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예산 시즌 - 2.
“왜 그러십니까?”
도훈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진 것을 본 안준식이 물었고, 도훈이 말없이 핸드폰을 내밀어 메시지 내용을 보여주었다.
“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된 안준식이 도훈을 향해 물었다.
“시장님, 설마 만나실 생각은 아니시죠?”
“... 글쎄요.”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는지, 안준식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안 만나시는 게 좋습니다. 시기가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 민감한 시기이긴 하죠.”
“이렇고 노골적으로 요구한 차 의원이 아닌 그 누구라 해도 따로는 안 만나는 게 좋을 겁니다. 제 경험상, 요즘 같은 때는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만난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 의장님 표정을 보니 그렇게 될 것 같네요.”
도훈이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답한 건, 정색하고 있는 안준식 본인 역시 의장이기 이전에 지역구 의원이기 때문이었다.
도훈의 표정에서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안준식이 좀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우리 당 의원들에게 당원들 사이에 그런 반대 의견이 있다는 걸 시장님께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같이 식사하는 걸 수락한 겁니다.”
“그런 거였습니까?”
“그럼요. 의장이지만, 저도 지역구 의원입니다. 그리고 이 말도 드리려고 했죠.”
“... 뭘 말씀이십니까?”
“최악의 경우, 어느 정도 조정은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거요. 당원들을 최대한 설득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쉽지 않아 보이거든요.”
“... 네.”
“제 용건은 다 말씀드렸습니다. 이젠 예산안 얘기 더 안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산안 통과될 때까지는 웬만하면 저도 따로 뵙자는 말씀 안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도훈의 시선이 두진을 향했고, 두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의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공식적인 만남이 아니면 의원님들과 개별적인 만남은 당분간 안 가지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의장님과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하시지요.”
“... 네, 알겠습니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시청에 돌아온 도훈은 커피를 들고 시장실로 들어와 곧바로 차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시장님. 결정하셨어요?“
“하긴 했는데, 의원님께서 좋아하실 결정은 아닐 것 같습니다.”
- 네?
“다른 때라면 대환영입니다만, 요즘 좀 민감한 시기 아닙니까. 이럴 때 자칫 오해받을 수 있는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 어머? 오해라뇨? 예산에 대한 건설적인 대화를 이어가는 것뿐이죠.
“그러시겠죠. 하지만, 의원님들이 제각각 예산에 대한 고민이 있으실 테고, 그걸 각 당의 고민으로, 다시 의회 전체의 고민으로 모아내는 과정이 선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그 과정을 먼저 거치시죠, 의원님.”
- ......
달래듯이 말하는 도훈은 차혜진이 당황했다는 듯 반응하자 쓰게 웃었다.
그간 경험해 본 바에 비추어 그녀가 뭔가 ‘거래’를 요구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고, 설혹 거래에 응하지 않더라도 만남 자체만으로 여당 의원들의 오해를 살 수 있었다.
설혹, 만나자고 요청한 상대가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더라도 거절하는 게 좋다는 게 의회 경험이 도훈보다 많은 안준식과 두진의 공통된 결론.
도훈 역시 거기에 공감했다.
도훈의 거절에 얼마간 말이 없던 차혜진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어떻게 시장님은 제 제안에 순순히 ‘예’라고 하시는 적이 한 번도 없으시네요.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어렵게 돌아가시려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차혜진도 바보가 아니니, 의회 사정과 의원들의 성향상 예산안 통과가 쉽지 않은 거라 예상한 모양.
분명 지난번 조례 개정 때처럼 거래를 제안하려 했는데, 지난번과는 달리 마주 앉지도 못했으니 상당히 분한 모양이었다.
“의회에서 의원님과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 그런 말 혹시 아시나요? 호미로 막아도 될 걸 가래로 막는다는 얘기요.
뚝.
“... 이거 괜히 사람을 더 약 올린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도훈이 말하자 옆에서 스피커 폰으로 듣고 있던 두진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식으로 한 사람씩 만나기 시작하면, 결국 의원 모두를 개별적으로 상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안 의장님과 함께 식사하는 것도 전 신경이 쓰였습니다.”
“왜요?”
“지역구 예산 얘기를 하시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말이죠. 아무리 의장이고 시장님과 공감하는 게 많다지만, 그분도 지역구 의원이잖습니까.”
“... 하하. 설마요.”
“웃을 일이 아닙니다. 예산 시즌의 국회의원이 왜 그리 욕먹어 가면서도 집요하게 지역 예산을 챙기는지 모르세요?”
“쩝.”
“시의원들도 그 부분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금액이 적을 뿐이죠.”
진지하게 말하는 두진의 모습에 도훈은 이젠 좀 익숙해졌어도 여전히 자신이 ‘초짜’ 시장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도훈도 지역구 예산에 정치인이 민감하다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예산 시즌 시의원들의 모습을 많이 봐 온 두진과는 확연하게 온도 차가 났으니까.
“그리고 시의원들이 자기들끼리 조정하는 것도 하겠지만, 다른 시의원들 모르게 예산 조정을 시도할지도 모릅니다.”
“... 제게요?”
“시장님이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담당 간부가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시의회에 보고할 예산안 완성됐을 때,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요. 예산 시즌에는 국회의원이고 시의원이고, 다 똑같이 집요한 정치인이라고요.”
“그러셨죠.”
좀 얼떨떨한 표정인 도훈에게 두진이 못을 박듯 말을 이었다.
“시장님이 예전 시장님들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시니까 그런 예산 조정 시도가 독창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일도 일종의 관행 같은 게 있었거든요.”
“... 네.”
“여하튼, 중심 잘 잡고 차분하셔야 합니다.”
“... 네.”
“자칫 한 번 스텝이 꼬이면 계속 휘둘리기 십상입니다.”
“......”
그렇게 거듭 주의를 준 두진이 비서실로 나갔고, 혼자 남은 도훈이 쓰게 웃었다.
“... 예산 시즌의 정치인이라···.”
호로록.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도훈이 중얼거렸다.
“이거 은근히 겁나네.”
오래 지나지 않아, 도훈은 그 은근히 겁나는 이들과 마주치게 됐다.
-----
금요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도훈이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예산 관련해서 연락 온 것 없었죠?”
“저희 쪽으로 바로 온 건 없었습니다.”
영배의 답에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자신이 시의원이라고 해도 곧바로 시장실에 전화해 예산 관련 요구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 주에 예산 관련 시의회 논의가 본격화되면 또 다르겠지만, 아직은 다들 예산안 분석 혹은 좀 발이 빠른 의원들은 물 밑 작업에 열심이겠다 싶은 도훈이었다.
담담히 커피를 마시던 도훈이 뒤늦게 두진이 보이지 않는 걸 알아챘다.
“실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각 부서 한 번 돌고 온다고 하셨습니다.”
“부서를 돌아요?”
“지금쯤이면, 대충 입질이 왔을 거라고 하시던데요?”
“... 하하.”
정임의 말에 도훈이 애써 황당함을 감추고 웃는데, 두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입질, 왔던가요?”
두진이 차를 챙겨 소파에 앉길 기다렸다가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네.”
“얼마나 왔던가요?”
“일단 건설교통과와 도시주택과는 평소만큼 왔답니다.”
“... 평소만큼이 어느 정도입니까?”
“의장님을 제외한 의원 전원이 연락했었답니다. 조정이 필요하다고요.”
“......”
도훈과 영배는 말문을 잃었지만, 두진과 정임, 영진은 ‘역시나’ 하는 표정이었다.
“의장님이 연락 안 하신 게 좀 의외네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하실 수도 있지.”
“하긴,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했죠.”
“그렇지. 이제 탐색전이지.”
말문을 잃은 도훈과 영배를 놔둔 채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직원들.
“... 그게 전부입니까?”
“그럴 리가 없죠. 다른 부서도 예산 관련해서 최소 두 명 이상의 의원님들로부터 연락받은 곳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쪽은 좀 적더군요.”
“......”
다시 말문을 잃은 도훈과 영배.
도훈이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말을 꺼냈다.
“가만, 건설교통과와 도시주택과에 안 의장님 빼고 의원 전원이 연락했다고요?”
“네. 다섯분 전부요.”
“... 그럼 비례인 송 의원님도 조정을 원한다는 말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분도 연락한 것 맞습니다. 꼭 지역구 의원만 지역 관련 예산 챙기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
“다만, 송 의원님의 경우에는 특정 지역이 아니라 관내 보육시설 지원책을 언급하셨다고 하더군요.”
“... 하하.”
비례대표인 민의당 송지은 의원은 40대 중반에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아동, 교육, 복지 관련 사안에 관심이 많았고 평소에도 그쪽 관련한 사안은 꼼꼼히 챙기기로 유명했다.
다만, 전부터 도훈이 불필요한 소모성 예산을 줄이고 복지 사업 내실화와 확대를 역설했을 때 안준식 의장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이번 예산안에 조정 요구가 크지 않으리라고 예상했었다.
“... 이 정도면 조정 요구가 많은 편인가요, 실장님?”
“글쎄. 적당하다고 할 수 있겠지. 말하자면, 평균 수준?”
“......”
질문했던 영배가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담담한 표정을 회복한 도훈이 물었다.
“그 요구가 다 진심인 겁니까?”
“전에도 설명해 드린 것처럼, 결론적으로 보면 모든 조정에 주력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사안이 다 진심인 것처럼 나올 겁니다.”
“... 상대하는 간부들이 힘들겠네요.”
“물론이죠. 특히, 기획감사실 예산팀은 간부고 팀원이고 예산안 통과될 때까지 초비상입니다.”
“......”
도훈도 말문을 잃자 정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집행부 쪽만 그런 거 아니에요, 시장님. 의회 사무과도 의원들 보조하고 뒤치다꺼리하느라고 정신없을 거예요.”
“... 네.”
“예, 결산을 1년에 한 번씩만 다루니까 다행이죠. 저도 아직 의회 쪽 일은 안 해봐서 모르는데, 어느 선배님은 예산철 다가오니까 ‘휴직계’ 내고 싶다고 그러시더라고요.”
“... 흠.”
신음을 흘린 도훈이 두진에게 물었다.
“부서별로 들어온 예산 조정 제안 정리해서 취합하는 건 예산팀에서 하죠?”
“네. 그래서 예산팀하고 주요 부서 부서장은 이번 주말 전부 출근할 겁니다.”
“우리도 그래야겠네요.”
“아뇨. 안 그러시는 게 좋습니다.”
“네? 왜요, 실장님?”
영배가 묻자 두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휴일 근무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주중보다는 보는 눈이 적은 게 사실이잖나. 의원들이나 당 지역위 사람들 제법 많이 나타날 걸세. 부서장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시장님이 의회와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감정 상할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아.”
“... 마주치면 감정을 상하게 될 거라는 겁니까?”
“꼭 그렇다는 게 아니고 혹시 모르니까 예방 차원에서 그러는 거지.”
마치 정식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두진에게 도훈이 물었다.
“... 그럼 저는 언제 나와서 취합된 걸 확인합니까?”
“내일은 마음 편히 쉬시고 일요일 오후에 나오시면 될 겁니다.”
“... 다들 쉬는 겁니까?”
“아뇨. 시장님은 쉬시고 다른 직원들은 나와야죠. 저희야 부서장들 지원도 하고 시의원들 상대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홍 주무관은 안 나와도 되겠네요.”
“......”
도훈이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정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평직원 없이 부서장님들만 나오시니까 간식 같은 것도 챙기고 하는 거예요, 시장님. 아마 의원님들이 시장실까지 오시는 일은 거의 없을 거예요. 혹시 몰라서 대기하는 거로 생각하시면 돼요.”
“... 네.”
담담히 답하는 도훈을 향해 두진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일요일 오후에 나오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하하. 분명히요.”
“음, 확실하죠.”
비슷한 표정에 비슷한 뉘앙스로 말하는 두진, 정임, 영진의 모습에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예언’은 곧 현실이 됐다.
#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