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반짝반짝 빛나는… 3.
“어이쿠, 술을 무슨 물처럼 드시네. 젊어서 그런가?”
“이야, 청산유수가 따로 없네. 어쩜 그리 말을 잘합니까? 어디 학원이라도 다녔어요?”
“허허, 내가 김 시장 나이 때는 시장이 아니라 시의원도 생각 못 하고 있었는데, 암튼 차~ 암 부럽습니다.”
도훈 앞에 마주 앉은 남자는 도훈이 뭘 하든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술을 마시든, 말을 하든, 다른 이들이 도훈을 조금이라도 칭찬하는 말을 하든 하면 꼭 한 마디씩 토를 달았다.
그의 말에 다른 단체장들이 미간을 찌푸릴 정도였지만, 대놓고 만류하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의 발언이 교묘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60대로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으니까.
- ... 네가 숨 쉬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 그러니까요.’
- 여하튼, 참···.
‘... 찌질해 보입니다.’
- 맞아.
“조 시장님, 술이 좀 과하신 거 아닙니까?”
“나요? 나 별로 안 마셨어요. 건강검진 받으니까 간 수치가 높다고 술 좀 줄이라고 해서 말이오.”
“......”
단체장 하나가 직접 말리지는 못하고 ‘술’을 언급하며 돌려 말했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눈치 보고 싶지 않은 건지 몰라도 조 모 시장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맨날 얼굴 보고 지낼 사이는 아닌지라 도훈은 그의 도발을 일일이 상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조 시장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방을 나선 도훈이 홀을 살폈다.
“아, 그래요? 하하. 그쪽 군수님도 참 대단하시네요.”
“그렇다니까요. 50대 초반이신데 체력이 정말···.”
“하긴, 단체장은 보통 체력으로는 못하죠.”
다른 단체장들의 기사, 비서들과 함께 있는 영배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는 모습이었다.
‘... 저런 건 부럽다니까, 진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은 도훈이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윤길현 시장이 나왔다.
“담배 한 대만 주세요, 김 시장.”
“네.”
도훈에게 담뱃갑과 라이터를 받아든 윤 시장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내가 전자담배로 바꾼 지가 좀 됐는데, 술이 들어가면 진짜 담배가 그렇게 땅겨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윤 시장이 빙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기분 괜찮아요? 조 시장님이 작정하고 건드리는데.”
“괜찮습니다. 귀담아들을 이야기는 없으니까요.”
“하하, 김 시장도 맷집이 세네요.”
다시 담배를 빨아들이고 연기를 내뿜은 윤 시장이 말을 이었다.
“오늘만 좀 참아요. 조 시장님이 자칭 ‘의리의 남자’라 친구 생각나서 저러는 것 같으니까.”
“... 친구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몰랐어요? 전임 강운천 대흥시장이랑 조 시장님이 친구잖아요.”
“... 그렇습니까?”
“네.”
이어진 윤 시장의 설명은 이랬다.
지역 보수 정당 소속으로 정치를 시작했다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민의당 소속 시장이 됐다가 지난 선거에 끝내 탈당하고 출마해 낙선한 강운천 전 대흥시장.
도훈과 마주 앉은 조민구라는 이름의 시장은 정치인 생활 출발부터 강운천과 거의 같은 길을 걸어 왔고 사석에서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분이 깊단다.
‘친구 때문에 나한테 감정이 있는 건가?’
남은 여당 단체장 중 유일한 재선이고, 다른 이들보다 나이도 많은 60대의 남자.
왠지 눈빛에 심술이 진하게 묻어나는 조민구의 표정을 떠올린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했고 윤길현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뒤풀이는 길어야 두 시간도 더 이어지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 그래야죠, 뭐.”
윤 시장이 도훈의 어깨를 다독이고 먼저 들어갔고, 잠시 뒤 도훈도 자리에 돌아왔다.
어느새 강정문과 장 군수까지 모든 단체장이 모여 있는 가운데, 술자리가 이어졌다.
조민구 시장은 강정문 옆에 찰싹 붙어 앉아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모양이었고, 그 때문인지 다행히도 도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시, 장길영 군수 옆에 앉은 도훈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에게 속삭였다.
“그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있었죠. 도지사님께 우리 군 사업 지원 확답을 받았거든요. 작전이 먹혔어요.”
역시 작은 목소리로 답하며 장 군수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 작전이요?”
“네.”
“설마 오늘 야당 단체장님들이 그러셨던 게···.”
“맞아요. 노리는 게 있어서 일부러 강짜를 부렸거든요.”
“... 하하.”
어이없어하는 도훈에게 장 군수가 말을 이었다.
“아마 도지사님도 다 알고 계셨을 테고, 미리 계산도 좀 하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확답을 하신 걸 테고요.”
“... 그냥 좋게좋게 대화해도 되는 일 아닌가요, 그럼?”
도훈의 질문에 장 군수가 쓰게 웃고 답했다.
“이게 정치인들의 참 어리석은 면인데··· 흉금을 터놓고 솔직히 대화한다고 말은 해도 실제로는 그렇지를 못하거든요.”
“......”
“어리석고 비효율적이지만, 나름 정치인만의 익숙한 소통 방식이랄까? 특히 서로 소속이 다른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말이죠.”
“... 네.”
“김 시장은 배우지 마세요. 나도 절대 좋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그래야겠습니다.”
도훈의 말에 다시 쓰게 웃은 장 군수가 충고하듯 말을 이었다.
“정치라는 게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가 참 커요.”
“......”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정치에서 어떤 정치인이 ‘롱런’했는지 알아요?”
“글쎄요.”
“아마 다른 분석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자기 속내는 잘 감추고 남의 속내는 잘 읽어내는 사람이 오래 견뎌왔다고 생각해요.”
“... 속내를요.”
“네. 지금까지의 정치는 유권자든, 상대 당 정치인이든, 공무원이든 결국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었거든요.”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장 군수가 술잔을 들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달라지겠지만, 아직도 그런 요인이 꽤 많죠. 어떻게든 변화시켜 나가야 하겠지만··· 그건 나 같은 늙은이보다 김 시장 같은 젊은 사람들의 몫이 클 테고···.”
“괜한 말을 하십니다. 무척 정정해 보이시는데요.”
“하하, 듣기는 좋네요. 김 시장은 무소속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좀 편한 점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앞으로 무소속의 단점도 경험하게 될 겁니다.”
“... 그렇겠죠.”
장 군수가 격려라도 하듯 도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난 김 시장이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끝까지 무소속으로요.”
“... 감사합니다.”
“감사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 상대 당에 김 시장 같은 참신한 인물이 들어가면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
장난기 어린 표정의 장 군수의 말에 도훈은 뭐라 답을 못했다.
“한잔합시다.”
“... 네.”
쨍.
장 군수와 도훈이 술잔을 부딪치고 잔을 비웠다.
주변의 단체장들은 물론, 저만치서 조민구를 상대하는 강정문 도지사도 그런 도훈에게 시선을 줬다.
야당 단체장과도 화기애애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도훈을 이채로우면서도 대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강정문.
그런 강정문의 옆얼굴과 도훈을 번갈아 바라보는 조민구의 눈에 불꽃이 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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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하하, 김 시장이야말로 고생했습니다. 고마웠어요.”
“저희 동네니까 그랬던 것뿐입니다.”
“여하튼요. 잘 지내시고, 다음에 봅시다.”
강정문을 차에 태운 승용차가 출발했고, 도훈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조민구가 집요하게 강정문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강정문은 끝내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조민구 시장의 요구를 거절한 강정문은 나름대로 정성 들여 조 시장을 다독이는 것 같았는데, 도훈이 보기에 조민구의 기분이 완전히 풀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강정문은 조 시장의 마음을 완전히 풀지 못하고 뒤풀이 자리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단체장들에 이어 마지막으로 떠나는 강정문의 차를 바라보며 도훈이 투덜거렸다.
“내가 폭탄 처리반이야, 뭐야.”
“... 그러게.”
옆에 섰던 영배가 맞장구를 쳤고,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든 안에 아직 단체장 한 사람이 남아있었다.
하필, 대흥시 바로 옆 동네 시장인 조민구가 방이 아닌 홀에 앉아 새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배웅하러 나오겠다는 조민구를 강정문이 말릴 정도로 꽤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두어 번 권해보고 우리도 가자, 형.”
“그러자. 그나저나 동네에 가서 한 잔 더, 콜?”
“... 쩝. 조금만이라면 콜. 나 꽤 마셨어.”
“그러는 것 같더라. 킥킥. 다른 단체장들이 너 술 먹이려고 했지?”
“그랬지.”
“킥킥. 그러다 한 사람 업혀갔잖아.”
“내가 그 양반을 집중공략 했거든. 나 술 먹는 만큼 당신들도 마셔야 한다. 뭐, 이런 본을 보인 거지.”
“여하튼, 고생했다.”
“나야, 뭐. 직원들이 고생했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도훈과 영배가 안으로 들어섰는데, 조민구 시장이 도훈을 향해 손짓했다.
“어이, 김 시장. 이리 와봐.”
“......”
흐느적거리며 몸도 가누지 못하는 조민구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예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말에 도훈은 말문을 잃었다.
“... 야, 그냥 가자. 보아하니 좋은 꼴 못 보겠다.”
“한번 시도는 해보고···.”
“에휴.”
애써 담담한 표정을 한 도훈과 미간을 찌푸린 영배가 다가갔고, 조민구가 유리컵에 소주를 반쯤 따라 도훈에게 내밀었다.
“한잔해.”
눈빛이 게슴츠레해진 조민구를 담담히 바라보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벌써 많이 드셨습니다. 그만하고 가시죠.”
“뭐? 나랑은 술 못 마시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시장님이···.”
쨍그랑!
조민구가 손에 든 유리컵을 바닥에 내던졌고, 유리컵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아이고, 시장님!”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앉았던 조민구의 기사와 비서가 만류하는 걸 밀치고, 조민구가 벌떡 일어났다.
“너도 나 무시하냐?”
“......”
“오늘, 도지사부터 시작해서 날 물 먹이더니, 너도 내가 만만해!”
“... 휴우.”
만취해 버럭버럭 고함까지 지르는 조민구가 넘어지지 않는 건, 그의 기사와 비서가 양옆에서 붙들고 있기 때문.
발음이 꼬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한눈에 봐도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그의 모습에 가만히 도훈이 한숨을 쉬었고, 당황한 그의 비서가 입을 열었다.
“시장님, 죄송합니다! 먼저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희 시장님은 저희가 모실게요.”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억!”
도훈에게 답하던 비서가 비명을 지르고 주저앉았다.
흐느적거리던 조민구가 그의 발을 일부러 콱 밟은 것이다.
“이제 니들까지 날 무시하냐! 너희들 시장은 나야! 이 자식이 아니라고!”
“시장님! 진정하세요!”
“놔, 이 새끼야!”
말리는 기사와 실랑이하는 조민구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훈과 영배뿐 아니라 저만치 떨어져 구경하는 가든의 종업원들도 전혀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도훈은 조상님을 불렀다.
‘... 조상님.’
- 응. 어떻게 해줘?
‘... 재워주세요.’
- 오냐.
“놓으라니까! 이 새···.”
풀썩.
“아이쿠!”
난동을 부리던 조민구가 갑자기 힘을 잃고 쓰러지자, 기사가 그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도훈이 얼른 다가가 쓰러지는 조민구를 받아 안아 다행히 바닥에 세게 부딪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잠드신 모양이네요.”
“휴우, 죄송합니다. 김 시장님. 우리 시장님이 평소엔 이러지 않으신데, 오늘은 술을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장님.”
조민구를 대신해 연거푸 사과하는 비서의 이마에는 진땀이 가득했다.
발을 세게 밟힌 통증이 보통이 아닌 모양.
“얼른 모시고 가세요.”
안쓰러운 눈빛으로 비서와 기사를 바라보던 도훈이 말했다.
기사가 조민구를 업고 나갔고, 비서가 몇 번이나 더 도훈과 식당 종업원들에게 사과한 뒤 밖으로 나갔다.
“... 드디어 끝이네.”
“아직이야.”
영배가 살벌한 눈빛으로 출입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도훈이 홀 구석으로 걸어갔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집어 든 도훈이 산산조각 난 유리컵을 쓸어 담았다.
“시장님, 저희가 치울게요.”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종업원들이 말렸지만, 도훈은 끝까지 빗자루를 놓지 않고 꼼꼼히 유리 조각을 쓸어 담은 뒤에야 가든을 나섰다.
“드디어 끝이네.”
“그러게.”
“얼른 가서 맥주나 한잔하자.”
“그럽시다.”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 선 도훈과 영배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날 벌어질 소동은 전혀 생각도 못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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