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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김에 시장 되다-70화 (71/279)
  • 70. 꼼수가 항상 묘수인 건 아니다 - 3.

    일요일 오후, 대흥시청 시장 비서실.

    “저기 시장님께 연락이 왔는데, 10분 정도 늦으실 것 같답니다.”

    “... 알겠어요.”

    정임의 말에 답하는 중년 여인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진하게 묻어났다.

    화가 난 게 역력한 표정이었지만, 중년 여인은 성질을 부리지 못했다.

    애초에 바빠서 만나기 어렵다는 사람에게 몇 번이나 만나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한 게 자신이었으니까.

    “실장님, 여기도 괜찮을 것 같지 않습니까?”

    “흠, 여기 건물이 이미 있잖아?”

    “여기 올 3월에 불난 곳입니다. 그 이후로 계속 비어 있을 걸요?”

    “아, 그 창고?”

    “네.”

    “글쎄···. 거긴 좀 외진 곳 아닌가?”

    “지금 주민센터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걸릴 거리인데요.”

    “뭐, 일단 후보지에 넣자고.”

    “알겠습니다.”

    으득.

    회의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말에 중년 여인 이혜미가 이를 악물었다.

    ‘일부러 저러는 거겠지?’

    주민센터 신축 후보지라는 아주 솔깃한 정보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공인중개사인 이혜미가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건 테이블에서 지도와 서류를 놓고 뭔가 리스트를 작성하는 이들의 모습이 의도된 행동이라서가 아니라, 후보지가 너무 많아서였다.

    “이게 11번이고···. 다음은 또 어딘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아무 곳이나 골라보세요.”

    “허허. 이러다 저녁도 집에서 못 먹는 거 아냐?”

    “에이, 한두 시간이면 끝날 겁니다. 운계면 시가지 인근이라고 다 후보지가 될 수는 없잖습니까?”

    “쩝. 빨리하세.”

    운계면 사거리 인근 시가지는 대흥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10층이 넘는 건물도 있고, 인근에 아파트 단지도 자리해 유동 인구도 대흥시에서 가장 많았다.

    하지만, 그 번화한 시가지도 한쪽 끝부터 반대쪽 끝까지 여유 있는 걸음으로 15분이면 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다.

    중심부에는 건물이 빼곡해 새로 건물 지을 곳이 마땅치 않았지만, 아예 마음먹고 외곽을 생각하면 사정이 달랐다.

    테이블에서 얘기되는 후보지는 전부 현 시가지 외곽이었다.

    - 주차장 땅요? 별로 관심 없습니다.

    용건이 뭐냐는 사무적인 시장의 말에 이혜미는 현 주민센터 옆 토지 매각 협상을 위함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도훈의 짧고 심드렁한 답에 더욱 다급해졌다.

    안 그래도 장민호의 얘기로 급했던 마음은, 토요일 시청 직원들이 운계면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돌며 시가지 인근 빈 땅과 그 시가, 그곳들의 소유주에 관한 정보를 확인했다는 걸 알고 더욱 급해졌다.

    시청에서 컴퓨터 자판만 두들기면 웬만한 정보가 다 나오겠지만, 어떤 땅이 매물로 나왔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즉, 시청 직원들이 공인중개사 사무소들을 도는 것은 그런 매매 정보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주민센터 이전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혜미는 주민센터 옆 땅의 주인인 사촌을 설득해 요구조건을 낮춰서라도 매각을 하기로 하고 도훈과 만나기로 한 터였다.

    ‘하지만, 시장이 진짜로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도훈이 정말 주민센터를 외곽으로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땅 주인이 원하는 가격에 팔기는 진즉에 틀렸다.

    주차장 땅은 시가지 중심부에 자리한 곳이라 거리가 멀지 않더라도 시가지 외곽보다 땅값이 비쌌다.

    시청 입장에서 매입 대금을 줄일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줄이는 게 이득.

    현 위치 확장 신축이 아닌 외곽으로의 이전이 더 적은 비용으로 더 실속있는 건물을 만들 수 있었다.

    잠깐만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 아는 이 뻔한 사실이 지금껏 ‘실행’되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이혜미는 그 하나의 이유에 기대어 도훈과 담판을 벌일 생각이었다.

    ‘... 잘 돼야 하는데···. 아니, 잘 되게 만들어야지.’

    이혜미가 초조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드디어 도훈이 돌아왔다.

    “김도훈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혜미라고 합니다.”

    이혜미에게 도훈이 아주 건조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제가 또 나가 봐야 해서 시간을 길게 드릴 수는 없습니다. 바로 시작하실까요?”

    “그러시죠.”

    “그럼 제 방으로 가시죠. 실장님도 들어오세요.”

    “알겠습니다.”

    도훈, 두진에 이어 시장실로 들어가는 이혜미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 이혜미의 전의는 5분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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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 아침, 대흥시청 건설교통과 사무실.

    꾸욱.

    이미 매도자의 도장이 찍힌 계약서 매입자 칸에 건설교통과장이 도장을 찍었다.

    꼼꼼히 간인을 마친 과장이 계약서를 마지막으로 살핀 뒤 두 계약서 중 한 부를 매도자에게 넘겼다.

    “확인해 보시지요.”

    “됐습니다. 대금 지급이나 서둘러 주세요.”

    “약속대로 선금은 오늘, 잔금은 목요일까지 입금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용건을 마친 이혜미가 몸을 돌렸다.

    주변의 공무원들이 날 서고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지만 애써 무시하면서.

    “휴우.”

    청사를 나온 이혜미가 한숨을 쉬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곳은 청사 옆 자판기 인근 흡연구역.

    미리 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장민호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도장 찍었냐?”

    “네.”

    “얼마에?”

    “... 90%요.”

    “후우.”

    장민호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오빠한테 약속한 건 못 줄 것 같아요. 서운해하지 마세요. 저도 정국이 오빠한테 중개비 하나도 못 받으니까요.”

    “그래?”

    “네.”

    이혜미와 장민호는 땅 주인이 원하는 액수에 매매가 성립되면 중개비와 사례금을 적잖게 받기로 약속을 받고 이 일에 나섰다.

    그간 오랜 시간 배짱을 부리며 시세의 두 배까지 가격을 올렸던 터라 사정이 급해 ‘작전’에 나선 땅 주인의 목표가 그 두 배를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계약은 두 배는커녕, 시세대로도 못 받고 시세의 90%로 체결됐다.

    “그 시장, 원래 그렇게 ‘똘아이’였어요?”

    “... 글쎄다. 사람들이 그를 평가하는 가장 대표적인 말이 ‘합리적’이라는 거다.”

    “합리적? 말도 안 돼요. 어제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얘기해 줬잖아요.”

    “... 그랬지.”

    이혜미가 미간을 찌푸리고 어제 오후의 일을 되새겼다.

    “왜 그곳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게 다수 주민의 의견인지 생각해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전임 시장님들은 과연 김도훈 시장님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접근성 떨어지는 곳에 지었다가 두고두고 비난받는 걸 두려워하신 게 아닐까요?”

    어제, 도훈과 면담을 시작하자마자 주차장 땅을 매입하는 게 좋을 거라 말하고 그 근거로 이혜미가 했던 말은 그랬다.

    시장 옆에 앉은 비서실장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작 시장인 도훈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 별로 겁이 안 납니다.”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말씀대로 전임 시장님들은 시민들에게 비난받을 수도 있는 일은 웬만하면 안 하셨습니다. 이유요? 재선을 노리는 분들이기 때문이겠죠.”

    “... 시장님은 다르시다는 겁니까?”

    이혜미가 인상을 쓰고 묻자 도훈은 담담히 답했었다.

    “재선을 시도할 수도 포기할 수도 있죠. 하지만, 재선을 시도하더라도 그때 비난받을 게 무서워 불합리한 선택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전임 시장들이 ‘이전’을 고려하지 않은 건, 현 위치를 원하는 주민의 요구가 높은데 이를 거부했다가 선거 때 약점이 될 게 겁나서였다.

    하지만, 재선은 아예 생각이 없는 도훈은 달랐다.

    “...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곳에 주민센터를 만드는 게 불합리한 거 아닌가요?”

    “접근성 때문에 시세의 두 배를 주고 땅을 사는 건 합리적입니까?”

    “......”

    말문을 잃은 이혜미에게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상가라면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겠죠. 하지만 관공서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주민센터와 주민 복지 공간은 유동 인구를 노리는 게 아니라 용건이 있는 주민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곳이니까요. 굳이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현 주민센터 자리에 복지 공간을 만들고 주민센터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 주민들도 크게 불만이 없을 겁니다. 뭐, 불만이 있더라도 점점 누그러질 테고요.”

    “... 안 누그러질 수도 있잖아요?”

    “안 누그러지더라도 감당하면 될 일입니다. 그게 왜 합리적 선택인지 설득하면 될 일이라고요.”

    “... 진심이세요?”

    “네. 행정은 주민들의 복지와 편의를 위한 것이지만, 그 와중에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이해가 상충하는 문제에서는 때때로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죠.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

    “제 입장은 다 밝혔습니다. 긴 시간을 드릴 수 없다고 미리 말씀드렸으니 본론을 얘기해 주세요. 도대체 얼마에 파시겠다는 건지.”

    “... 그, 그게···.”

    이혜미가 당황해 말을 제대로 못 잇는 순간에도 도훈은 당장에라도 몸을 일으킬 태세였다.

    이혜미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시세의 150%요.”

    도훈을 만나기 전 땅 주인과 상의했을 때 마지노선으로 잡은 금액이 이혜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그 이상을 받아내겠다고 장담을 했었건만, 면담 시작 5분도 되지 않아 이혜미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답할 필요 없겠네요.”

    벌떡.

    이혜미의 눈앞에서 표정변화가 전혀 없는 얼굴의 도훈이 몸을 일으켰다.

    “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약속이 있어서 이만···.”

    뚜벅, 뚜벅.

    자리를 박차고 문을 향해 걸어가는 도훈과 두진을 향해, 당황하고 정신이 없으며 무척 화가 난 이혜미가 안간힘을 써 입을 열었다.

    “더 내릴 수도 있어요.”

    멈칫.

    이혜미의 말은 도훈의 걸음을 붙잡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저 그 주차장 땅 두고 협상 같은 것 할 마음 없습니다.”

    “... 네?”

    “안 그래도 그 주차장은 이전 후보지로 생각하는 다른 곳들보다 땅값이 훨씬 비쌉니다.”

    “... 그, 그야 위치가 위치다 보니까···.”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라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땅값이 싼 다른 후보지가 널렸다는 얘깁니다.”

    “......”

    “솔직히 소장님이 팔겠다는 그곳은 시세에도 사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

    잠깐 말을 끊었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시세보다 얼마나 깎아주실 수 있는지 그것만 말씀하세요.

    “......”

    주민센터 옆 주차장은 주민센터와 함께 개발할 때 제대로 가치가 있다.

    시청이 포기하고 주민센터 자리에 복지 공간을 만들어버리면 주차장 땅을 단시일 내에 파는 건 요원한 일.

    “그게 아니면 면담 끝내시죠.”

    담담한 도훈의 말로 협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

    이혜미는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떻게든 땅을 팔아야 한다는 주인의 요구가 있었으니까.

    어제 일을 회상하던 이혜미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휴우, 어제 정국이 오빠한테 욕먹은 걸 생각하면···.”

    “......”

    중간에 두 번 땅 주인과 전화로 통화하면서도 도훈과 협상한 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세의 90%에 팔기로 협상을 마치고 땅 주인을 만나서 아주 ‘험악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 너무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 못 했는데···. 우리가 당한 거 아닐까요?”

    “무슨 소리냐?”

    “시장이 일부러 오늘 주민센터 이전 논의를 하고 발표까지 한다고 바람을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 시장과 의장이 하는 대화를 똑똑히 들었다니까.”

    “정말요?”

    “너 지금 날 의심하는 거냐?”

    이혜미가 심상찮은 눈빛으로 쏘아보자 장민호의 표정이 불쾌한 것으로 변했다.

    잠시 두 사람이 말없이 눈싸움하고 있는데, 누군가 눈치도 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왔다.

    “아, 장 의원님. 여기서 뭐 하세요?”

    “... 의장님.”

    장민호에게 인사한 안준식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데, 이혜미를 의식한 장민호가 질문을 던졌다.

    “의장님, 오늘 오후에 시장이랑 회의하기로 한 거 말입니다.”

    “네?”

    어리둥절해 하는 안준식의 모습에 장민호가 의아한 표정이 됐다.

    “오늘 오후에 우리 의원들하고 시장하고 주민센터 문제로 회의하기로 했잖습니까?”

    “우리가요?”

    “네.”

    “그런 적 없는데···. 뭐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예?”

    황당한 표정이 된 장민호에게 안준식이 말을 이었다.

    “누구한테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오늘 회의 없습니다. 오전이고, 오후고 말이죠.”

    “......”

    “그럼 일 보세요.”

    “......”

    굳어진 얼굴로 말문을 잃은 장민호에게 손까지 흔들어 보인 안준식이 커피잔을 들고 멀어져갔다.

    “오빠.”

    이혜미가 훨씬 더 매서운 눈빛으로 장민호를 노려봤고, 멍한 표정의 장민호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금요일, 이 자리였어. 시장과 의장이 대화하는 걸 엿들었지. 혹시 몰라 녹음까지 했었다.”

    “......”

    툭.

    외사촌에게 해명한 장민호가 액정을 건드렸고, 핸드폰에서 작게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아, 우리 딸내미가 정치인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지 뭡니까. 이제 겨우 중딩이···.

    - 하하하. 그랬습니까?

    안준식과 도훈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지만, 땅은커녕 주민센터의 ‘주’ 자도 두 사람의 대화에 등장하지 않았다.

    “... 지금 나랑 장난해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이혜미가 윽박질렀지만, 장민호는 그런 외사촌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 이, 이게 어떻게···.”

    자신이 들었던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잡담이 흘러나오는 핸드폰을 붙든 장민호의 얼굴이 까맣게 죽어있었다.

    그런 두 사람 바로 앞 허공에서 조상님이 진득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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