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반짝반짝 빛나는… 4.
10월 셋째 주 금요일 대흥시청 시장 비서실.
“... 아니, 도대체 어제 얼마나 드셨길래 그래요?”
“가든에서 다른 시장, 군수님들이 저한테 술 먹이려고 해서 제법 마셨죠.”
“... 그리고 또 드셨죠? 조 비서관이랑?”
“이제 정임 씨도 눈치가 빨라졌네요.”
“눈치가 빨라진 게 아니고 빤히 보이는 거예요. 시장님이랑 조 비서관 술만 마셨다 하면 막판에 ‘한잔 더?’ 꼭 하시잖아요.”
“... 하하.”
소파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쓰게 웃는 도훈을 정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오늘 순심이는 안 나왔어요?”
“어제 친구 집에 맡겼는데 찾으러 못 갔습니다.”
“어휴! 정말 대단한 주인이네요.”
“... 쩝.”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에 도훈이 입맛만 다시는데 정임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책상에 앉은 영배를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이상한 건 시장님이 숙취로 고생할 정돈데, 조 비서관이 생각 외로 멀쩡한 것 같다는 거예요.”
“... 말도 마세요. 저 인간, 어제 맥주를 막 들이켜다가 취해서 다 토하고 먼저 뻗었습니다.”
“......”
“업어서 집에 데려다주느라 힘들었어요.”
“자업자득이죠, 뭐.”
“......”
정임의 잔소리가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은 두진이 끼어들었기 때문.
“저런 소리 들어도 싸다는 거 아시죠?”
“... 네.”
도훈이 근무일 아침에 숙취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두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제 대흥시에서 뒤풀이에 참석한 건 도훈과 영배뿐이라 모처럼 정시에 퇴근한 다른 직원들은 골골거리는 도훈과 영배와 반대로 아주 쌩쌩했다.
“오늘은 야근 못 하겠네요.”
“... 감사합니다, 실장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주말에 하루는 꽉 채워서 공부해야 할 테니까요. 토요일이 좋으십니까, 일요일이 좋으십니까?”
“... 일요일로 하죠. 내일이라도 죽은 듯이 좀 자야겠습니다.”
“하하, 제발 그러십시오.”
도훈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비서실 소파에 앉아 차와 커피를 번갈아 마셨다.
아침도 먹지 않은 빈속인지라 그거라도 마시지 않으면 술이 안 깰 것 같아서였다.
그러고 있길 얼마, 사무실 전화가 울렸고 정임이 전화를 받았다.
곧 누군가와 통화하는 정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누구요?”
도훈이 정임에게 시선을 줬고, 정임은 어리둥절하다 못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통화하다 전화를 끊었다.
“이상한 사람들도 다 있네.”
“뭔데 그래요?”
“OO시장 비서실인데요. 자기네 직원 혹시 여기 오지 않았냐고 찾아요.”
“... 네?”
“어째 목소리가 이상했는데, 왜 저러나 모르겠네요.”
“......”
어제 마지막까지 가든에 남아 술에 취해 진상 짓을 했던 조민구가 바로 대흥시 바로 옆 OO시의 시장이었다.
“혹시 그 발 밟힌 비서 말하는 건가?”
“... 발을 밟히다뇨?”
“그런 일이 있었어요.”
도훈이 얼버무렸고 책상에서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영배가 끼어들었다.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요?”
“남성준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럼 어제 그 비서 맞는데···.”
“그래요? 어쨌든, 그 사람 혹시 여기에 오면 자기네 쪽으로 연락 좀 해달라네요.”
“... 뭐야, 이거? 가출이라도 한 거야?”
어이없다는 영배에 이어 두진이 입을 열었다.
“가출? 아무리 가출을 했다고 쳐도 왜 그 사람을 여기서 찾아?”
“그러게요. 이상한데요.”
다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 이상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남성준이라는 비서가 대흥시 직원도 아니고 대흥시청에 나타난 것도 아니었기에.
“일이나 하죠.”
관자놀이를 누르며 도훈이 입을 열었고, 그렇게 옆 동네 시장 비서의 일은 잊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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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시청 비서실.
“... 역시 해장에는 뜨끈한 국물이 최곱니다.”
“하하, 그렇지. 아침에 북엇국이라도 한 그릇 하고 왔으면 좀 덜 고생했을 텐데···.”
“아이고, 그럴 정신 없었습니다, 실장님. 가까스로 지각을 면했는 걸요.”
차에서 내린 도훈과 두진, 영배가 청사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잡담했다.
숙취에 시달리는 도훈과 두진 모두 ‘해장’을 원했기에 밖에 나가 식사를 하고 온 세 사람이었다.
“응?”
“왜?”
“아니, 저 사람···.”
현관에 거의 다 다다른 영배가 한쪽에 시선을 주고 의아한 표정을 했고, 도훈도 영배가 바라보는 쪽을 바라봤다.
낯선 남자 하나가 황급히 몸을 돌리고 멀어지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어제 봤잖아. 조민구 시장 기사님인 것 같은데···.”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뭐,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지.”
그러려니 하고 넘긴 셋은 3층으로 올라와 비서실에 들어섰고, 자리에 앉았던 정임이 도훈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 왜요?”
“좀 전에 어제 뒤풀이했던 가든 사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요.”
“그런데요?”
“이상한 사람이 와서 가게 앞을 지키고 있다는데요?”
“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은 도훈에게 정임이 말을 이었다.
“가게 주차장에 오전부터 차가 한 대 서 있대요.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공무원이라고 답했대요.”
“... 공무원이요?”
“네. 정확히 소속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얼버무리기만 할 뿐 대답을 안 했다네요.”
“... 그래서요?”
“지금도 있대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는데 수상해서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먼저 시청에 전화하셨대요. 어제 거기서 회식한 게 관련있는 거냐면서요.”
“......”
도훈, 영배, 두진 세 사람이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고, 두진이 입을 열었다.
“혹시 조금 전에 조 비서관이 봤다는 사람도 진짜 조 시장 기사님 아닐까요?”
“... 글쎄요.”
이상한 일이 계속 겹치고 있었다.
아침에 조민구 시장의 비서실에서 자기네 식구를 찾는 전화가 오질 않나.
정체 모를 공무원이 어제 회식했던 식당 앞을 지키고 있고, 조 시장의 기사로 의심되는 사람이 청사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는 것.
“그 비서랑 조 시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본데요?”
“... 저도 방금 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영배의 말에 도훈이 맞장구를 치는데, 도훈의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김도훈입니다.”
- ... 안녕하세요, 시장님.
“누구십니까?”
- 저 어제 뵀던 조민구 시장님 비서입니다.
“... 남성준 씨?”
- ......
“여보세요? 남성준 씨?”
이름을 언급하자 잠시 침묵하던 상대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 혹시 저 찾는 전화가 왔었습니까?
“네. 그쪽 비서실에서 아침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 ......
“어제 회식했던 식당에 자신을 공무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 지키고 있다고 하고, 우리 청사 앞에서 그쪽 시장님 기사님을 본 것 같기도 하고···.”
- ......
“이거 남성준 씨와 관계가 있는 겁니까?”
- ... 분명히 그럴 겁니다.
이상한 사건도 사건이지만, 도훈이 더욱 신경 쓰인 건 상대의 목소리가 너무도 침울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
- ... 네.
“가만, 혹시 지금 대흥시에 있어요?”
- 네. 시청 인근입니다.
“그럼 이리로 오지 않겠어요?”
- 안 그래도 시장님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요. 우리 기사님이 청사 앞에서 지키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영배 형이 본 게 조 시장 기사 맞았네.’
속으로 중얼거린 도훈이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그리로 갈게요. 지금 어디 있어요?”
주변에 선 직원들이 쫑긋 귀를 세우고 듣는 가운데, 도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남성준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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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북쪽 시가지가 끝나는 아파트 단지 상가의 커피숍 안.
“... 그렇게 된 겁니다.”
남성준과 마주 앉은 도훈은 일절 표정변화 없이 그의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표정의 변화가 없다고 기분도 변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옆에 앉은 영배의 눈이 불이라도 붙은 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과 같은 의미로 아주 싸늘하게 가라앉은 도훈의 눈빛이 그가 꽤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사님도 현장에 있었잖아요?”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미안하다고 하시대요.”
“공무원 노조에는 안 가봤습니까?”
“우리 시장님하고 노조 지부장하고 무척 친하거든요.”
“... 허, 참.”
얼굴은 거무죽죽하고 눈빛까지 확 죽어버린 남성준의 말에 영배가 탄식했다.
남성준의 사연은 이랬다.
올해로 3년 차 공무원인 그는 조민구의 비서실에서 근무한 지 거의 1년 가까이 됐단다.
멀쩡할 때의 조민구는 좀 권위적인 면이 있긴 해도 나쁜 시장은 아니란다.
업무에 나름 충실하고, 시청 직원들의 가정사도 챙길 정도로 꼼꼼하고 세심한 면도 있어 의외로 시청 직원 중에 그의 ‘편’이 꽤 된다나?
다만, 대표적인 단점이라면 술에 만취하면 말 그대로 ‘개 진상’이 되는 것.
사람 많은 자리에서 그러는 건 아니고 자신도 조심하기 때문에 지금껏 큰 문제를 벌인 적은 없었단다.
다만, 비서실 사람들은 아주 드물게 그의 개 진상 짓을 감당해야 한단다.
“발등은 심해요?”
“... 부러진 건 아니고 금이 갔답니다. 두어 달 이러고 지내야죠.”
남성준은 어제 조 시장에게 밟힌 왼발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어제는 치료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갔다가 도저히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 새벽에 응급실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아침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시청에 출근했다가 조 시장과 싸웠다나?
- 내가 그랬다고? 난 전혀 기억이 없는데?
술이 덜 깨 나타난 조 시장은 남성준을 보고 사과는커녕 인상만 썼단다.
아마도 어제 도지사에게 지원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것 때문에 기분이 별로였을 터.
소심한 편인 남성준도 이번에는 왠지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사과와 치료비 지급을 요구했는데, 당황한 조 시장이 ‘욱’한 것 같다는 게 남성준의 판단이었다.
- 자네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건가?
“제가 그런 요구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죠. 그래서 시장님도 당황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조 시장의 태도가 끝내 남성준을 ‘격발’시켰다.
“... 제가 미친 거죠. 감히 시장에게 대들다니.”
“미친 게 아니고 당연한 겁니다.
“... 그래도요.”
노조에도 알리고 언론에도 알리겠다 남성준이 말하자, 조 시장이 당황해 횡설수설하다가 이렇게 말했단다.
- 지금 협박하는 건가? 감히, 시장을 상대로!
남성준은 그런 조 시장과 더는 대화가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비서실을 뛰쳐나왔고, 운전기사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단다.
현장을 목격했던 기사는 고개를 내둘렀고, 생각다 못해 증인을 찾아 어제 회식장소인 가든에 갔는데 다른 비서실 직원이 지키고 있어 들어가지도 못했단다.
결국, 다른 증인인 도훈을 생각해내고 찾아오려다 기사가 대흥 시청 청사 앞을 지키고 있어 도훈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욱했던 시장님도 후회하고 있답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계속 비서실에서 전화와 문자가 오거든요. 시장님이 후회하고 있다고, 일 키우지 말고 돌아와서 이야기하자고 말입니다.”
도훈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음에도 남성준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가만히 남성준을 바라보던 도훈이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 그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내가 남성준 씨 안 도와줄 것 같아서 그래요?”
“... 여당 소속 시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시장님께 득 되는 건 별로 없을 테고, 혹여 일이 커지기라도 하면 여당과 척을 지게 되실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
담담한 도훈의 말에 남성준은 더욱 기죽은 모습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 그럴까요?”
“네. 성준 씨는 어느 정도 선까지 바라는 겁니까? 언론에 알려서 확 터뜨리길 원합니까?”
“... 아뇨. 다만, 조 시장님의 사과와 치료비를 받고···, 그리고 제가 비서실이 아닌 다른 부서에서 근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조 시장 밑에서 일하겠다고요?”
“별수 없잖아요.”
“......”
“그리고 언론에 터지면 십중팔구 엄청나게 당할 텐데···. 우리 시장님, 좀 구식이긴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할 정도로 나쁜 분은 아니거든요.”
잔뜩 풀이 죽은 남성준의 말에 도훈은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어제 도훈에게는 아주 ‘밥맛’이었던 조민구였지만, 정작 그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의 평가는 예상 밖이었으니까.
‘때 많이 묻었다면서요?’
- ... 어제 있던 다른 놈들에 비해 그렇다는 거였지. 내 보기에는 나쁜 놈이라고 하기 뭐하지만, 절대 착한 놈도 아니야.
도훈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확 언론에 터뜨려 조민구의 만행을 알려 버리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자칫 남성준도 피해를 볼 위험이 있고 정작 그가 원하질 않았다.
“정말 그 정도면 되겠어요?”
“... 네.”
“흐음.”
“도와주실 건가요?”
도훈이 담담히 답했다.
“도와주긴 하겠는데, 꼭 성준 씨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네?”
“후회하고 있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는 게 진심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지금이야 급하니까 어떻게든 성준 씨를 달래고 나중에 보복하려고 할 수도 있죠.”
“......”
“그렇다면 어쩔 건가요?”
“... 그때는 저도 어쩔 수 없죠.”
이를 악문 남성준의 답에 도훈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치인만의 익숙한 소통 방식이라···.’
어제 장 군수가 했던 말을 떠올린 도훈이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조 시장님께 전화 걸어서 저 바꿔 주세요.”
“... 어쩌시려고요?”
“선택의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
불안한 표정의 남성준이 한동안 도훈과 눈빛을 교환하다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조작하고 도훈에게 넘겨줬다.
신호가 세 번도 가지 않아 조민구가 전화를 받았다.
- 남 주무관? 어딘가? 응? 자네 지금 어디야?
다급한 목소리의 조민구에게 도훈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시장님. 저 김도훈입니다.”
- ......
전화기 너머, 말문을 잃은 조민구의 표정을 상상하는 도훈의 눈이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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