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주머니 속 송곳 - 1.
“안녕하십니까, 조 시장님. 저 김도훈입니다.”
- ......
한참 말이 없던 조민구가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 기, 김 시장이 왜, 왜 그 전화를···.
“조 시장님 비서 남성준 씨, 지금 저와 함께 있습니다.”
- ......
“얘기는 다 들었습니다. 남성준 씨가 정당한 요구를 한 것 같은데, 시장님은 오히려 화를 내셨다고요?”
- ... 그, 그게 아니고···.
“지금부터 잘 생각하고 얘기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제 비서관은 어제 본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 남성준 씨가 요청하면 언제 누굴 상대라고 해도 증언할 생각이니까요.”
- ......
“그리고 어제 회식했던 식당 종업원들도 아마 증언을 서줄 겁니다. 거기 CCTV가 있는지 확인을 아직 못했는데, 제가 요청하면 식당 사장님도 흔쾌히 증거로 제출해 주실 것 같네요.”
- ......
피식.
도훈은 말문을 잃은 조민구가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피식 웃었다.
“남성준 씨 바꾸겠습니다. 아, 한 가지 빠트렸네요.”
- ... 무, 뭘 말이오?
“제가 ITS 방송국 사회부 기자 하나를 아주 잘 압니다. 뭐, 그쪽이 아니면 강정문 도지사님께 사람 하나 만나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고요.”
- ... 기, 김 시장!
기겁한 조민구가 목소리를 높였고, 도훈과 마주 앉은 남성준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도훈 옆에 앉은 영배가 소리 죽여 웃었고 도훈은 최대한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하겠다는 건 아직 아닙니다. 그런 줄 아시고 잘 생각해서 남성준 씨랑 통화하시길 바랍니다.”
- ......
척.
도훈이 핸드폰을 건넸자 남성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아들었다.
도훈이 남성준과 시선을 마주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남성준이 다부진 표정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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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쯤 뒤, 아까와 같은 커피숍.
“... 다 썼네.”
“제가 중재인 자격으로 확인하도록 하죠.”
“그러시게.”
A4용지에 쓴 조민구의 각서를 확인하는 건 도훈도 영배도 남성준도 아닌 조민구와 함께 나타난 중년의 남자.
“흠, 내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남 주무관 자네도 읽어 봐.”
“네, 지부장님.”
OO 시 공무원 노조 지부장에게서 각서를 받아든 남성준이 차분히 이를 읽어내려갔고,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중년 남자가 조민구에게 속삭였다.
“시장님,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이거 전부 시장님이 잘못하신 겁니다. 아시죠?”
“알아. 그러니까 두말없이 각서 썼지.”
“각서로 끝나는 게 천만다행입니다.”
“... 자넨 내 밑에서 일하고, 여기도 내가 데리고 왔는데, 내 편은 전혀 안 들어주나?”
“시장님 입장도 생각하니까 이 정도로 중재가 되는 겁니다. 안 그랬으면···.”
“크, 크흠!”
남자의 과장된 표정에 조민구가 헛기침했다.
조금 전 그가 자필로 쓴 각서에는 어제 있었던 일을 적은 뒤 모두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에 대한 사과와 남성준의 치료비를 책임진다는 내용도, 후에 이 일을 빌미로 남성준에게 어떤 불이익도 주지 않겠다는 내용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OO 시 공무원 노조 지부장이 중재자로 조민구가 각서를 쓰는 현장에 동석한 것은 영배의 아이디어.
남성준의 뜻을 따라 일을 널리 알리지 않기로 했지만, OO 시 직원 중에서도 최소한 사건을 아는 중재자가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지부장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발 부탁드리는데 술 좀 적당히 하세요. 특히, 시장님 기분 나쁠 때는 절대 술 드시지 마세요. 과음하지 않으셨으면 이런 소동은 없었을 거 아닙니까.”
“... 쩝, 그놈의 술이 원수지.”
조민구의 떨떠름한 말에, 내내 듣고만 있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술이 무슨 죕니까. 아무 죄 없는 술을 마시고 개 진상 짓을 하는 사람이 문제지.”
“......”
“안 그렇습니까, 지부장님?”
“하, 하하. 트,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머쓱한 표정의 지부장에게서 얼굴을 확 일그러뜨린 조민구에게 시선을 돌린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지부장님 말씀대로 이 정도로 끝나는 거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남성준 씨가 원하지 않아서 이렇게 끝나지 아니었으면 내일이나 모레쯤 방송에 나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
“남성준 씨가 조 시장님이 술 안 드시면 멀쩡하신 분이고 직원들에게 나름 예의를 갖출 줄 아시는 분이라고 말해서 이렇게 넘어가는 겁니다. 뭐, 제 선택은 아닙니다만.”
“... 휴우.”
얼굴이 벌게진 조민구는 도훈에게 뭐라 대꾸를 못 하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도훈은 다독이듯 말을 이었다.
“시장님 친구분이 왜 지난 선거에 떨어졌는지 아십니까?”
“...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열 받았다는 눈빛으로 째려보는 조민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시장님 친구분이 술도 한 방울 안 마신 멀쩡한 정신으로 어떤 시민을 오해하고 막말했기 때문입니다.”
“뭐요?”
“그 시민이 사실관계를 밝히고 사과를 요구했는데, 친구분은 오히려 한술 더 뜨는 막말을 했다더군요.”
“......”
“그 일이 발단이 되어 결국 시장님 친구분은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죠?”
“......”
조민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문을 잃었고, 도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오늘 시장님은 현명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
“이러지 않으셨으면 오늘 당장이 아닌 나중에라도 시장님을 더는 그 자리에 놔두면 안 되겠다는 누군가가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
“여기 있는 남성준 주무관이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입니다.”
조민구가 잠시 도훈의 얼굴을 뚫어질 듯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 자기 이름이 언급되자 각서를 읽던 남성준이 고개를 들었고 조민구와 시선이 마주쳤다.
“... 하, 하하.”
조민구가 머쓱하게 웃었고 남성준이 각서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 밖으로 나왔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뭘요. 그나마 이렇게 해결되어 다행입니다.”
“시장님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혹여 무슨 일 있으면··· 아시죠?”
“... 감사합니다.”
남성준이 도훈과 영배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조민구 역시 떨떠름한 표정이긴 하나 저만치서 도훈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멀어져 가는 조민구 등을 바라보며 영배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저 양반이 친구보다는 조금 낫네.”
“다행히도 말이지.”
“그래. 어찌 됐든, 이번 일로 한 가지는 확실해.”
“뭐가 확실해, 형?”
“다음부터는 저 양반이 너한테 함부로 못 할 거라는 거 말이지. 킥킥!”
어제 뒤풀이에 참여했던 터라 영배는 현장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영배의 말대로 앞으로 도훈을 향한 조민구의 매우 아니꼬운 듯한 태도가 달라질 건 거의 확실했다.
무려 ‘증인’ 아닌가.
“그건 나한테도 다행이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끝나고 한 잔?”
“... 미쳤구나?”
“정색하기는. 그냥 해본 말이야.”
“일이나 하러 갑시다.”
“그려.”
실없는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돌아섰다.
그렇게 10월 셋째 주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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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나란히 들어선 도훈과 영배를 직원들이 맞이했고, 도훈과 영배의 얼굴을 차례로 살핀 정임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 그제 술 안 드셨죠?”
“그랬죠. 그제는 자느라 정신이 없었고, 어제는 시청에 나와서 공부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얼굴에 생기가 있으시네요.”
“그렇습니까? 하하.”
“조 비서관 말고요. 시장님이요.”
“아, 예.”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는 영배의 옆에서 도훈이 말없이 웃었고, 그런 도훈에게서 순심이를 받아 안아 들며 두진이 답했다.
“서른다섯 한창인데 그렇게 얼굴에 생기가 있어야죠. 제발 그 생기 잃지 않을 정도로만 술 드십시오.”
“... 지난주에 제 얼굴이 그렇게 심했습니까?”
“예, 심했습니다.”
“하하, 안 그래도 술에 대해 참 많이 생각하게 하는 한주였죠, 지난주는.”
친근한 잡담으로 시작한 비서실의 일과가 곧 조회로 이어졌다.
“행정자치부에 보낼 주민센터 신축 특별교부금 요청 공문 수정 끝냈답니다. 내용 확인해주셔야 합니다.”
“조회 끝나고 바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김용진 의원에게 지원 요청도 다시 한 번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고요.”
“네. 공문 확인하고 바로 전화하죠.”
“김 의원이 그 건으로 행자부에 같이 방문하자는 얘기를 할지도 모릅니다.”
두진의 말에 도훈이 물었다.
“시장이 가는 게 효과가 더 좋습니까?”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시장님이 가시면 주민센터 신축 건 말고 다른 이야기를 두루두루 하셔도 무리가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그냥 간부가 가는 것보다는···.”
“일석이조라는 거네요.”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 없는 한 일정이 잡히면 제가 가는 것으로 하죠.”
“네.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두진에 이어 영배가 끼어들었다.
“혹시 시장이 직접 가면 장관이 만나주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하하! 예산 철이 되면 시장, 군수뿐 아니라 도지사도 행자부나 기획재정부에 자주 드나든다네.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고 챙길 정도로 장관이 시간이 많지 않지.”
“아, 그렇군요.”
좀 실망한 태도의 영배에게 두진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우리 시장님은 도지사님이나 지역구 국회의원도 챙길 정도로 여당 쪽에서 관심을 두니까 말이야. 만약 장관이 청사에 있을 때 시장님이 방문하면 챙길 수도 있겠지. 지금 장관은 여당 의원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왜 그게 궁금한데?”
“아니, 시장님이 행자부 가실 때 저도 같이 갈 확률이 높은데 혹시나 해서요. 지금은 도청으로 가신 전 부시장님이 여름에 어르신 구했을 때 격려한다고 전화도 하셨었잖아요.”
“하하, 사람 참. 자네가 어쩌다 공무원 돼서 그런 얘기하는 거야. 일반 공무원들은 그런 생각 아무도 안 할 걸세. 장관이 괜히 장관인 줄 아는가?”
“쩝.”
“하하!”
“호호!”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영배를 두고 모두가 웃었다.
지금의 행정자치부 장관은 국회의원 당선 횟수가 강정문 도지사와 같을 정도로 여당의 중진 중의 중진이었다.
강정문보다 그에게 무게감이 좀 더 실리는 이유라면, 강정문은 한 지역구에서 내리 4선을 하다 도지사가 됐지만, 현재의 장관은 수도권 지역구를 포기하고 고향인 영남으로 내려가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에 낙선하고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다 끝내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점이랄까.
이른바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앞장서고 끝내 자신의 몫을 해낸 그런 인물.
대통령 선거 전에 여당 후보로 거론되었을 정도니까.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시죠.”
“알겠습니다. 수요일에 주민참여 예산 최종회의 있습니다. 안건 정리는 다 됐고요. 담당 직원들이 위원들과 현장 방문도 마쳤습니다.”
“분위기는 어땠다고 하던가요?”
“담당 직원이 위원들의 각 제안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평하더군요. 현장 방문 때도 거의 8할 넘게 참여했답니다.”
“다행이네요.”
“시장님부터 해서 공을 제법 들였으니까요.”
“앞으로 더 들여야죠. 갈 길이 아직 멉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두진의 말에 도훈이 빙긋 웃고는 말했다.
“그렇죠. 앞으로 걸을 구백구십구 걸음이 까마득하긴 합니다만···.”
“한 열 걸음만 더 쓰시죠.”
“구백구십구나 구백구십이나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하하. 네. 다음으로는···.”
조회를 마친 도훈은 제일 먼저 행자부에 보낼 공문을 확인하고 바로 김용진에게 전화했다.
- 아, 마침 금요일에 제가 세종시에 가기로 했는데, 그때 함께 가면 어떻습니까?
“이번 주 금요일이요?”
- 네. 오후에요. 행자부 담당 국장에게는 제가 미리 연락해 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의원님.”
- 아뇨, 제가 오히려 고맙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자기가 고맙다는 거지?”
그때 짐작했어야 했다.
김용진에게도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금요일 저녁, 세종시 어느 일식집의 조용한 내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도훈 시장님.”
“... 처음 뵙겠습니다, 장관님.”
여당 4선 의원이자 현 행정자치부 장관 최민욱과 악수하는 도훈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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