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한계 - 1.
10월의 마지막 월요일 오전, 대흥시청 인근 어느 건물 앞.
“자,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김치!”
찰칵!
카메라를 든 사람의 신호에 맞춰 모두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서른이 조금 넘는 사람들은 모두 몸을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고 같은 디자인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자, 이제 인원 배정하겠습니다.”
진행을 맡은 사람의 말에 다들 그쪽에 시선을 주는데, 도훈과 영배 옆에 섰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시장님께는 원하는 곳으로 가실 수 있는 선택권을 드리겠습니다.”
“선택권이요?”
“네. 오늘 힘들게 일하실 텐데, 그 정도 특권은 드려야죠.”
오늘 도훈은 불우이웃돕기 및 저소득층 지원의 일환인 어느 행사에 참여했다.
행사 내용은 저소득층 가구에 연탄을 배달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일하기 편한 옷을 입은 건 그 때문이었다.
도훈뿐 아니라 시의회 의원도 모두 참여한 상태여서 단체 사람 말고도 여기저기서 사진 찍는 이들이 제법 됐다.
“저는 그냥 나중에 남는 곳 가겠습니다.”
“그러시면 좀 한적한 곳에 가실지도 모르는데요.”
“괜찮습니다. 사진 찍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요.”
“하하, 여하튼 시장님도···.”
도훈에게 선택권을 준다던 사람은 봉사단체 간부이기도 했지만, 도훈과 탁구 동호회를 같이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비해 도훈의 진짜 면모를 조금은 아는 편이었다.
“나중에 후회하셔도 소용없는데요?”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도시락은 두 개 챙겨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도훈에게 눈을 찡긋 해 보인 간부는 영배와도 눈빛을 교환하고 멀어져갔다.
도훈에게 가까이 다가선 영배가 속삭였다.
“야, 그냥 사람들 많이 다니는 곳으로 간다고 하지? 그래야 얼굴이라도 팔리지. 이왕 고생하는 건데, 그 정도 득은 봐도 되지 않냐?”
“봉사활동인데 득은 무슨.”
“어휴!”
업무능력은 일취월장을 거듭하고 여러 면에서 낭중지추라는 이야기도 듣는 도훈이지만, 그다지 발전이 없는 분야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홍보’.
시장이 아니라 시의원만 돼도 어디 가서 얼굴 팔기에 열심이기 마련인데, 도훈은 그 분야에는 예나 지금이나 발전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노력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이지만, 영배는 언제나 이게 항상 아쉬웠다.
“자, 출발합시다!”
곧 시의원들을 태운 차가 먼저 출발했다.
그들을 태운 차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는 동네로 향했다.
“쩝. 부회장님, 우리는 어디로 가요?”
입맛을 다신 영배가 친분이 있는 단체 간부에게 물었고 간부가 웃으며 답했다.
“우린 오향마을로 갈 거야. 집이 많지 않아서 거기 가는 인원은 적어.”
“... 그 오향마을요?”
“그래.”
“......”
영배가 말문을 잃었고 도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잘됐네요. 이왕 하는 봉사활동, 제대로 해야죠.”
“네. 오늘 기대 하겠습니다. 저 찹니다. 가시죠.”
“그러시죠.”
도훈이 간부와 함께 먼저 걸음을 옮겼고, 영배가 투덜거리며 뒤를 따랐다.
“... 하필···.”
영배가 불만스러운 표정인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은 거기 사는 사람이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유동 인구가 0에 가까운 동네.
당연히, 시장이 봉사활동 한다고 알아줄 사람이 아주 적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얘기는 들어봤어도 거기 가는 건 처음인데.”
“나도 그래.”
단체 간부가 앞서간 사이, 도훈에게 다가간 영배가 속삭였고 도훈도 작게 답했다.
대흥시에 사는 사람이면 오향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모를 수가 없지만, 몇 년씩이나 산 도훈과 영배도 실제 가보는 건 처음이었다.
“소문대로일까?”
“... 어느 정도겠지. 거기도 엄연히 사람 사는 마을인데.”
곧 두 사람을 포함한 봉사활동 참가자를 포함한 승합차가 목적지로 출발했다.
그리고 곧 도훈은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비서실에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오향마을에 관해 모을 수 있는 자료는 다 모아주세요.”
- ...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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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퇴근 시간이 좀 지난 시각, 시청 비서실.
“쩝, 이런 날씨엔 뜨끈한 국물이 딱인데···.”
투덜거리는 영배 옆에 앉아 김밥을 먹던 정임이 오뎅 국물을 밀어주며 새침하게 말했다.
“이것도 뜨끈해요.”
“아니, 그게···.”
“시간이 아깝잖아요. 얼른 야근 마치고 퇴근해야죠.”
“......”
영배가 말없이 오뎅 국물이 담긴 일회용 그릇을 들고 입가로 가져갔다.
말은 안 했지만, 불만이 있다는 부루퉁한 표정까지 숨기진 못한 채로.
“다음에 야근할 때 조 비서관 먹고 싶은 거 먹자고. 다음 야근이라고 해봤자 아마 내일이겠지만.”
“... 네.”
두진의 말에 힘없이 답한 영배가 오뎅 국물을 마셨다.
“... 아이고, 허리야.”
“무리했어?”
“... 요령껏 한다고 했는데, 허리가 좀 아프네요.”
“아까 보니까 의원들은 멀쩡히 돌아다니던데?”
“그 양반들은 오전만 하고 갔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래.”
매년 저소득층을 돕기 위해 벌어진다는 오늘 행사에는 거의 매번 시장과 시의원들이 참석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시의원들은 인적 많은 동네에서 열심히 주민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으며 오전만 봉사하고 돌아갔지만, 도훈과 영배는 외지고 썰렁한 마을에서 오후까지 열심히 연탄을 날랐다.
“몸이 뻐근해서 국물 생각이 간절한데···.”
“국물이 아니라 곁들일 한잔이 간절하시겠죠.”
“하하, 뭐 사실 그렇죠.”
“어휴, 제가 그럴 것 같아서 김밥 사 온 거예요.”
“... 쩝.”
낮에 힘들게 연탄 나르는 봉사를 했으니 저녁에 뜨끈한 국물 생각에 한 잔 생각이 간절한데, 도훈도 정임도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태도니 저렇게 불퉁거리는 영배였다.
그나마 두진이 안쓰럽게 바라보며 거들어 주고 있지만, 영배 본인도 오늘 야근 안건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는 그냥 적당히 투정부리는 중이었다.
“시장님, 국물이랑 함께 드세요. 찬밥 그렇게 드시다 체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괜찮습니다. 자취 오래 하는 남자는 찬밥, 더운밥 안 가립니다.”
“찬밥도 적당해야죠. 그거 점심에도 드셨다면서요.”
“... 먹을 만해요.”
도훈이 먹고 있는 건 낮에 먹었던 도시락과 똑같은 도시락이었다.
봉사단체 간부가 정말로 도시락을 두 개 챙겨줘서 점심에 먹고 남은 하나를 저녁으로 먹고 있었던 것.
“그나저나 낮에 했던 얘기 무슨 뜻이었습니까?”
“네?”
“저한테 그랬잖아요. 오향마을 관련한 거면 정임 씨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오향마을은 운계면 시가지에서 몇백m 떨어져 있는 아주 낡고 열악한 상태의 집들이 30채가 조금 넘게 있는 마을이었다.
몇 년째 대흥시에 사는 도훈과 영배도 오늘 처음 가봤는데 너무 환경이 열악해 조금 충격을 받았다.
오늘 야근은 원래 예정되어 있었지만, 도훈의 지시로 원래 야근에서 공부할 게 미뤄지고 오향마을에 대한 각종 자료를 긴급히 모아 살피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낮에 그 통화를 할 때 정임은 그 마을이라면 자기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말해 오늘 야근에 함께한 터였다.
“아, 그거요?”
정임이 씹던 김밥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저보다는 제 남편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정임 씨 남편이요?”
정임의 남편은 중학교 교사.
두진이나 정임에게 이런저런 얘기는 들었지만, 도훈과 영배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마을에 저희 남편 반 학생 하나가 살거든요.”
“그런데요?”
“남편이 작년하고 올해 연속 그 아이 담임인데, 아이가 상당한 말썽꾼이라서 몇 차례 집에 직접 찾아갔었어요. 부모님도 만나고요. 그래서 오향마을에 대해 좀 알죠.”
“그럼 정임 씨 남편분과 통화를 해봐야겠네요.”
“음, 그냥 잠깐 왔다 가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여길요?”
“네. 오늘 일찍 퇴근했거든요. 야근한다고 전화했더니 도시락 싸온다는 걸 말렸어요. 제 것만이 아니라 우리 전부 거를요.”
“......”
정임의 말에 두진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웃었고, 도훈이 잠시 눈만 깜빡이다 말을 이었다.
“... 도시락요?”
“네.”
“우리 거 전부 다요?”
“네. 제 남편 요리 잘해요. 식사준비를 남편이랑 번갈아가면서 하는 데 솔직히 남편이 준비한 게 더 맛있거든요. 우리 집에서 도시락 싸야 할 때면 제가 아니라 남편이 싸요.”
“... 그렇군요. 혹시 남편분이 담당하는 과목이···?”
“체육이요.”
“... 아, 예.”
“어떻게, 남편 왔다 가라고 할까요, 시장님?”
“... 그러죠.”
얘기만 몇 번 듣고 아직 직접 본 적이 없었기에 안면도 익힐 겸해서 도훈은 정임의 남편이 잠깐 들렀다 가도록 청했다.
그리고 얼마 뒤, 비서실에 ‘터미네이터’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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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재라고 합니다.”
“김도훈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그래요? 우리 정임 씨가 뭐라고 하던가요?”
“... 요리를 잘 하신다고···.”
“하하, 제가 요리 좀 하죠.”
우락부락 근육질에 선이 굵은 남자의 눈빛이 무척 선하게 빛났고, 그 모습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체육 선생님이라고 들었는데, 요리가 취미이신가 봅니다?”
“아, 예. 제가 대학 때까지 유도 선수였습니다. 운동하는 사람은 먹는 것도 잘 먹어야 해서 학생 때부터 어머니께 요리를 배웠거든요.”
“... 그러시군요.”
도훈은 정임의 남편이 데려온 아이와도 인사를 했다.
아들임에도 남편보다 정임을 닮아 아주 귀여운 녀석이었다.
“자, 어른들 얘기하시게 엄마랑 잠깐 놀까?”
“응!”
정임이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비켰고, 소파에 이경재와 도훈 등이 자리를 잡았다.
“오늘 오향마을에 다녀오셨다고요?”
“네. 대흥시에 산 지 거의 5년이 다 되어가는데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도훈의 말에 이경재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좀 놀라셨겠습니다.”
“솔직히 그랬습니다. 전에 더러 얘기를 안 들어본 건 아닙니다. 하지만 심하더라고요.”
“처음 가셨다면, 무리도 아닙니다. 저도 그랬는데요.”
“우리 대흥시는 지방의 아주 작은 도시일 뿐이죠. 농촌 지역이 많고요. 하지만 그곳은···.”
“농촌 마을보다 더 낙후됐죠.”
“... 네.”
도훈이 오늘 야근 안건을 바꾼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곳을 살펴야겠다고 마음먹고 간 것이 아니어서 더 그랬을 수도 있는데, 관내에 그렇게 열악한 환경의 마을이 있고 시장이 그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담에 쩍하고 금이 간 곳은 수두룩하고 무너진 채 방치된 집도 있더군요.”
“담만 그런 게 아니죠. 굵은 균열이 없는 집이 거의 없을 걸요?”
“네. 그 틈을 시멘트로 대충 메워놓았더라고요. 솔직히, 그 마을을 둘러보고 충격도 받았지만, 정말 창피했습니다.”
“......”
“시장이나 되는 놈이 그런 환경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말해 뭐하겠습니까.”
도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조했고, 영배가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두진과 이경재는 쓰게 웃었고, 이경재가 입을 열었다.
“사실, 거기가 대흥시에서 거의 제일 낙후된 곳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서 집이 거기인 아이들은 그걸 필사적으로 숨깁니다.”
“숫자가 많습니까?”
“제가 알기로 초등학생은 없고 중학생이 둘, 고등학생이 하나 있습니다.”
대흥시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아는 이야기 하나.
그건 미국에 할렘이라는 빈민가가 있다면 대흥시에는 오향마을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 마을이 그렇게 버려진 것처럼 된 데에는 좀 복잡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장님.”
“......”
두진의 말에 도훈이 심각한 눈빛을 했다.
환경이 무척 열악한 그 마을에 들어섰을 때, 지금껏 자신이 와보지도 않고 챙기지도 않았다는 게 정말 부끄러웠던 도훈이었다.
동시에 직원 중 그 누구도, 심지어 대흥시 시정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는 두진조차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게 놀라다 못해 좀 화까지 났었다.
“그게 뭡니까?”
두진에게 묻는 도훈의 눈이 무척 낯설다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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