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드러난 빛과 숨겨진 그림자 - 1.
일요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차에 작은 가방과 순심이를 실은 도훈이 차를 몰고 있었다.
“쩝, 저쪽으로 가야 하는데.”
도훈이 반대편 차선에 늘어선 차들을 보고 중얼거렸다.
도훈의 고향은 대흥시에서 차로 국도를 달려 1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
전형적인 전북의 어느 작은 농촌 마을 초입에 자리한 시골집은, 은퇴를 준비하며 아버지가 10년 전 옛 할아버지 댁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이었다.
다만, 시골집에 가기 위해서는 대흥시에서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도훈은 지금 도로를 타고 북상하고 있었다.
- 도연이가 내일까지 대전에 있을 거란다. 연휴 내내 일해야 해서 집에는 못 온다는데, 네가 가서 만나보고 멀쩡한지 어쩐지 좀 살피고 와라.
- 나 만나러 온다고? 아빠가 그러라고 했구나? 안 그래도 차 막히는 연휸데, 괜찮겠어, 오빠? 나 오늘 늦게까지 취재할 것 같고 내일 아침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오전 10시부터 인터뷰 약속이 있고 늦어도 세 시 전에는 서울로 출발할 거라고 했거든.
어제 아버지의 지엄한 명령을 받아 동생과 통화한 결과, 도훈은 10시 전에 동생을 만나고 차를 돌려 시골로 내려갈 계획이었다.
평소라면 여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추석 전날이다 보니 도로 사정을 장담할 수 없어 서둘렀다.
다행히, 국도는 생각보다 차가 많지 않고 대전과 대흥이 가까운 덕에, 도훈은 약속 시각인 8시가 채 되지 않아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명절 연휴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시 외곽의 상가 거리는 한산했다.
“이젠 아침에 쌀쌀하네. 안 그러냐, 순심아?”
끼잉.
약속장소가 저만치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워놓은 도훈이 중얼거리자, 뒷좌석에서 모포에 몸을 폭 파묻힌 순심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눈도 안 뜨고 낑낑댔다.
“왜 하필 여기야?”
약속 장소로 정한 가게의 간판을 바라보며 도훈이 투덜거렸다.
사실, 장소에는 별 불만이 없었고 그 장소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불만이 없었다.
불만은커녕 도훈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던 걸 생각하면, 진즉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하는 게 옳은 일.
다만, 그때 이후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고 상대가 자신이 시장인 걸 알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린 도훈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쑥스럽단 말이지.”
능청스럽게 도훈이 대흥시 시장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대화하던 어느 여장부의 모습을 되새기며 도훈이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차 뒤쪽에서 다가와 운전석의 창문을 두들겼다.
탁탁.
“오빠!”
지잉.
창문을 내린 도훈은 말없이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인턴 기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건 그간 이따금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짐작했다.
- 미치겠다니까. 한 번에 하나만 할 시간도 정신도 없어. 매사 멀티태스킹이 기본이야. 머리가 둘이 되거나 팔이 대여섯 개쯤 됐으면 좋겠어. 그게 아니면 분신술을 배운다거나···.
걱정했던 것에 비해 도연이의 상태는 양호했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듯한 얼굴은 여전했지만, 더 마르거나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푸념은 강하게 해도 점점 기자 일에 적응은 하는 모양이었다.
“어디서 오길래 머리도 안 말리고 왔어? 날씨가 이렇게 쌀쌀한데 감기 들라.”
동생의 머리에 물기가 남은 걸 보고 도훈이 타박했고, 도연이 생긋 웃고 답했다.
“이 근처 선배네 집에서 잤거든.”
“... 선배네 집?”
오빠의 말끝이 심상찮게 올라가자 도연이가 얼른 정정했다.
“선배가 아니고 선배 할머니 집. 난 따로 숙소를 잡는다고 했더니 선배네 할머니가 집에 빈방 많은데 왜 그러냐고 하시더라고.”
“... 흐음.”
도훈의 눈치가 여전히 심상치 않자, 도연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어휴, 도대체 왜 그러는데?”
“그냥. 난 그 원흉이 마음에 안 들 뿐이다.”
“원흉? 승범 선배랑 있었던 게 아니라니까? 난 손님방에서 곱게 잤단 말이야. 그리고 그 선배 유부남에 애가 둘이나 있고 나랑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닌 데 설사 선배네 집에서 잤더라도 그게 뭐가 문제야?”
“... 글쎄다. 이건 이성적 판단이 아닌 감정의 문제라.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실 걸?”
“못 말려, 진짜.”
“어, 못 말려.”
도훈의 심드렁한 말에 한숨을 내쉰 도연이 뒷좌석에서 꼬리 치는 순심이를 안아 들고 말했다.
“얼른 와. 선배네 할머니가 오빠 보고 싶다고 꼭 가게에 와서 아침 먹으라고 하셨단 말이야.”
“... 순심이 데리고 가도 되겠냐? 음식점인데.”
“가서 일단 물어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얼른 와.”
“알았다.”
도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도연이를 따라갔다.
남매의 저만치 앞에 ‘공家네 감자탕’이라는 간판이 선명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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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탕 먹으러 오라니까 왜 이제야 왔어?”
“...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회장님에게 도훈은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서빙하던 최승범이 반가운 표정을 했지만,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개를 데리고 왔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개? 괜찮아. 그런 손님, 종종 있어.”
회장님은 도연이 안고 있는 순심이를 보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홀 말고 저 안쪽 방으로 가게. 거기라면 괜찮을 거야.”
“고맙습니다, 회장님.”
“고맙기는. 감자탕 먹을 거지? 내 맛있게 끓여줌세.”
“네.”
도훈과 도연은 홀 안쪽의 작은 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승범 선배 서빙하는 건 전통에 따르는 거래. 손자, 손녀들이 여럿인데 할머니께 인사하러 올 때마다 단 1시간이라도 가게에서 일해야 한대. 회장님 방침이라던가? 취재로 출장 왔다가 들렀는데도 봐주시는 법이 없다네.”
“안 물어봤다.”
최승범에 대한 흥미가 전혀 없는 도훈은 심드렁하게 답했고, 도연이 그런 오빠를 살짝 째려보고는 화제를 돌렸다.
“나 조만간 정식으로 부서 배치받을 텐데, 아무래도 사회부가 될 것 같아. 지망도 그렇게 했고.”
“사회부라···. 좋은 거냐, 나쁜 거냐?”
“무난한 거지.”
“정치부가 아닌 건 다행이다.”
“신참이 정치부 가는 일 거의 없어. 그리고 승범 선배가 충고하길, 오빠가 현직일 때 정치부에 있는 건 좋을 게 없을 것 같대.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 착하네. 내 동생.”
“뭐, 나도 엄연히 내 능력으로 인정받아야지. 시장 여동생이라는 걸로 화제가 되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도연의 다부진 말에 도훈이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아직도 회사 사람들은 네가 내 동생이라는 걸 몰라? 저번에 네 선배라는 양반이 네 회사 정치부에서 나한테 관심 있어 한다고 하던데. 그럼 배경 조사도 했을 것 같다만.”
“모르지. 알았으면 당연히 날 통해서 뭔가 해보려고 했겠지. 그래서 내가 더 조심하고 있고. 여하튼 정치부에서 오빠한테 관심 있는 건 맞아.”
도연의 말에 도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방 소도시 시장 나부랭이한테 신경 쓰지 말고 중앙 정계 사람들이나 잘 챙기라고 해라. 난 정말 정신없이 바쁘고 더는 사람들 관심 얻고 싶지 않으니까.”
“훗, 관심이라는 게 얻고 싶다고 생기고 얻기 싫다고 안 생기는 건 줄 알아? 지난번 사고도 누가 사고 나라고 빌어서 터진 게 아니잖아.”
“누가 아니라니?”
드르륵.
도훈이 푸념하듯 답하는데, 방문이 열리더니 최승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식 나왔습니다.”
최승범이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감자탕 뚝배기와 김치, 깍두기 등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음식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최승범이 방문을 닫기 전 도훈에게 말했다.
“시장님, 이따 가시기 전에 10분만 시간을 내주세요.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지금 하세요.”
“큰일 날 소리 하십니다. 식사하는 손님 옆에 앉아서 수다 떠는 종업원 보신 적 있어요? 저 여기서는 기자가 아니라 종업원입니다, 종업원.”
“......”
“인터뷰도 취재도 아닙니다. 좀 전에 듣자니 김 기자와 우리 정치부 얘기를 하시던데, 그와 관련된 얘기에요. 시장님이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
“10분이면 됩니다. 5분도 좋아요. 아니, 3분이라도 좋습니다!”
“......”
최승범이 눈을 너무도 간절히 반짝여서 도훈은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3분으로 하죠.”
“네, 고맙습니다. 이제 방해 안 할 테니까 맛있게 드세요.”
드르륵.
최승범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도연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왠지 끝까지 거절은 못 하겠지?”
“......”
“저게 승범 선배 주특기야. 자긴 저 기술로 먹고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 쩝.”
안 그래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도훈은 왠지 부러워하는 듯한 동생에게 쏘아붙였다.
“시끄럽고, 밥이나 먹자.”
“응.”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 도훈이었다.
“주특기고 뭐고, 넌 절대 배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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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쯤 뒤, 감자탕 집 인근의 한 커피숍.
태블릿 PC로 뭔가를 열심히 확인하는 도연 앞에 앉은 도훈은 최승범과의 짧은 대화를 되새기고 있었다.
- 우리 회사뿐만 아니고 웬만한 방송국, 언론사 정치부에서는 다 시장님을 알게 모르게 주목하고 있을 겁니다. 그게 여야 각 당에서 시장님께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데요. 제가 정치부 선배한테 듣자 하니 선거 직후에 이슈가 됐을 때는 대부분 ‘저렇게 한 번 떴다가 잊히겠거니’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시장님이 꾸준히 이슈가, 그것도 좋은 쪽으로 이슈가 되잖아요. 그래서 각 당에서 시장님 영입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대요. 물론, 아직도 시장님이 국민적으로 유명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는 거죠. 뭐, 저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여당 내에서부터 진지하게 이야기가 오간다고 들었습니다. 조만간 어떻게든 접근해오는 이들이 있을 것 같다던데요?
‘... 접근이라···.’
아직 오지도 않았지만, 중앙 정계의 정치인들에게 러브콜을 받는다고 기뻐할 도훈이 아니었다.
정당에 속해 그 정당의 견해를 무조건 우선시하지 않겠다는 건 도훈의 공약.
정당의 지원을 받는다면 좀 더 일이 쉬워질 수는 있겠지만, 지금도 크게 힘들거나 어렵다거나 하지 않으니 어디가 됐든 당에 소속될 생각이 전혀 없는 도훈이었다.
물론, 이는 현재 시의회 의장과 생각의 차이가 크지 않고 관계가 좋기 때문이기도 했고.
“오빠.”
“......”
“오빠.”
“어.”
동생이 연거푸 부른 뒤에야 도훈은 그녀에게 집중했다.
“승범 선배가 각 정당에서 오빠 주목한다는 얘기해줬지?”
“응. 그렇단다.”
“나도 들은 게 좀 있는데, 여당 내에서 개혁성이 강한 그룹이 오빠한테 관심이 많대.”
“개혁성이 강한 그룹?”
“응. 초, 재선 의원 중에 오빠한테 관심 있는 사람이 제법 된대. 근데 반대하는 이도 있어서 선뜻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 같던데?”
진지하게 말하는 동생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은 도훈이 말을 이었다.
“누가 나한테 관심 있고, 누가 날 반대한다던?”
“관심 있는 사람은 여럿이라 잘 모르겠고, 반대하는 인물 중 대표적인 건 어떤 재선 의원이라는데, 난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왜?”
“그 사람 여당 안에서도 개혁적 성향이 뚜렷하거든. 시민단체 활동도 꽤 오래 했고.”
도연이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한 도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고,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오정민 의원 얘기하는 거구나?”
“응. 그 사람 여당 내 개혁세력의 아이콘 같은 사람이잖아.”
“... 휴우.”
가만히 한숨을 내쉬는 도훈의 모습에 도연은 의아한 표정이 됐다.
“도연아.”
“응? 왜?”
“...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가 아는 오정민 의원은 어떤 사람이야?”
“음, 나도 직접 만난 적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정치부 선배들 얘기에 따르면 자기 관리 잘하고 예의 바르고 소신 뚜렷한 정치인이지. 학벌도 좋고 능력도 있고···. 거기다 그 사람 본가가 준재벌이잖아. 그런데도 강성 재벌 개혁론자잖아. 이 정도면 좋은 정치인 소리 들을만한 거 아니야?”
“네가 말한 모든 게 진실이라면 그렇겠지.”
“뭐?”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거다, 동생아.”
“......”
도훈의 담담한 말에 도연이 미간을 좁혔다.
잠시 도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도연이 말을 이었다.
“오빠, 오정민 의원 개인적으로 알아? 그 사람과 뭐 얽힌 거 있어?”
집요하게 눈을 빛내는 동생의 모습에 도훈은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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