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59화 (60/279)

59. 모르는 게 약 - 2.

추석 연휴가 시작된 토요일 오후.

“고생했어, 형. 들어가 쉬어.”

“쉬어야지. 그래야 저녁에 서울 가지.”

오늘도 도훈은 영배와 함께 아침 일찍부터 대흥시의 시장이나 마트를 돌며 시민들을 만났고, 복지시설들을 방문해 실태를 점검했다.

비서실에서 잡은 연휴 전 일정은 오늘까지.

시청에 당직을 서는 직원이 있고, 혹시 모르니 비서실도 연락망을 유지해야 하지만 두진, 정임, 영진이 모두 추석 연휴에 대흥시에 있을 예정인지라 그 셋이 1차 대응을 맡기로 했다.

“서울 갔다 오려면 힘들겠다.”

“서울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것보다는 낫겠지.”

영배나 영배 부인 선아는 모두 서울 출신이었고 영배의 부모님과 장인 장모도 모두 서울에 살고 있었다.

“넌 내일과 모레가 확실히 쉬는 날이지?”

“응, 그래서 내일 아침에 아버지 댁에 갔다가 모레 저녁에 돌아올 생각이야. 갔다 와서는 오래간만에 집에서 유유자적하게 게으름 좀 피우려고.”

“게으름? 어우, 상상만 해도 부럽다. 솔로가 괜히 좋은 게 아니야.”

도훈의 고향은 대흥시에서 국도로 가면 한 시간이 채 못 걸리는 전북의 소도시였다.

도훈이 태어나고 자란 건 시내였지만, 은퇴한 아버지가 옛 할아버지 댁을 새로 짓고 살고 계셔서 시 외곽의 농촌 마을로 가야 했다.

“이번이 선거 운동 시작하고 처음 가는 거지?”

“응. 처음엔 시간이 없었고 나중엔 아버지가 굳이 올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

“하여간 네 아버님도 대단하셔. 그나저나 이번 추석 때 마을 잔치라도 하는 거 아니냐?”

“글쎄···. 아마 이미 다 해치우셨을걸? 나한테 얘기는 안 하셨지만 말이야.”

“어찌 됐든, 금의환향이네. 아버지 좋아하시겠다.”

“하하, 글쎄···. 들어가.”

“그래. 연휴 끝나고 보자.”

도훈은 바로 차를 출발하지 않고 대문을 통과한 영배가 저만치서 현관문을 여는 걸 지켜봤다.

“아빠!”

“오냐, 내 새끼!”

4살 먹은 영배의 큰딸, 민지의 목소리가 들렸고 ‘내 새끼’ 어쩌고 하는 영배의 목소리는 아주 생생하게 들려왔다.

조금 전, 솔로 어쩌고 할 때보다 훨씬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영배의 모습에 도훈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차를 출발시킨 도훈은 순심이를 찾으러 진주네 집을 향했다.

“나 왔다.”

“... 어서 와.”

진주는 소파에 늘어져 있는 모습으로 도훈을 맞이했다.

“왜 그러고 있어?”

“시댁 가려고 짐 쌌다. 짐 싸는 게 일이다, 일. 내 거, 준수 거, 남편 거.”

“박 소령은 올 수 있대?”

“추석 당일 아침에 나왔다가 다음 날 점심때까지 들어가야 한대. 그거라도 어디냐.”

“... 고생이다.”

진주의 시댁은 인천이고, 친정은 수원이었다.

남편이 직업군인인지라 명절 때도 쉬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혼자 아들을 데리고 양가를 오가느라 몸살을 앓았다.

“시댁도 친정도 제사를 안 지내니 이 정도지, 제사까지 지냈으면 난 명절이 정말 끔찍했을 거야. 어휴, 내일 새벽부터 운전할 거 생각하면···.”

“뭐,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앉아. 집 튼튼하게 지어서 안 무너진다. 순심이는 준수랑 방에서 자고 있어.”

“그래.”

도훈이 소파에 앉자 진주가 몸을 일으켜 커피를 타 가지고 왔다.

“있다가 저녁까지 먹고 가.”

“나 먹을 것도 있냐?”

“그래. 냉장고를 비워놔야지. 사흘은 집을 비울 텐데.”

“아하, 그런 의미였어? 뭐, 흔쾌히 협조하마.”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하는데, 진주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너희 집은 명절 때도 북적거리지는 않지?”

“그렇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외아들이시니까. 뭐, 먼 친척들이 있긴 한데 그냥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고···.”

“에고. 우리 시댁이나 친정은 누울 자리가 없을 정돈데···.”

“그건 그것대로 좋은 거지. 우리 집은 아버지, 나, 도연이 셋뿐이야. 아, 개들도 있긴 하구나.”

담담히 답하는 도훈에게 진주가 물었다.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말씀 안 하셔?”

“하셨었지. 그런데 나 시장 되고 나서는 별말씀 없으셔.”

“쩝, 아버지 생각해서라도 좀 적극적으로 나서 봐라. 지난번 소개팅도 그렇고, 네가 적극적이지 않은데 일이 되겠냐?”

“뭐, 그때는 사고 때문에 정신이 없었잖아. 그리고 사고 없었더라도 임기 끝나기 전에는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아.”

진주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휴우, 만약에 너 시장 아니었으면 지난번 소개팅했을 거라는 거야?”

“아마도? 하지만, 시장 아닌 나를 뭐 볼 게 있다고 만나려고 하겠냐?”

“그거야 모르지. 콩깍지가 씌워서 널 예쁘게 볼 사람이 없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하하, 글쎄다.”

도훈이 웃자 진주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 하나만 물어볼게.”

“... 그래.”

“예은이는 확실히 잊은 거야?”

갑자기 돌직구가 날아왔지만, 도훈은 담담하게 답했다.

“잊은 건 아니고 무감해졌다는 거지. 멀쩡하게 기억나는 사람을 어떻게 잊었다고 하냐?”

“그럼 무감해진 건 확실해?”

“지금 이렇게 무감하게 걔 얘기를 하고 있잖아. 어떻게, 증명이라도 해야 돼?”

“쩝. 뭐,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예은’이라는 사람은 진주의 친구이자 도훈의 두 번째 연인이었다.

도훈은 대학교 1학년 봄에 처음으로 진주와 함께 있는 신예은의 얼굴을 봤고, 그 이후로도 이따금 진주와 함께 어울리다 가을 즈음에 사귀기 시작했다.

신예은은 한국 최고 대학 사회학과 학생답게 똑똑했고,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며, 매력 넘치는 외모까지 가진 여자였다.

그녀와 도훈은 2년 가까이 열렬한 연애를 했고, 도훈은 그녀의 권유로 휴학하고 시민단체 인턴 활동을 했었다.

신예은이 이미 활동하고 있던 단체였고, 단순히 그녀가 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에는 도훈도 행정이나 관련 사회단체 활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걔, 아직도 미국에 있나?”

“아마 그럴걸. 무감해졌다면서, 궁금해?”

“뭐, 그렇게 소원하던 대학교수로 가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신예은의 꿈은 교수가 되는 것이었고, 그걸 이루기 위해 언제나 열심이었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고, 전공과 관련된 학회 활동도 열심히 했으며, 경험을 쌓기 위해 시민단체 인턴 활동까지 했으니까.

1주에 한 번 정도 도훈과 데이트하는 날에도 도훈이 그런 그녀의 공부나 일을 돕는 것으로 데이트를 대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

아마도 신예은이 조금만 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당시 일하던 시민단체 간부였던 어떤 이와 엮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다니던 대학에서 박사 학위까지 마쳤을 수도 있었다.

“내가 아는 건 걔가 미국 가서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까지야. 그다음에는 걔도 나한테 연락 안 했고 나도 걔한테 연락 안 했어.”

“알아. 너 나 때문에 예은이랑 대판 싸우고 절교했잖아.”

“흠. 뭐, 꼭 너 때문은 아니었지.”

심드렁한 진주의 말에 도훈이 소리 없이 웃었다.

도훈은 2학년을 마치고 무급 인턴으로 시민단체에서 일했고, 도훈과 신예은 외에 그런 인턴이 두셋 더 있었다.

단체 중간간부로 신예은의 학교 선배이자 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자원봉사자들을 관리했다.

그 중간간부는 도훈보다 열세 살 많은 스마트하고 잘 생긴 데다가 가정 형편도 좋은 그런 ‘엄친아’였다.

“그 계집애가 그놈의 단체 활동만 안 했더라도 지금 달라졌을 수 있는데···.”

“모르지. 걔가 욕심이 좀 많았잖아. 다른 사건이 없었으리라는 법은 없지.”

어찌 보면 흔하고도 흔한 이야기였다.

짧게 줄이자면, 동갑내기와 풋풋하고도 열렬한 사랑을 하던 꿈많은 여대생이 자신이 선망하는 생활을 현실로 사는 능력 있는 남자와 바람이 난 그런 3류 스토리.

단체 중간간부와 점점 친해지던 신예은이 도훈에게 이런저런 ‘변명’을 하기 시작한 건 도훈이 그 단체에서 일한 지 다섯 달이 넘었을 무렵이었다.

데이트도 미루고 단체 사무실에서도 도훈을 보길 꺼리며, 인턴 업무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그녀를 도훈은 걱정했다.

그런 도훈의 관심조차 미안해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신예은의 모습에 도훈은 그녀를 추궁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신예은이 임신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닌 ‘엄친아’라는 것도.

“에휴, 애초에 내가 걔한테 널 보여주는 게 아니었는데···. 나도 걔가 욕심 많은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지.”

“다 지나간 얘기를 뭘 그리 심각하게 하고 있냐?”

“쩝, 네 아버님께 왠지 심각하게 죄송해서 그런다.”

진주의 말에 도훈은 쓰게 웃었다.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한 뒤, 도훈은 문제 해결을 위해 그 엄친아, 신예은과 삼자대면을 했다.

신예은은 도훈에게 사죄는 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말해 도훈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입혔다.

연인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도훈은 곧바로 시민단체 인턴 생활을 정리하고 군에 지원했다.

입대 전, 신예은이 엄친아와 결혼하거나 하는 게 아닌 조용히 아이를 지우고 그 사실을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액수는 정확히 몰라도 큰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화로 엄친아에게서 들었다.

- 너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몰라. 변명하자면, 나도 이렇게 되길 원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술자리에 예은이와 끝까지 남았다가 여기에 이르렀지. 그리고 이건··· 나보다 예은이가 원한 거다.

도훈이 입대한 얼마 뒤, 신예은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지금껏 서로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

‘내가 조상님 관상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더는 경시하지 못한 게 그때부터였지.’

신예은과 사귀기 시작할 때도, 문제의 엄친아와 처음 마주했을 때도, 조상님은 관상이 어쩌니 하면서 그들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얘기했었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도훈은 관상이나 조상님의 사람 보는 눈보다 자신의 눈과 판단을 더 믿었었다.

그러나 그 일 이후로 조상님의 이야기를 더는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아무리 딱히 할 일이 없었다지만, 군 생활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조상님에게 관상학이나 사람 제대로 보는 법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고 또 청했으니까.

“우리 아버지는 내가 위할 테니까 넌 네 시아버님이랑 친정 아버님께나 잘해라. 어머님들께도.”

도훈이 심드렁하게 충고하는데, 진주가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영배 오빠가 이상한 얘기 했는데?”

“이상한 얘기? 무슨 얘기?”

“부시장 조카랑 너랑 묘하게 그림이 된다는 얘기.”

“뭐?”

진주의 말에 도훈은 어이가 없어도 무척 없다는 표정이 됐다.

“우리 학교 후배라며?”

“그렇다더라.”

“행시 합격한 인재라던데?”

“맞아.”

“예쁘다던데?”

“... 그런 편이지.”

“호오?”

“......”

도훈이 말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절친을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부시장님 조카가 궁금하면 부시장님을 심문해, 나 말고.”

“야, 하나만 더. 이게 마지막이야.”

“뭔데?”

“그 사람한테 아무런 감흥 없어?”

“... 휴우.”

한숨을 깊이 내쉰 도훈이 반격을 시작했다.

“야, 내가 시청 출근하면 얼마나 긴장하는 줄 알아?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 편한 때가 있을 것 같냐? 언제 어디서 누가 무슨 얘기 할지 몰라서 긴장 잔뜩 하고 있는데, 여자한테 감흥이 생기겠냐!”

도훈이 목소리를 높이자 진주가 집주인의 위용을 잃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아, 왜 큰소리야! 묻는 것도 잘못이냐!”

“묻는 게 개떡 같잖아!”

“개떡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총각한테 여자 얘기 묻는 게 왜 개떡이야!”

쩌렁!

왈! 왈왈!

온 집안을 울린 목청 전쟁의 승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진주.

먼저 귀를 막은 도훈이 인상을 쓰고 있는데, 진주가 한 번 더 고함쳤다.

“이걸 그냥 확! 가서 네 새끼나 달래! 네 새끼 때문에 내 새끼 깰라!”

“간다, 가!”

목소리를 높인 도훈이 준수의 방으로 사라졌고, 진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준수의 방 쪽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는, 얼마 전 중학교 동창의 SNS에서 본 사진 하나를 떠올렸다.

영어로 된 결혼식 초대장의 사진.

초대장 맨 위에 다정하게 어깨를 붙이고 선 어느 커플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그 커플 중 신부 쪽이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휴우.”

다시 한숨을 쉰 진주는 꼬리를 말고 아들 방으로 사라진 친구와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초대장 사진 속 옛 친구를 동시에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 모르는 게 약이지, 이건.”

#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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