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꼼수가 항상 묘수인 건 아니다 - 2.
금요일 퇴근이 가까운 시간, 시청 건물 옆 자판기 인근 흡연구역.
도훈이 담배에 막 불을 붙이려는데 누군가 빠르게 다가왔다.
“의리 없게 먼저 피우기 있습니까?”
“뭐 이런 거에까지 의리를 찾으십니까?”
도훈이 미리 뽑아 놓은 자판기 커피를 내밀자 그걸 받아든 안준식이 피식 웃고는 얼른 담배를 뽑아 들고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은 몇 걸음을 옮겨 건물 코너를 돌아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휴우, 또 한 주가 끝났습니다.”
“그러십니까? 저는 아직 안 끝났는데요.”
“이번 주말에도 출근해요?”
“... 이젠 팔자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생 가는 팔자가 아니니 다행이라고 위안 삼고 있고요.”
“하하.”
도훈의 생활패턴을 잘 알기에 안준식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평일에 일찍 출근하고 대개 야근하며, 야근이 없는 날에는 시민들의 모임을 찾아다니며 이런저런 시정과제를 홍보하거나 의견을 듣는 걸 꾸준히 반복하는 생활.
그리고 웬만하면 공휴일에도 통으로 쉬는 법 없이 잠깐이라도 시청에 들러 뭔가를 확인하거나 공부하는 빡빡한 생활의 연속.
‘웬만한 정치인도 절대 저렇게까지 못하지.’
시민단체 활동을 하다 뒤늦게 정치에 뜻을 품은 안준식도 부지런한 면에서는 그 누구 못지않다는 얘기를 들었던 사람.
당선 직후, 의원으로서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 안준식도 도훈과 거의 비슷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점점 업무에 익숙해지고 능률이 오르면서 도훈보다는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그건 안준식과 도훈의 능력 차이가 아닌 업무의 성격이 다른 이유가 컸다.
쉽게 말해, 안준식은 어떤 일을 기획, 검토, 확정하고 후에 심사하면 끝이지만, 도훈은 그 모든 과정을 거의 똑같이 하는 데다가 실행도 해야 하고 대개 ‘사후관리’ 책임도 져야 하니까.
그리고 지금껏 안준식이 보아 온 도훈은 그 일을 나름 잘하기도 하지만, 자만하지 않고 항상 열심이었다.
‘그런 사람이 땅 투기? 헛소문도 좀 적당해야 말이지.’
안준식도 도훈에 대한 헛소문과 그를 반박하는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단박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단정하고, 소문의 뒤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판단한 그였다.
그래서 안준식은 시청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훈의 ‘결백’을 해명하고 있는 상황이 무척 반가웠다.
“그나저나 중요한 용건이란 건 뭡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예?”
“그냥 담배나 같이 피우면서 잠깐 잡담이나 나누자고 전화했습니다.”
“... 진짜요?”
“네.”
안준식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도훈을 빤히 바라봤다.
그가 이 자리에 온 건 급히 조용히 논의할 일이 있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었으니까.
그것도 민의당 소속 시의원들과 회의를 마무리하던 와중에.
“의장님이나 저나 긴장을 푸는 시간도 있어야 하잖습니까? 마침, 비서실 직원들이 다들 바빠서 의장님께 전화해 본 겁니다.”
“......”
수더분하게 웃으며 말하는 도훈의 모습에 안준식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사무적이기만 했던 도훈이 저렇게 웃으며 잡담을 청하는 게, 요즘 그의 속이 정상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 상황이 상황이니 오늘은 봐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벽에 등을 대고 앉은 두 사람이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이어갔기 시작했다.
“우리 딸내미가 말입니다···.”
“하하, 그래요?”
코너를 돌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엿듣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몸에 빙의한 조상님이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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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대화하던 도훈과 안준식이 시청과 시의회 건물로 헤어져 사라진 직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다가 조경수 뒤로 몸을 숨겼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힌 남자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오빠가 웬일이에요? 당분간 서로 연락하지 말고 조심하자고 하더니?
뾰족하게 날 선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건 그의 외사촌 여동생.
심각한 표정의 장민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전화했다.”
- 하! 그래요? 내가 중요한 상황이라고 전화했을 때는 귓등으로도 들은 척 안 하던 사람은 어디 갔대요?
시청 직원들이 나서서 문제의 소문이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헛소리라고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게 알려진 뒤, 그 소문을 유포한 배후 인물인 장민호의 사촌 여동생은 당황해 장민호에게 상담을 청했었다.
-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 일 시킨 사람들 입단속부터 해. 그리고 우리 당분간 서로 연락하지 않는 게 좋겠다.
- 오빠! 난 어떻게 하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빨리 땅 팔아야 한다고 난린데, 오빠가 하라는 대로 했다가 이렇게 됐잖아요!
- 공무원들이 경찰에 신고해 소문 유포자를 찾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 못 들어봤냐? 지금 섣부르게 뭐라도 했다가 잘못되면 들통난단 말이다! 들통나면 너만 난처한 게 아니야.
- 지금 자기 잘못될까 봐 겁나서 이러는 거예요?
- 말은 똑바로 해라. 내가 잘못되기 전에 네가 위험하다. 소나기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지 멍청하게 다 맞을 필요 없잖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왜 있겠냐? 돈이 아무리 중요해도 호적에 빨간 줄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해?
- ......
그렇게 말다툼이나 다름없는 통화를 한 게 불과 24시간 전의 일이었기에, 외사촌 여동생의 감정이 좋을 리 없다는 건 전화를 걸기 전부터 알고 있던 장민호.
그러나 감정이 어쨌건 간에 지금 급한 건 따로 있었다.
“잘 들어라. 그 땅 관련해서 일이 급하게 됐다.”
- 소나기는 피하고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면서요?
빠직.
빈정대는 외사촌의 말에 장민호의 미간에 핏줄이 솟아났지만, 성질대로 확 끊어버릴 수도 없었다.
문제의 땅 매각에 도움을 주고 대가로 받기로 한 게 작지 않았으니까.
“한 번만 얘기할 테니까 잘 들어. 듣고 나서 어떻게 할지는 네 맘대로 하고.”
- ......
장민호의 말이 더없이 싸늘했기에 외사촌이 침묵했다.
“시장이 운계면 주민센터 확장 신축 안 하기로 했단다.”
- 뭐, 뭐요?
“현재 주민센터 자리에 시민을 위한 복지 공간을 만들고 주민센터는 다른 곳에 새로 지을 거래. 그도 아니면 자기 임기 동안은 절대 이 안건을 진행할 마음이 없단다.”
- 누가 그래요? 시장이 그래요?
“그래. 시장 본인이 시의회 의장이랑 대화하는 걸 들었어.”
- ... 그, 그냥 해보는 말 아니고요?
“월요일 오전에 시청 입장 확정하고 오후에 시의회 의원들이랑 이 문제로 미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의원들과 합의 마치는 대로 발표할 모양이야.”
- ......
“시장과 의장이 합의한 대로 되면, 그 땅 파는 건 영영 물 건너간다. 단순히 늦춰지는 정도가 아니야. 앞으로는 주민센터 주차장이 아닌 복지센터 주차장 정도가 되겠지.
- ... 어, 어떻게 해요?
“빨리 움직여.”
허둥대는 외사촌에게 장민호가 차갑게 말했다.
“빨리 정국이랑 연락해서 만나. 만나서 이 사실을 알려라. 주말 안으로 어떻게든 해치워야지 그렇게 못하면 두 배는커녕 파는 것 자체가 물 건너간다. 월요일이 되면 이미 늦어.”
- ......
“내가 시청이나 의회 쪽 움직임은 되는대로 파악해서 알려주마. 얼른 움직여라.”
- 아, 알았어요. 나중에 연락해요.
외사촌이 전화를 끊었고, 장민호가 잔뜩 인상을 구긴 채로 한숨을 쉬었다.
그간 시장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많은 이가 공감한 건 ‘합리적’이라는 평가였다.
그런데 그런 시장이 갑자기 주민이 반대했던 옛 방식을 강행하려는 이유가 뭘까.
“... 괜히 건드렸나?”
헛소문을 통해 압박하려는 의도는 좋았으나 압박에서 그치지 않고 뭔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까지 건드린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결국, 최근에 생긴 별명처럼 건드리지 않아도 될 걸 건드려 부스럼을 일으키고 만 상황.
“... 제길.”
시청 3층을 노려보며 장민호가 씹어 내뱉듯 중얼거렸다.
노기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장민호는 또 한 번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 쯥. 넌 인마, 아직 멀었다.
장민호를 바라보며 조상님이 피식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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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도훈은 비서실 직원 전원을 출근시켜 대흥시 운계면의 주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훑으며 주요 나대지에 대한 정보를 모으게 했다.
- 왜 이 일이 필요한 겁니까?
- 뭣 때문에 이러시는 건데요?
두 시간 만에 시청으로 복귀한 직원들이 이유를 궁금해했으나 도훈은 아무 설명 없이 그들을 귀가시켰다.
그중 홍영진을 불러 이런 대화를 한 건 다른 직원들도 몰랐다.
“... 가능하시겠어요?”
“다행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동네에 사는 친한 고등학교 동창이 있거든요. 걔도 걔지만, 걔네 어머님이 저희 어렸을 때부터 동네 소문에 아주 빠삭하신 분이죠.”
“그럼 좀 빨리 알아봐 주세요.”
“언제까지 필요하신지···.”
“내일 오전까지면 좋고요. 오늘 내면 더 좋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도훈이 홍영진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건, 운계면 주민센터 옆 나대지 주인의 근황.
그 주인이 사는 동네에 동창과 ‘소문에 빠삭한 동창 어머님’이 계시다 말한 홍영진은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도훈의 부탁을 받았고 일요일 아침 임무를 완수했다.
- 그 이정국이라는 땅 주인 말입니다. 반년 전쯤에 대전에 무슨 일을 크게 벌였는데 그게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급전이 필요한 모양이랍니다. 제 친구 어머니의 추측으로는 그 이정국이라는 사람 어머니가 동네 친구들 시켜서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닌가 생각하시더라고요.
홍영진과 통화를 마친 도훈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옆에서 조상님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 그냥 간편하게 나한테 맡기라니까?
“이번 달 제사상 예산이 빠듯하단 말입니다. 일 맡는 대신 메뉴 또 추가시켜 달라고 하셨잖아요?”
- 조상님한테 제사상 푸짐하게 차려주는 게 그렇게 아까우냐?
“아깝다기보다는 지나침을 경계하는 겁니다.”
- ... 말이나 못 하면···.
땅 주인에 대한 조사를 조상님이 아닌 홍영진에게 부탁한 이유는, 금요일 오후 장민호에게 ‘작업’을 거는 것까진 순순히 해주던 조상님이 이후에 ‘추가 요금’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힘을 쓰는 만큼 보충해야 한다는 조상님의 논리가 맞는 말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자칫 조상님이 매번 푸짐한 잔칫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홍영진을 택한 도훈이었다.
- 너, 인마. 치사하다는 생각 안 드냐?
“조상님이야말로 그 땅 주인과 똑같은 태도라는 생각 안 드세요?”
- 뭐? 내가?
“아쉬운 사람한테 배짱을 부리며 요구 수준이 높아지는 게··· 전 비슷한 것 같습니다만?”
- 야. 걔는 그 땅 안 팔아도 굶어 죽진 않지만, 난 소모한 기운을 어떻게 보충하냐, 그럼?
“그러니까 기운 소모 안 하시게 한 거 아닙니까?”
- 와, 이 얄미운 자식!
조상님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도훈은 심드렁한 태도로 외면하고 말았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어제 장 의원은 분명히 걸려들었고, 그 외사촌이라는 사람도 분명 땅 주인한테 연락했겠지. 내일이면 늦다는 얘기까지 들었으니까, 움직이면 분명 오늘일 텐데···.’
도훈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처음 걸린 전화라 숫자만 떴는데, 얼른 책상으로 가서 메모지 한 장을 확인한 도훈이 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리 알아놓은 장민호의 외사촌 여동생 핸드폰 번호였으니까.
- 왔냐, 드디어?
“네.”
조상님께 답한 도훈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김도훈 시장님 되시나요?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 안녕하세요. 저는 이혜미라고 제일 공인중개사 사무소 소장인데요.
“공인중개사 소장님요?”
- 네.
“...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짐짓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묻는 도훈을 ‘연기 잘한다’는 듯 감탄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조상님.
- 죄송한데, 만나 뵙고 말씀을 드리면 안 될까요? 중요한 일이라서···.
“저도 죄송합니다만, 용건을 밝히지 않고 만나자는 청에 선뜻 응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 아니, 시민이 만나자는데 시장님이 지금 거절하시는 건가요?
상대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지만, 도훈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아, 대흥시 시민이세요?”
- 그래요.
“시민이라고 말 안 하시면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 지금 말했잖아요!
“아무리 대흥시 시민이라도 이러이러한 용건이 있으니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는 게 맞는 거 아닙니까?”
- 그, 그게 당신, 시장이잖아요?
“... 지금 당신이라고 하셨습니까?”
- 왜, 왜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이 대뜸 당신이라고 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있을까요?”
- ......
“끊겠습니다. 전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뚝.
할 말만 마치고 전화를 끊어버린 도훈을 조상님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 왜요?”
- 왜 시비를 거냐?
“보였습니까?”
- 당연하지. 너, 사람 그렇게 대하는 놈 아니잖아.
“기선 잡기죠, 뭐.”
- 그게 다야?
씨익.
도훈이 웃는데,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같은 번호를 확인한 도훈이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감히 어머니를 추잡한 일에 갖다 붙인 사람들인데, 저도 개인적으로 이 정도 복수는 해도 되지 않을까요?”
- ... 흠, 그런 거면 실컷 해라. 원 없이 해.
“물론입니다.”
조상님께 답한 도훈이 핸드폰을 얼굴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도훈의 표정이 아주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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