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주머니 속 송곳 - 2.
“전부터 만나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이루어졌네요.”
“그러셨습니까.”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장관에게 답하며 도훈은 장관 옆에 앉은 김용진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오늘 행정자치부 방문을 오후 늦은 시간으로 미루더니, 청사 안에서 도훈이 용건이 있는 부서 실, 국장과 다 만나게 해주겠다며 이리저리 ‘안내’를 자처할 때 좀 느낌이 이상하긴 했다.
‘저녁밥 먹고 가지 않겠냐는 얘기를 했을 때 눈치를 채고 거절했어야 하는데···.’
행자부 일정을 잘 마치고 나온 도훈에게 같이 저녁 먹지 않겠냐며 데리고 온 곳이 이 일식집이었고, 방문을 열고 나서야 도훈은 이 안에 장관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장관의 말을 들어보니 오늘 이 만남은 장관이 원했던 것 같질 않은가.
김용진을 향한 도훈의 눈빛이 워낙 강렬해서 최민욱 장관이 알아챘다.
최민욱이 웃으며 김용진의 편을 들었다.
“김 의원 뭐라고 하지 마세요. 내가 전부터 김 시장님 만나게 해달라고 여러 번 보챘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내가 한참 선배니까 김 의원은 거부할 도리가 없었지요.”
“그래도 차라리 정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맞지, 이렇게 얼렁뚱땅 속여서 데리고 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하. 그건 김 의원이 직접 변명하게. 그 부분은 내가 편들어줄 수 없겠어.”
최 장관의 말에 김용진이 입을 열었다.
“김 시장님이 관심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잖습니까. 그것도 정치인들의 관심은 아주 진절머리를 내는데 솔직히 얘기했으면 왔겠어요?”
“... 아닐 겁니다.”
“거 봐요. 나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요. 하늘 같은 선배님은 자꾸 쪼이는데 당사자는 이런 식이지. 내 나름대로 잔머리를 쓸 수밖에요.”
항변하는 김용진을 바라보던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떨결이었지만, 이미 방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고 장관과 인사하고 악수까지 했다.
왠지 눈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여기까지 김용진을 따라와 버린 자신을 탓할 수밖에.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 주십시오.”
“하하,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김용진에게 마지막으로 사나운 눈빛을 보낸 도훈이 표정을 풀고 최 장관과 시선을 마주했다.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그 정도 얘기는 할 수 있지요.”
“어떤 용건으로 절 보려고 하셨는지요?”
“이런, 벌써 본론입니까? 나 딱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 김 시장님 만나려고 한 거 아닙니다. 그냥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겁니다. 혹시, 그럼 실망입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마음은 편하네요.”
“하하, 그러면 다행이고요.”
최 장관이 부드럽게 웃더니 물을 마셨고, 도훈도 목을 축이는 사이 조상님께 말을 걸었다.
‘...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느낌인데··· 맞습니까?’
- 그래. 그 도지사 녀석과 비슷하다. 다만, 이 녀석은 도지사보다 명분을 중요시할 것 같다. 지저분한 일은 가까이 안 할 것 같은 건 비슷해. 실제로도 별로 때 안 탄 것 같다.
‘... 확실하죠?’
- 확실해.
‘진짜죠?’
- 아, 그렇다니까!
잠시 조상님과 툭탁거린 도훈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나중에 알면 영배 형이 무척 아쉬워하겠네.’
지금 영배는 일식당 홀에 김용진의 비서와 마주 앉아 있을 터.
세종으로 오는 차 안에서 운 좋게 장관 얼굴 한 번 보는 거 아니냐 이야기하던 걸 생각하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 김 의원도 그랬지만, 강정문 도지사가 전부터 김 시장 얘기 몇 번 했었어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 그랬습니까?”
“네. 그래서 무척 궁금했습니다. 내가 호기심이 생기면 끝까지 참지를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하하.”
수더분하게 웃고 난 최 장관이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런데 김도훈 시장에 관한 호기심을 처음 부추긴 사람은 내 딸이에요.”
“... 따님이요?”
“네. 지방선거 끝난 직후에 그 녀석이 ‘아주 재미있는 시장’이 하나 있다고 영상을 보내줬거든요. 그 왜 화제가 됐던 방송 인터뷰 말입니다.”
“아, 예.”
“그거 보고 한참 웃었죠. 그리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때때로 방송에 대흥시 얘기가 등장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관심이 갔죠.”
“... 네.”
“자, 여기 밥 가격도 비싸지 않고 꽤 맛있습니다. 우리 밥 먹으면서 얘기하죠.”
최 장관은 도훈에 대해 좀 아는 모양이지만, 도훈은 최 장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에 대화는 최 장관이 주도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 어때요, 그런 쪽은?”
“글쎄요. 제가 회사원 생활 3년 정도 한 것 이외에는 거의 프리랜서 비슷한 생활을 해와서···.”
“아, 그래요? 그럼 시장 되기 전에, 가장 최근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봐도 괜찮아요?”
“학원 강사도 했었고, 판타지 소설 작가도 좀 했죠.”
“작가요?”
“네. 전혀 유명하지 않았습니다만.”
“하하하! 이거 걸작이네!”
도훈의 개인적인 사안에 관해 묻던 최민욱 장관이 호탕하게 웃었고 도훈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괜히 저 자신을 ‘갑툭튀’, ‘듣보잡’이라고 표현했던 게 아닙니다.”
“그러게요. 정치나 행정 쪽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어요, 하하하!”
최 장관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 웃어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화제는 도훈의 최근 생활로 넘어갔다.
“저런,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합니까?”
“일부러 많이 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다 보면 끝이 없더라고요.”
“그렇기는 해도···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그게··· 정책 설명서나 보고서만 보면 너무 단편적인 이해에 그치고 마니까요.”
“단편적인 이해라···.”
“네. 보고서는 어떤 정책이 어느 분야에는 효과가 있을 테고, 어떤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식으로 잘 정리가 되어 있지만, 상황에 대한 배경 인식이나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의식 같은 걸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너무 단편적이거나 즉자적인 수준에서 그치고 마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말하자면, 정책 입안 단계의 고민부터 되짚어 헤아리는 게 옳다는 겁니까?”
“옳다 그르다고 판단할 건 아닌 것 같고요. 저는 그 정도까지는 따라가 봐야 집행에 만전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아무래도 초짜니까요.”
“허허.”
최민욱 장관이 경탄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정책 제안 혹은 입안자들은 그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결정자’들을 이해시키려 무척 노력한다.
다만, 다수의 정책 제안과 비교해 ‘결정자’의 시간은 부족하기 마련.
당연하게도, 모든 정책 제안자들의 고민까지 깊이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어떤 정책이든 ‘결정자’들의 손에 전해질 때는 아주 간략하게 핵심적인 내용만 요약해 정리되는 게 보통이다.
담당자에게 설명이야 듣겠지만, 대개 결정자들은 그렇게 핵심만 요약된 것들을 놓고 판단을 한다.
‘... 그렇게 해도 업무에 치일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토론을 통해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이도 있고, 죽으라고 공부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대개 소수.
‘... 소도시 시장이라서 가능한 게 아니야.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자리에 앉더라도 저런 태도는 변함이 없을 것 같군.’
도훈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그가 공부하는 건 대흥시에서 입안하고 실행하는 정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기초자치단체의 행정 사무에는 국가나 광역단체에서 위탁한 게 아주 많으니까 그런 부분도 공부한다고 했다.
고지서 발부하고 증명서 떼주는 일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겠지만, 국가가 새로 시행하거나 보완, 수정하는 정책은 언제나 많다.
‘... 어디···.’
도훈을 경탄스럽게 바라보던 최민욱 장관이 뭔가를 결심하고 눈빛을 달리했다.
부드러운 최민욱의 눈빛이 달라진 걸 알아챈 도훈이 의아해하는데, 최민욱이 입을 열었다.
“다음 달부터 정부입법으로 시행하는 건이 하나 있어요. 그거에 대해 의견을 좀 구하고 싶은데요.”
“... 예.”
갑자기 태도가 확 변한 최민욱의 모습에 도훈이 긴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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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봅시다, 김 시장.”
“... 네.”
“하하, 다음엔 힘들게 안 할게요. 그땐 편하게 밥 먹읍시다.”
“... 네.”
“먼저 갑니다. 보좌관님도 고생하세요.”
“네, 장관님!”
최민욱 장관이 대기하던 보좌진과 먼저 자리를 떴고, 김용진은 그를 배웅하겠다며 따라나섰다.
어느새 홀에 있던 영배도 방에 들어와 있었다.
최 장관은 친절하게도 홀에서 대기하던 영배를 불러 그와 악수하고 사진도 찍어줬다.
그와의 만남은 무려 2시간이 넘게 술 한 잔 마시지 않고 이어졌지만, 식사라기보다는 ‘토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도훈이었다.
“어휴, 지친다.”
최 장관이 나가자 도훈이 풀썩 자리에 주저앉아 물을 마셨다.
“지쳐?”
“어.”
“지칠 정도로 얘기를 많이 했냐? 무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했길래 그래?”
“막판에 형도 좀 들었잖아. 그런 얘기를 두 시간이 넘게 했지.”
도훈의 말에 영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의 질의, 응답이던데? 장관이 묻고 너는 답하고. 그것도 국가 정책을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무슨 정책 자문위원도 아니고···.”
“그럼 적당히 하고 그만하자고 하지 그랬냐?”
“그러려고 했는데, 그 양반이 너무 진지했잖아. 형도 봤을 거 아니야? 최 장관 눈 반짝반짝 빛나는 거.”
“그랬지.”
“어휴, 어쨌든 무슨 시험 보는 기분이었어.”
“고생했다.”
최민욱 장관과 도훈의 대화는 갓 시행되기 시작한 정책 혹은 시행될 예정인 정책에 대한 문답이 주를 이루었다.
최 장관도 처음엔 그냥 도훈을 시험해 볼 목적으로 그런 얘기를 시작했는데, 도훈의 답이 예상보다 훨씬 ‘핵심’을 짚고 있어서 ‘하나 더’, ‘하나 더’ 하다 보니 이렇게 길게 이어진 것이었다.
“행자부 국장한테 긍정적 대답을 들었을 때까지가 딱 좋았는데···.”
“하하, 그랬냐? 장관씩이나 되는 양반을 직접 만났는데?”
“장관이랑 만난 다음부터는 딱히 우리 시에 도움될만한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어. 일방적으로 그 사람 페이스에 내가 말렸거든. 하, 너무 방심하고 있었나 봐.”
“흔한 정치인은 아니지.”
“도지사랑도 이런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긴, 그 양반은 좀 기분파지.”
“그래. 그런데, 최 장관은 완전 실무형인가 봐.”
도훈과 영배가 착각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다면, 강정문은 도훈과 당선 직후에 만났기 때문에 ‘업무능력’보다 ‘성품’ 쪽에 더 흥미를 보였고, 최민욱은 이미 성품은 김용진이나 강정문에게 들어 알고 있어서 ‘업무능력’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밥은 맛있게 먹었냐?”
“... 먹긴 했는데, 얘기하느라 정신없어서 잘 기억도 안 나. 하도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배가 다 고프네.”
“하하하. 너답지 않다.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나 마이 페이스인데 말이야.”
“그러게. 상대가 완전 ‘일 모드’로 나와서 그런지 나까지 그래 버렸어.”
“뭐라도 더 먹고 갈까?”
“여기서? 아무리 봐도 비싸 보이는 집인데 남이 사주는 거 얻어먹으면 몰라도 내 돈 내고 사 먹을 엄두는 안 난다. 차라리 대흥에 가서 치맥이나 합시다. 그게 낫겠어.”
“그러자. 안 그래도 이번 주는 내내 맥주 한 모금도 입에 못 댔잖냐. 오늘 금요일이고, 이미 퇴근 시간도 한참 지났는데, 잘 됐다.”
“아이고, 좀 적당히 합시다. 어떻게 술 얘기만 나오면 그리 눈이 반짝반짝 빛나?”
“남 말하고 있네. 거울이나 봐, 인마.”
도훈과 영배의 수더분한 대화를 문밖 복도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사람이 소리 없이 웃었다.
최민욱 장관을 배웅하고 돌아온 김용진이 어느새 도훈과 영배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
김용진이 담담히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저런 때는 보통의 서른다섯 같네.’
조금 전까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최 장관이 질문한 국가 정책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며 정책의 결과에 대한 예견을 장관에게 거리낌 없이 말하던 사람의 말치고는 참 평범하달까?
- 어떠셨습니까?
- 한 마디로, 낭중지추야. 앞으로도 눈여겨봐야겠네.
김용진의 물음에 최민욱 장관은 아주 인상 깊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최민욱과 비슷한 무게감을 가진 사람이 도훈을 비슷하게 평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지만, 오늘 김용진 자신이 느끼기에도 도훈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 역시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이야.’
웃으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김용진이 방문을 열었다.
“하하하, 다 들었습니다. 치맥이요? 좋죠? 저도 끼워주시죠, 시장님.”
“......”
호탕하게 웃는 김용진에게 도훈이 아주 떫고도 떫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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