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61화 (62/279)

61. 드러난 빛과 숨겨진 그림자 - 2.

대전을 떠나 시골집으로 향하는 도훈의 차 안.

감자탕 집 회장님이 ‘앞으로도 일 열심히 해라’며 선물로 챙겨준 포장된 감자탕과 뼈 찜을 차에 싣고 도훈은 묵묵히 차를 몰고 있었다.

내내 조용하던 조상님이 입을 연 것은 국도로 대흥시를 지나친 직후였다.

- 얘기해주지 그랬냐?

주어도 목적어도 생략된 말이었지만, 도훈은 조상님이 뭘 말하는지 잘 알았다.

“뒷감당할 게 걱정돼서요. 그래도 기자랍시고, 그 사람 뒤라도 캐면 어떻게 합니까?”

- 아직 수습 딱지도 못 뗀 병아리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 그리고 정치부도 아니고 사회부 기자가 될 거잖냐. 게다가 네 동생 무턱대고 일부터 저지르고 보는 그런 애 아니잖아.

“그런 애가 아니었던 건 맞습니다만, 과연 지금도 그런지 의문입니다. 걔가 기자가 된 과정을 생각해보세요. 제가 괜히 충격받았겠습니까?”

- 하긴, 그건 또 그러네.

도훈은 오정민 의원과 무슨 관계냐는 동생의 추궁에 끝내 사실을 밝히지 않고, 대학 다닐 때 그와 아는 사람에게서 좋지 않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둘러댔다.

도연이 오빠의 말을 선선히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주제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한때는 도훈 역시 오정민에 대해 동생과 비슷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신예은과 헤어지고 군에 입대한 뒤에도 그런 생각은 상당 기간 변하지 않았다.

- 도훈이 너한테 미안해.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신예은의 마지막 말이 남긴 후유증이랄까.

아마도 그녀에 대한 미움과 원망, 상처가 너무 컸고, 입대 전 오정민이 연락해 ‘예은이가 원한 거고 그 아이를 위한 거다’라고 말하며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던 게 영향을 끼쳤을 터.

도훈이 오정민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의문을 품게 된 건 군 생활 1년이 넘게 지나 분노로 뜨겁던 머리가 좀 식은 뒤였다.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정말 신예은이 진심으로 원해서 그렇게까지 했을까, 오정민이 무슨 술수를 부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었다.

그렇다고 1년이 넘게 지난 일을 파헤칠 수도, 당사자들에게 캐물을 수도 없는 상황.

그런 때늦은 의문에 도훈이 복잡해 하자, 휴가를 나왔던 어느 날 조상님이 도훈의 의사도 묻지 않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서는 오정민에게 빙의했었다고, 진실이 궁금하지 않냐고 물었다.

- 지나간 일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을 잘못 보는 실수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며? 그럼 네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인지 확인은 해봐야 할 것 아니야? 왜 그럴 용기가 안 나? 네가 오해해서 네 전 여자친구를 일방적으로 원망한 것일까 봐 두려우냐?

그런 조상님의 부추김에 도훈은 오정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걸 선택했다.

결론적으로, 신예은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녀가 현실적 욕심 때문에 도훈을 저버리고 오정민과 가까워졌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오정민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일부만 사실이었다.

예은이 아이를 지우고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돈을 받고 유학을 가기로 선택한 것은 맞았지만, 그건 오정민이 사람을 시켜 그녀를 부추긴 결과였으니까.

즉, 오정민은 신예은의 선택을 몰래 유도해 놓고는, 도훈에게 자신이 잘한 건 없지만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또한, 오정민의 개인사에서 문제시할 수 있는 것은 신예은, 도훈과 얽힌 일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 사람을 다치게 한 적도 있었는데, 집안일을 돌보던 고용인을 매수해 운전자를 바꿔치기하는 수법으로 법망을 피해갔다.

미국에서 유학 중일 때 사건들은 넘어간다 치고, 심지어 그는 활동하던 시민단체의 공식 입장을 제 뜻대로 하기 위해 집안의 힘을 빌려 은밀히 압력을 행사하거나 은밀한 금전적 거래를 한 적도 있었다.

도훈이 잠시 몸담았고 오정민이 활동했던 시민단체가 제법 유명하고 역사도 오래된 것이라지만, 돈과 돈에 부추겨진 권력 앞에서는 ‘돌파’보다 ‘타협’을 선택했달까.

그것 말고도 오정민의 인생에는 ‘청렴’, ‘깨끗’, ‘소신 있는 시민단체 활동가’와는 거리가 먼 사건이 여럿 있었다.

그 모든 과정에 오정민 본인이 그런 ‘협잡’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건 오정민 본인보다 그의 부친의 뜻이었다.

애초에, 오정민은 교수를 꿈꾸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인생 목표가 정치가에 맞춰져 있었다.

차남인 그는 어렸을 적부터 부친에 의해 정치인을 희망하도록 길러졌고, 철이 들면서 정치가를 온전히 자신의 꿈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집안 환경과 달리 진보적 태도를 표방하게 된 것은 그게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그 길이 전망이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즉, 진보가 아닌 보수의 길에 정치가로서의 더 큰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더라면 그는 지금쯤 여당 소속이 아니었을 터.

- 네가 그놈 실체를 알고, 그런 놈을 떠받들고 띄워주는 정치권의 모습에 질려버렸지.

“... 그랬죠.”

모두가 오정민의 실체를 감쪽같이 모르는 건 아니었다.

도훈은 논외로 하고, 오정민과 얽혀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고, 그런 일을 오정민에게 유리하게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들도 있다.

피해를 본 이들은 대개 돈의 위력에 입을 다물었고, 오정민을 도운 이들은 지금도 그의 주위에 도사리고 있었다.

현재 오정민 의원의 보좌진 중 최선임 인사가 대표적인 예.

그는 오정민의 아버지가 붙여준 손발이나 마찬가지로, 오정민의 대외 이미지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온갖 협잡을 마다치 않던 인물이었다.

준재벌 집안 출신 개혁세력의 아이콘인 여당 재선 의원 오정민과 도훈의 정치 불신의 뒷이야기는, 그렇듯 결코 유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 웃긴 건 그놈이 네 영입을 반대하고 있다는 거다. 그건 오히려 네 뜻을 도와주는 셈이구나.

“아이러니하게도 말이죠.”

- 그래.

“기분 좋은 얘기도 아니고 이쯤 하시죠.”

- ... 전 여친은 무감해졌는데, 그놈은 아닌가 보다?

“... 눈에 안 보이면 자연히 무감해질 수밖에 없죠.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지가 않잖습니까.”

국민들 사이에 제법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고, 똑똑한 데다가 말도 잘하는 오정민은 각종 TV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했다.

현재의 이미지를 잘 유지하고 관리한다면, 분명 조만간 대권 후보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갈 수도 있을 터.

조상님이 빙의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국회의원이 아닌 시민단체 간부였지만, 그가 비례 국회의원이 되고 서울에서 지역구를 맡아 재선하는 사이에 과거의 방식과 이별했을 거라고 도훈은 생각하지 않았다.

시장이 되기 전에는 그와 다시 상종할 일이 없을 거로 여기고 외면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다를 뿐.

- 운전에 집중해라. 내 그 얘기, 더 안 하마.

“감사합니다.”

후손의 표정이 좋지 않자, 조상님이 대화를 마치고 뒷자리로 물러나 침묵했다.

담담히 운전하는 도훈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조상님이 안쓰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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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왈! 왈!

컹! 컹컹! 컹!

도훈이 시골집에 도착한 건 이른 오후였다.

개들이 먼저 엉켜 반갑다며 마당이 좁다고 뛰는 가운데, 현관문을 열고 도훈의 아버지 김인식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냐.”

“네. 늦었습니다.”

“늦기는, 내 예상보다 훨씬 일찍 왔다. 손에 든 건 뭐야?”

“아, 이건요···.”

도훈의 손에 들린 포장된 감자탕과 뼈 찜을 보고 아버지가 묻자, 도훈이 사정을 설명했다.

“오호? 이걸로 저녁밥과 안주는 해결이네.”

“아닌 게 아니라 맛은 기가 막힙니다.”

“도연이는? 밥은 먹고 다니는 것 같디?”

“네. 좀 피곤해 보이는 건 여전했는데 걔도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쩝. 아무튼, 기자라는 직업도 참 그래. 엄연한 빨간 날인데 왜 쉬질 못해.”

도훈이 집에 들어가니 약하게 기름 냄새가 났다.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나온 도훈이 아버지께 물었다.

“제사 음식 준비 다 끝내셨어요?”

“어. 내일 아침에 데우기만 하면 된다. 뭐, 정석대로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 그럼 이제 저 뭐할까요?”

“할 일? 딱히 없는데···. 벌초도 엊그제 내가 다 했거든.”

“그래요? 그럼 산소에 다녀와야겠어요.”

“그러던지.”

집을 나선 도훈이 산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입가에 어느 틈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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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꼴꼴.

챙.

“크으!”

“......”

후루룩!

“흐음. 정말 맛 괜찮네. 이 가게가 대전에 있다고?”

“본점은 대전에 있는데 프랜차이즈에요. 아마 시내에 지점이 있을 걸요?”

“그래? 본점이랑 맛이 같으려나? 그나저나 술 어떠냐?”

“아버지가 담그신 술이야 언제나 훌륭하죠.”

“그러냐? 하하, 내가 공무원 말고 양조장을 해야 했는데.”

아버지가 담근 5년 된 매실주와 도훈이 대전에서 가져온 감자탕, 뼈 찜을 놓고 마주 앉은 부자.

“할만하냐?”

“글쎄요. 아직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네요.”

“됐네, 그럼. 앞으로도 그런 생각 안 들게 열심히 해.”

“네.”

몇 마디로 격려를 대신한 아버지의 모습에 도훈은 속으로는 쓰게 웃었다.

언제나 ‘용건만 간단히’ 주의인 아버지는 말을 길게 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혹시 저 시장 됐다고 잔치하셨어요? 하자는 사람 있었다면서요.”

“잔치는 아니고, 내가 사람들에게 밥이랑 술은 서너 번 샀지. 그러느라 한 30만 원 정도 썼다.”

“제가 용돈 드릴게요.”

“너 시장 되기 전이라면 안 받았을 거다만, 시장은 월급 나오니까 받으마.”

“하하, 네.”

말없이 잔을 주고받길 얼마, 도훈의 아버지가 질문을 던졌다.

“아직 멀었다만, 임기 마치면 그땐 어쩔 거냐? 본격적으로 정치할 거냐?”

“아뇨. 저 정치하고 싶은 마음 없어요. 지금도 정치가 아닌, 행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요.”

“주로 행정이겠지만, 일부 정치도 해야겠지. 시장이란 자리가 그런 건데.”

“부정할 수는 없는데요. 정치인 마인드 안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뭐,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내가 신경 쓰이는 건 임기 마친 뒤의 네 계획이다.”

진지한 아버지의 물음에 도훈은 담담히 답했다.

“일단 시장 되기 전처럼 글 쓰는 일은 계속하려고요. 대신, 소설 말고 행정이나 정치에 관한 것도 좀 써보려고 합니다.”

“흠. 내 아들치고 넌 똑똑하니까···.”

아버지의 말에 도훈은 다시 쓰게 웃었다.

아들이 온갖 종류의 책 읽기에 몰두했고, 철이 든 다음에는 정치, 행정 등의 분야에 대해 꽤 깊이 있게 공부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 아버지였다.

도훈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책 읽는 것에 몰두할 때마다, ‘내 아들이긴 한데··· 날 참 안 닮았네.’ 중얼거리던 분이기도 했다.

“소설 쓰는 거야 잘 모르겠다만, 다른 주제는 잘 쓸 것도 같다. 그 분야를 공부도 많이 했고, 4년의 실전 경험도 생길 테니까.”

“두고 봐야죠.”

“그래. 크으!”

쪼로록.

아버지가 술잔을 비웠고 도훈이 잔을 채웠다.

“아, 너 혹시 정당에 소속될 생각 있냐?”

“...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내가 밥 살 때마다 사람들의 제일 큰 관심이 네가 결국에 어느 당에 가입할까 하는 거였다.”

“... 하하.”

도훈이 좀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아버지도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민의당 아니면 진보정당인 진평당에 갈 거라는 이들도 있었고, 대자당 아니면 제2 보수 야당인 민국당에 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호남 기반인 신민당도 나쁘지 않다고도 하더라.”

“제가 맞춰볼까요? 대자당이나 민국당은 아무래도 아버지 옛 동료분들이 그러셨을 테고, 신민당은 동네 어르신들 쪽일 것 같고, 웬만한 사람들은 민의당을 그중 좀 젊은 쪽은 진평당을 얘기했겠네요.”

“... 점쟁이냐?”

“그냥 뻔한 추론이잖아요.”

“그래서 결론은 뭐야? 당에 가입할 생각 있어?”

“없어요, 아버지. 그냥 시쳇말로 ‘독고다이’가 좋아요, 저는.”

“뭐, 그거야 네 마음이니까 알아서 해. 다만, 신중해라. 네가 정당에 가입하는 순간, 사람들은 널 행정가가 아닌 정치가로 인식할 테니까.”

아버지의 지적에 도훈이 빙그레 웃고 답했다.

“정당에 가입하지 않으려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 그래. 마시자.”

“네.”

부자가 나란히 잔을 비웠고, 도훈이 웃으며 물었다.

“아버지는 어느 당 생각하셨어요?”

“나? 너 내 성향 알잖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도훈 아버지의 정치적 성향은 보수.

다행인 것은 수구와 보수를 구별하는 분이라는 것이고, 거기에 더해 자신의 정치적 성향뿐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자식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넘어가네.’

반년 만에 집에 온 것이라 아버지와의 대화가 꽤 길고 힘들 것이라 예상했던 도훈이 적잖이 안심하던 순간.

“너희 시청에 참한 아가씨는 없더냐?”

“콜록! 캑! 캑!”

사레가 들린 도훈은 마시던 술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고, 그런 도훈의 등을 아버지가 가만히 두들겨 주며 말을 이었다.

“시간 많으니까 찬찬히 살펴봐라. 너 인마, 인물도 괜찮은데 미혼 여직원들한테 인기 있을 거 아니야? 괜찮은 사람이다 싶으면 놓치지 말고 잘해주란 말이야. 알았어?”

“... 아, 아버지.”

“야, 직장 동료 사이가 원래 사람 알기도 쉽고 연애하기도 좋은 법이야. 내가 보수정당 가입하라는 소리 안 할 테니까 시장하는 동안 신붓감은 진지하게 찾아봐. 알았어?”

“... 어떻게 그럽니까?”

“내가 결혼하라고 했어? 신붓감 찾아보라고 했지. 결혼은 임기 끝나고 하더라도 좋은 사람은 미리 찾아보라고, 알았지?”

“......”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부친의 모습에 도훈은 속으로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분야가 있네요.’ 하고 탄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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