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주머니 속 송곳 - 3.
토요일 오후, 대흥시청 시장실.
“정말? 어제 장관을 만났단 말인가?”
“네. 김용진 의원이 밥 먹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방안에 최 장관이 있더라고요.”
“허허. 이거 놀랄 노자네, 그려.”
도훈이 어제 있었던 장관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니 두진이 무척 놀랐다.
소파에 두진과 마주 앉았던 영배가 빙긋 웃고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줬다.
“저랑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 좋았겠네?”
“좋은 건 아니고요. 최민욱 장관이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데 저도 모르게 사진 한 장만 찍어달라는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하하.”
책상에 앉은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특별한 용건 없이 그냥 제게 호기심이 있어서 만나고 싶었다는데, 실제로는 무슨 토론회나 다름없었습니다. 이것저것 참 의견 구할 것도 많더군요.”
“토론회? 장관이랑 무슨?”
“정책에 대해서요. 두 시간이 넘게 문답이 오갔습니다. 장관이 하도 진지해서 그만하자고 할 수가 없더라고요.”
“허허.”
두진이 웃는데, 도훈이 덧붙였다.
“장관 만났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정임 씨나 홍 주무관님도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최 장관은 별말 안 했는데, 김용진 의원이 충고하더라고요. 공식적인 만남도 아니었으니까 소문내지 않는 게 좋겠다고요.”
“흐음. 하긴 도지사하고는 좀 차원이 다르지.”
“김 의원도 실장님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게는 도지사나 장관이나 저 구름 위 세상 사람인 건 똑같은데 말이죠.”
“허허.”
담담한 도훈의 말에 두진이 실소했다.
강정문은 예나 지금이나 여당의 유력 인사인 건 맞지만, 대선주자급으로 인식된 적이 없었다.
강정문은 자기 관리가 훌륭하다는 것이나 뚜렷한 개혁적인 성향을 인정받긴 하지만, 역경을 헤치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그런 이미지는 약했다.
반면에 최민욱은 수도권의 안정적인 지역구를 신인에게 넘기고 영남으로 내려가 두 번이나 선거에 떨어지고서도 끝내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었다.
이른바 ‘지역주의 타파’라는 대의를 몸소 실천하고자 일부러 험지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성과를 낸 사람.
여당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됐던 건 바로 그런 이력 때문이었다.
‘그런 강 도지사랑 최 장관을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하고 있구만.’
정치에 별 관심 없는 일반인은 강정문 도지사와 최민욱 장관을 ‘같은 급’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은 다를 터.
하지만, 도훈이 강정문과 최민욱을 비슷하게 대하는 건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도훈에게는 ‘급’ 혹은 대중적인 평가가 어떻든 간에, 그들은 가까이해서 별로 득 될 게 없는 ‘정치인’일 뿐이니까.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도훈이 시장실에 붙은 화장실로 들어가자 그의 등에다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던 영배가 입을 열었다.
“사실, 도지사랑 장관이 다 거물이긴 하지만, 좀 결이 다르지 않습니까? 시쳇말로 충남의 여당 소속 시장, 군수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우리 시장이 도지사랑 친하게 지내는 건 ‘그런가 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장관이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면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 같단 말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좀 웃긴 얘기지만, 질투를 살 수도 있지.”
“그렇죠? 저도 실장님과 같은 생각인데, 도훈이 저 녀석은 그냥 단순히 ‘정치인들 다 귀찮다’는 게 전부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제 친구지만, 저런 때 보면 정말 유별납니다.”
푸념하는 듯한 영배의 말에 두진이 빙긋 웃었다.
“하하, 그쪽으로만 유별난가? 여러모로 독특한 사람이잖아. 내가 유유자적 은퇴 생활 즐기다가 괜히 지금 비서실장 하는 줄 아는가? 일이 보람된 것도 있지. 그러나 자네도 자네지만, 김 시장의 그런 독특한 면을 곁에서 보는 게 재미있기 때문이라네.”
“쩝, 재미만 있으면 다행이죠. 때로는 아주 스펙터클합니다. 보는 제가 조마조마할 정도로요. 아, 어제도 김용진 의원이 같이 ‘치맥’ 하자고, 자기가 사겠다고 하는 걸 ‘까고’ 대흥으로 돌아왔다니까요.”
“하하하! 그런 게 지나고 나면 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법이라네.”
두진이 너털거리며 웃었고 영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쯤 하시고 얼른 시작하시죠. 저녁에 갈 데가 있잖습니까.”
화장실에서 나온 도훈이 두진과 영배에게 말하고는 책상에 앉아 두툼한 서류에 집중했고, 두진과 영배도 뒤를 따랐다.
그렇게 또 주말 특근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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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뒤, 시청 소회의실.
“... 어떻습니까, 시장님?”
위원 한 사람이 대표로 뭔가를 이야기하고 도훈의 의견을 물었고, 도훈은 잠시 말없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위원 여러분 전원의 생각이십니까?”
“전원은 아니고요. 동의한 사람이 과반은 되는 것 같습니다.”
주민참여 예산에 제안된 안건의 우선순위를 최종결정하는 회의.
가능한 많은 위원이 참여할 수 있게 하려고 토요일인 오늘로 일정을 늦췄다.
서른으로 늘어난 위원 중 27명이 참여한 오늘 원래의 목적인 우선순위 결정은 끝났는데 위원들이 도훈에게 한 가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일단 제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 그러시죠.”
27명의 위원과 시청 관련 부서 직원이 모두 그대로 자리한 가운데, 도훈이 몸을 일으켰다.
“반영구적 체육관 시설은 주민참여 예산으로는 어렵다는 걸 알고 계시죠?”
“네. 그래서 ‘제안’ 형식을 빌리는 겁니다.”
체육관 건설을 대표로 제안한 남자가 답했고,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계면 주민센터 확장 신축이 가능해졌고, 내년 예산부터 반영되어 시행에 들어갈 거라는 건 이미 대흥시 시민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 때문에 주민참여 예산안에 올라왔던 운계면 주민센터 건은 논의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그 대신에 간간이 제안이 올라오던 다른 안건 중 체육관이 언급됐던 것.
“시청 옆에 있는 체육관은 어떻습니까?”
“좀 비좁지 않을까요?”
시청 옆에 있는 간이건물 체육관은 테니스 코트 두 개에도 못 미치니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제가 시장 되기 전에는 탁구를 하러 거기를 매일 같이 드나들었습니다.”
“아, 그러셨어요?”
“네. 그런데 저는 사람들이 탁구 혹은 가끔 배드민턴 하는 것 말고 체육관에서 다른 뭔가를 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 그건···.”
남자가 좀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거렸고, 도훈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반대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위원님이 이야기하시는 체육관과 지금 체육관이 많이 다르다는 건 저도 아니까요.”
“... 네?”
“위원님은 관중석도 제대로 있고 체육 행사가 됐든, 일반 행사가 됐든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는 그런 시설을 말씀하시는 걸 겁니다. 그렇죠?”
“맞습니다. 저희가 생각한 건 종합체육관이랄까? 종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시설입니다.”
도훈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시설, 있으면 좋죠.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테니까요. 시민들 사이에 그런 의견이 있다는 걸 시청에서도 압니다. 중장기적으로 계획하자는 의견도 있었고요.”
“아, 그렇습니까?”
“네, 하지만 반려됐죠.”
“네?”
“여러 가지 문제점이 예상되었기 때문인데요. 중장기 추진안이 올라왔지만, 최종 심사 회의에서 저를 포함해 다수가 반대했죠.”
“... 왜요?”
남자 위원은 매우 아쉽고 좀은 불만이라는 표정이었고,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우선, 그런 시설을 짓는데 들어가는 예산이 문제죠. 종합체육시설은 설사 필요성이 커도 국가나 도에서 예산 지원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 왜 그런 건가요?”
위원석의 여자 위원 하나가 물었고, 고개를 그쪽으로 돌린 도훈이 담담히 답했다.
“물론, 우선순위의 문젭니다. 또, 그런 시설은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 네?”
“번듯한 시설은 관리비용도 제법 들어갑니다. 건축비와 관리비용을 들이는 만큼의 효용이 당연히 있어야겠죠?”
“그렇죠.”
“하지만, 우리 시는 인구부터 작으니 그런 시설이 필요한 경우가 적을 거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죠.”
“그냥 시민에게 개방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닐까요?”
“원칙은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관리의 문제가 항상 있죠.”
“흐음.”
알 듯 말 듯 한 표정의 여자 위원에게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이미 있다면 어떻게든 효율성을 높이는 쪽으로 고민해보는 게 맞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그런 시설을 큰돈을 들여 지었을 때 과연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정말로 필요한 것인가부터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이 풍족한 경우는 없으니까요.”
도훈이 위원들을 두루 살피며 설명을 이어갔다.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시장이 굳이 저렇게까지 공들여 ‘당장은 안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나 싶은 모양인데, 도훈 본인은 아주 정성 들여 말하고 있었다.
대흥시에 체육관 시설을 필요로 하는 실업팀도 없고, 각급 학교에 그 시설을 사용할 운동부도 없다는 등의 설명을 마친 도훈이 위원들을 살폈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이해가 간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훈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런 시설이 한때 우후죽순처럼 지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방자치제도가 다시 시작된 직후가 그랬죠.”
“그땐 왜 그랬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네? 제게 물으신 건가요?”
“네. 한번 맞춰보세요.”
도훈이 한 젊은 위원에게 되묻자 그가 쩔쩔맸다.
“하하, 그, 그게··· 음··· 단체장들이 치적 자랑하기 좋아서 그랬을까요?”
“정답입니다.”
“그, 그렇군요.”
싱긋 웃은 도훈이 말을 이어갔다.
“우리 시만 해도 1년 예산이 1천3백억 정돕니다. 절대 적은 돈이 아니죠. 물론, 용도를 변경할 수 없는 경직성 예산의 비중이 크지만, 그렇게 엄청난 돈을 매년 씁니다.”
“......”
“체육관 같은 시설, 건물은 당연히 사람들 눈에 띄고 오래 갑니다. 대놓고 자랑할 수 있죠. 봐라, 저 건물 내가 지었다고 말이죠. ‘시민들의 세금으로 이렇게 번듯한 성과를 냈다’ 이런 식으로요.”
진지하게 경청하는 위원들에게 담담히 도훈이 말을 이었다.
“시민의 삶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시 행정 분야는 없습니다. 당연히 좀 더 긍정적이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변화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렇죠?”
“네.”
“그 모든 과정에 돈이 듭니다. 그리고 그 과정 대부분의 결과물은 ‘건물’처럼 유형으로 남지 않습니다.”
“......”
“여러분이 이해하기 가장 쉬운 사례가 아마 ‘무상급식’ 같은 것일 겁니다.”
“......”
잠시 말을 끊은 도훈이 위원 하나하나와 시선을 맞춘 뒤 입을 열었다.
“저는, 성과가 유형으로 남지 않는다고, 쉬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무상급식이 불필요한 사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맞아요.”
“물론입니다.”
여기저기서 도훈에게 찬동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공감대가 큰 사업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고, 사업목적을 계속 달성하기 위해 관리도 잘해야죠. 소중한 세금을 쓰는 것이니까요.”
“......”
“체육관을 짓기로 하면, 들어갈 돈 전부를 외부에서 끌어오지 않는 한 시 예산의 조정이 불가피해집니다. 무상급식 예산은 아마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그런 좋은 의도를 가진 다른 사업이 축소되거나 늦춰질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 흐음.”
“저나 시청 직원들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겠죠?”
“... 네.”
위원 대부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도훈이 뜻밖의 말을 했다.
“저런, 이렇게 쉽게 승복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는 안 된다고 얘기하려고 한 게 아닌데.”
“네?”
“정말 체육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그 근거를 더 튼튼하게 하고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미리 고민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 그, 그렇죠.”
“시장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근거가 갖춰지면, 당연히 추진하지 않겠습니까?”
도훈의 말에 처음 체육관 얘기를 꺼낸 남자 위원이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은데요?”
“지금 위원님은 제 얘기밖에 들으신 게 없는데요?”
“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의 의견, 두루 들어보셨습니까?”
“두루··· 까지는 아니죠.”
“들어보세요. 그리고 공감하면 다시 얘기하셔도 됩니다.”
“......”
“그리고 모르잖습니까? 제가 얘기한 선한 의도를 가진 사업 중에도 효용이 떨어지거나 혹시 엉뚱한 데 돈을 쓰고 있는 사업이 있을 수도.”
“... 그, 그럴까요?”
“저나 직원들은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완벽한 행정이란 없으니까요.”
위원 대부분과 직원들은 도훈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저 뒤편에 앉아 경청하던 두진과 영배는 도훈이 다음에 할 이야기를 알 것 같았다.
“공무원은 시 행정의 전적인 책임자가 아니라 여러 주체의 하나일 뿐입니다.”
“......”
“시민 역시 엄연히 자치 행정의 한 주체이고요.”
“......”
위원들을 돌아본 도훈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타당성과 근거를 갖춘 사업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는 시장이나 공무원은 없습니다.”
“그 타당성과 근거를 갖추기가 어렵잖아요.”
어떤 위원의 말에 도훈이 웃으며 답했다.
“시청 직원 300명 정도입니다. 대흥시 시민 5만이 안 되지만, 그냥 5만이라고 치죠.”
“그런데요?”
“머리를 맞대면 어느 쪽이 타당성과 근거를 찾기가 쉽고 어느 쪽의 의견이 더 셀까요?”
“5만이 머리를 맞대는 게 가능할까요?”
“십 분의 일이라고 해도 5천인데요? 5천 대 3백, 누가 더 셀까요?”
“......”
위원들이 침묵했고,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게 하라는 게 자치 행정이고 지방자치입니다.”
씨익.
뒷줄에 앉은 두진과 영배의 얼굴에 비슷한 미소가 맺혔다.
주민참여 예산 결정 회의가 어느새 ‘일상적’ 주민참여의 필요성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자리가 되어버렸으니까.
두어 달 전부터 도훈이 시민들 모임을 찾아다닐 때마다 늘 그렇듯이.
‘역시 유별나. 그리고···.’
위원들을 상대로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는 도훈을 바라보며 두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훈을 두고 ‘낭중지추’라는 생각을 한 것은 강정문, 최민욱만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같이 그 생각을 하는 두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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