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64화 (65/279)

64. 사람이 사람에게… 3.

얼마 뒤, 대흥 지구대 주차장.

택시 한 대와 소형차 한 대가 도착했고, 각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지구대 문을 향해 걷다 서로를 알아봤다.

“실장님!”

“어, 고 주무관.”

서두르는 기색인 두 사람은 제각기 손에 큼지막한 봉투와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 자네도?”

“네. 조 비서관이 헌 옷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남편 걸로 챙겨왔어요.”

“에휴.”

두진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정임이 얼른 두진의 손에서 봉투를 받아들고 걸음을 옮겨 지구대 안으로 사라졌다.

그 직후, 두진은 안에서 나오는 영배와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 그래.”

두진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에 찔끔한 영배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시장님이랑 홍 주무관은 안에 있습니다. 저는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

“어디를 가는데?”

“속옷 사러요.”

“속옷? 왜?”

“... 그게··· 이 사람들, 옷은 물론이고 속옷도 멀쩡한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

미간을 찌푸린 두진이 말문을 잃었고, 영배가 얼른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저만치 주차된 도훈의 차를 향해 뛰었다.

한숨을 푹 내쉰 두진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구대 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어쩐지 일찍 퇴근하자고 할 때 찜찜하더라니···.”

두진이 안으로 들어서니 여러 경찰관 중 낯익은 이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비서실장님.”

“수고 많으십니다.”

담담한 지구대장과 쓴웃음을 머금은 두진이 악수했다.

“어떤 상황입니까?”

“우선 폭행이죠. 가해자는 한 명, 피해자는 세 명.”

“... 폭행이라···.”

“오늘만 그런 게 아니고 오래 계속된 모양입니다. 이를테면 상습폭행인 셈이죠. 공장에서 데려온 외국인 노동자가 여덟인데, 다들 몸 여기저기에 멍 자국이 있어요.”

“가해자는요?”

“현장에 있던 한 명은 연행해 조사 중입니다. 외국인들 말로는 가해자가 한 명 더 있다는데, 연락이 닿질 않네요.”

두진이 말문을 잃었고, 지구대장이 계속 설명했다.

“공장 내부에 직원 숙소가 있긴 했지만, 불법체류 외국인들의 숙소는 컨테이너였고, 수돗가 말고는 샤워시설도 없더군요. 매 끼니는 외부에서 한국인 직원들이 조달해 먹었다는데, 이따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 형편없었던 모양입니다.”

“......”

“여하튼, 저희도 신고받고 현장에 가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 외국인이 여덟이라고 하셨죠. 혹시 전부···.”

“다섯은 불법체류자고요. 셋은 아닙니다.”

“휴우.”

두진이 한숨을 내쉬었고, 지구대장이 말했다.

“시장님은 3층에 계십니다. 외국인들이 우리 샤워실 쓰고 있는데 그 앞에 계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걸음을 옮기려던 두진이 문득 생각난 걸 물었다.

“아, 혹시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는···.”

지구대장이 가만히 고개를 젓고 답했다.

“연락 안 했고 아마 앞으로도 안 할 겁니다.”

“... 네?”

“신고한 사람이 시장님이 아닙니다.”

“예?”

“시장님 핸드폰이긴 했지만, 폭행 신고한 사람은 피해잡니다.”

“아.”

지구대장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두진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최소한 불법체류자들이 당장 출입국 관리 사무소 직원들을 마주할 일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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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지구대 옥상.

도훈은 불안한 표정의 외국인 노동자 여섯 명과 마주 앉아 있었다.

두 명은 경찰관과 피해자 진술을 하는 중이었고, 영배와 영진이 동석해 있었다.

모두가 이 일에 매달려 있을 수 없으니 정임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 그래서 경찰은 여러분이 불법체류자라는 걸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통보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 진짜로요?”

“네, 진짜로요.”

‘불법체류자 통보의무 면제제도’라는 게 있다.

이 제도는 범죄 피해를 당한 불법체류자가 경찰에 신고할 경우, 경찰이 출입국관리소에 통보하지 않고 피해자를 돕는 제도를 말한다.

도훈이 담을 타 넘어 112에 전화를 걸었지만, 신고를 직접 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모든 범죄가 해당하는 건 아니고 법으로 그 내용을 지정하고 있지만, 이미 몇 년 전부터 이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는 건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을 악용한 사건이 제법 많다는 걸 반증했다.

그리고 아직도 경찰에서 때때로 이 제도를 홍보하고 있다는 걸 볼 때, 불법체류 신분의 외국인들에게 이 제도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는 뜻도 됐다.

도훈과 마주 앉은 여섯 중 다섯 명이 바로 그 산 증거랄까.

“다른 사람에게도 얘기해 줘요.”

“아, 예.”

외국인이 동료들에게 설명하는 걸 도훈은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출동한 경찰과 함께 가해자와 여덟 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데리고 지구대로 온 뒤, 제일 먼저 외국인들이 목욕부터 하도록 했다.

샤워시설도 열악했지만, 빨래도 제때 하지 못한 듯 외국인들의 몸과 옷에서 악취가 진동해서였다.

노동자들이 경찰을 본 뒤 바짝 얼어있어서 도훈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고, 그 와중에 멍 자국으로 가득한 몸도 봤다.

지구대장의 조언을 듣고 그 멍든 몸을 일일이 촬영했고, 내일 날이 밝으면 병원에 가서 진료도 받을 예정이었다.

두진, 정임, 영진이 가져온 헌 옷들로 갈아입은 여섯 외국인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눴다.

몇 명은 도훈의 한국어를 알아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으니까.

“얘기하고 있어요. 난 담배 한 대 피울 테니까.”

“네.”

자리에서 일어난 도훈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외국인들에게 보이던 담담한 미소가 사라지고 싸늘하게 굳어진 얼굴이었다.

떨어져 있던 두진이 다가가자 도훈이 표정을 풀고 두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래도···.”

“조 비서관에게 자세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구타하는 영상도 봤고, 거기 시설 찍은 영상도 봤습니다.”

“... 네.”

경찰이 도착하기 전까지 도훈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숙소와 거주 환경을 핸드폰으로 자세히 촬영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도 같은 일을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노동자들을 구타하던 중년인 외에도 한국인 직원 둘이 뒤늦게 나타났지만, 워낙 차가운 도훈의 눈빛에 제지하지 못했고, 경찰이 나타난 다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야죠.”

“폭행 문제야 경찰이 나서겠지만, 다른 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여덟 명의 외국인 노동자 전부가 임금을 체불 당한 것을 받아내야 하죠. 그리고 열악한 시설에 감금하다시피 해놓고 숙박비에 식비도 받았다는데 그걸 돌려받아야겠죠. 마지막으로 합법적 체류인 사람은 직장을 옮기고 불법체류인 사람은···.”

“출국시켜야겠죠.”

“네.”

담담한 표정의 도훈을 빤히 바라보던 두진은 속으로 적잖이 안심했다.

현실적으로 ‘출국’ 이외에 불법체류자의 체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없다.

강제 출국을 당하느냐 아니면 자진해서 출국하느냐의 선택만 있을 뿐.

‘피해자로서 딱한 사정인 건 맞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출국뿐이야.’

공무원은 불법체류자를 발견하면 출입국 관리 사무소나 그 업무를 담당하는 이에게 통보할 의무가 있다.

‘통보의무 면제’를 통해 폭행 피해나 기타 부당한 대우와 임금 체불 등의 피해를 복구할 기회가 주어졌다지만, 불법체류가 합법으로 바뀌는 건 아니다.

두진은 도훈이 혹여 이 부분을 외면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던 것이다.

“그 공장, 가동된 지 열 달 정도 됐답니다.”

“아, 네.”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용된 건 아홉 달 정도라고 하고, 곧바로 임금 체불이 시작됐다네요.”

아직 누구인지 모를 공장주는 합법적으로 고용된 세 명의 외국인은 한국인 직원과 함께 직원 숙소에, 불법체류자는 컨테이너에 머물게 했다.

양쪽 모두의 급여에서 숙소, 식사 제공비를 공제했고, 합법 고용된 이들은 월급을 ‘저금해 준다’는 명목으로 일부만 지급했으며 불법체류한 이들에게는 신분상 약점을 이용해 월급을 대폭 깎았다.

폭행은 이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시작되어 점점 빈번해졌다는 게 외국인들의 한결같은 증언이었다.

“... 어떻게 설득하시려고요.”

“해봐야지요.”

근심스런 두진의 말에 도훈이 답했고, 두진이 말을 이었다.

“저 사람들 갈취당한 돈 받아내기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받아낸다고 해도 범칙금 같은 게 있을 텐데···.”

두진의 말에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실장님도 모르세요?”

“뭘요?”

“다음 달부터···.”

도훈이 설명하자 두진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진짭니까?”

“네. 저도 낮에 이것저것 공부하다가 알았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발표됐더군요. 아마 남북정상회담 관련 뉴스와 연휴에 묻힌 모양입니다.”

“허허, 하긴 지난주에 대통령께서 평양 다녀오시면서 다른 이슈가 다 묻히긴 했죠.”

“그러니까요.”

두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도훈이 말을 이었다.

“이건 좋은 기회입니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죠.”

“잘 활용해야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도훈이 중얼거리는 가운데, 9월 마지막 목요일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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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번갈아 조사를 받으며 지구대 숙직실에서 쪽잠을 잔 외국인 노동자들을 데리고 나온 도훈과 영배는 지구대에서 가까운 백반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돈 받으면 갚을게요.”

“물론이죠. 다 적어놨다가 한 푼도 빠짐없이 받을 겁니다.”

“그래요. 꼭 적어놔요.”

외국인들의 대표 격인 필리핀 출신 ‘로안’의 말에 도훈이 답했고, 외국인들과 도훈, 영배가 서로 격의 없이 웃었다.

어제저녁부터 외국인들이 매사에 ‘고맙다’를 연발하자 도훈이 ‘고마워할 필요 없다. 여러분 돕느라 들어간 돈은 나중에 다 받을 거니까.’라고 말했다.

외국인들은 조금 놀라더니 자기들끼리 상의하고는 ‘그렇게 해라. 우리는 우리 얘기 들어주면서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고맙다.’고 답했다.

어젯밤의 조사를 통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피해 사실 진술은 끝났다.

상습폭행 가해자인 중년인 공장주의 조사도 별 탈 없이 마무리됐다.

그에게 조상님이 ‘빙의’한 덕분에 그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행한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대우와 폭력적인 행위 일체가 경찰 조서에 적혔다.

문제는 중년인이 서류상 공장 주인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형의 소유라는 것.

전에도 이런 식으로 불법체류자를 고용해 업체를 운영하다 적발된 실질 소유자가 동생을 바지사장으로 앉히고 공장을 대흥시로 이전해 운영하는 상황.

서류상 주인이나 실질적 권한이 거의 없는 동생과는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해봤자 소용이 없을 터.

‘... 그래서 오늘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아주 중요하지.’

어제저녁 사건을 알렸으니 오늘 낮에 경찰서 외사과와 노동청 담당자가 대흥시로 올 터.

그들과의 협의도 협의지만, 궁극적으로는 공장의 실제 주인과 어떻게 담판을 할 것인지가 정말 중요한 터였다.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며 지구대로 돌아가자, 문앞에 지구대장을 비롯한 몇 사람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노동자들을 보자마자 이쪽으로 달려왔다.

“헉, 사장이다.”

로안이 놀랐고, 다른 외국인들도 표나게 두려운 표정을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달려오는 중년의 남자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대하고 폭행을 일삼은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거기 서세요.”

“뭐야, 너는? 비켜, 인마!”

도훈이 앞을 막아서며 말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가 화를 냈다.

“제가 누군지는 아실 필요 없지만, 우리는 당신이 누군지 아주 잘 알거든요.”

“뭐?”

“공장의 실질적 소유주이자, 동생을 바지사장으로 앉히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한 것도 모자라 임금도 체불하고 폭행까지 상습적으로 한 사람 아닙니까?”

“뭐 이 새끼야?”

살벌하게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에 살짝 놀란 기색이 어리더니 그가 갑자기 도훈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뭘 안다고 나불대? 엉? 네가 뭔데 일해야 하는 우리 직원들 데려다가 일을 꾸미고 있어?”

“......”

“너 이 새끼, 네가 뭔데 나서서 사람을 모함하냐고!”

멱살을 붙들린 채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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