아동이나 복지와 관련해서 ‘잘한다’, ‘노력한다’는 이야기를 듣길 원했다.
그래서 그녀가 요청한 예산 조정 건은 대개 관내의 보육, 교육 시설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요청한 사안이 대개 시 집행부가 예산안을 수립하면서 ‘과하다.’ 혹은 ‘현재로써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아동복지와 관련한 다른 사안으로 돌리는 데 송지은도 동의했었다는 점이었다.
그런 송지은이 내일 오후 아이들, 특히 ‘인솔교사’가 보는 앞에서 혹여 도훈과 논쟁이라도 붙어 깨진다면···.
‘... 김 시장이 정말 화가 났나 보구나.’
거의 썩어들어 가는 얼굴로 말문을 잃은 심남진과 송지은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준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제, 두진과 대화했을 때 들었던 ‘공략 포인트’라는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안준식이었다.
때문에, ‘인터뷰’는 심남진을 노린 것이고 ‘초등학생 견학’은 송지은을 노린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 무섭네.’
안준식은 도훈과 진지한 토론이나 실답잖은 농담은 많이 해봤고, 시의회에서 도발을 걸어온 의원을 ‘떡실신’시키는 건 봤어도, 이렇게 특정 목표를 ‘공격’하는 걸 본 적은 처음이었다.
도훈이 뚜렷한 철학, 균형 잡힌 판단력, 뛰어난 행동력을 선보일 때마다 적잖게 놀라고 감탄했던 안준식.
‘논쟁이 아닌 다른 싸움에서도 절대 하수가 아니구나.’
안준식이 판단하기에도 ‘인터뷰’와 ‘견학’을 도훈이 생각해낸 것이라면, 인지도에 집착하는 심남진과 아동복지에 ‘꽂힌’ 송지은에게 딱 맞는 공격이라 할 수 있었다.
‘... 만약 나도 시장에게 등을 돌렸다면···.’
부르르.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안준식이 살짝 몸을 떨었다.
그렇게 세 명의 시의원이 서로 다른 이유로 말문을 잃은 가운데, 도훈이 등장할 시각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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