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58화 (59/279)

58. 모르는 게 약 - 1.

양상택의 시의원직 사퇴가 대흥시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럴만한 일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음 주로 추석이 다가와 사람들의 마음이 살짝 들뜬 이유가 컸다.

대신, 양상택을 설득해 사퇴서를 내게 한 안준식에 대한 좋은 평가가 시청과 시의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능구렁이 같은 양 의원을 설득하다니 난 시의회 의장 다시 봤어.”

“그러게요. 경력으로 따져도 3선과 초선인데 말입니다. 의장 될 때도 정말 깜짝 놀랐었는데, 괜히 의장이 된 게 아니네요.”

“어쨌든 식물 시의원 하나 사라져서 다행이지 뭐. 세금 낭비는 막았네.”

양상택의 사퇴에 시선이 쏠렸기 때문에, 그가 사퇴서를 내기 전에 몇몇 안건의 표결에 참여했던 건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조례 개정에 반대했던 시의원이 셋이나 있지만, 그들이 ‘논리’나 ‘당위’에서 앞서는 게 아니라서 통과 이후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주민참여예산 심의위원회 위원 확대는 그렇게 의회라는 큰 장애물을 넘은 다음에는 별다른 잡음이 없는 상황에서 추진될 수 있었다.

여하튼 그런 상황 속에서 추석 연휴 전주 목요일 오후, 도훈은 한 모임의 초청을 받아 짧은 강의에 나서고 있었다.

“정말 저희가 제안한 것도 정식 시 사업이 될 수 있다고요?”

“물론이지. 예산 제안을 하는 데는 전혀 제한이 없어. 나이도, 성별도, 학력도 말이야. 올해는 이미 마감이 됐다만, 생각이 있으면 내년에 아무 걱정하지 말고 제안을 해. 물론, 실제로 채택될지와 어떤 우선순위를 받는가는 다른 문제지만.”

“에? 안될 수도 있어요?”

한 아이의 질문에 답한 건 오늘 모임에 초청받은 다른 강연자.

“그렇단다. 너희에게는 아주 절실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판단했을 때 세금을 들여 진행할 만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그런 부분도 미리 고려해야겠지?”

“우우! 중학생한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거 아니에요?”

아이의 항의에 안준식이 씨익 웃고 답했다.

“글쎄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만, 너희는 아직 아는 것보다 배워야 할 게 더 많아. 그건 부정할 수 없지 않겠니?”

“... 그렇다고 치죠.”

“이런 것도 그 배워야 하는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자.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교 밖에서 배우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 대신, 이런 종류의 지식이나 지혜는 오늘 너희가 봤다는 모의고사 같은 시험 때가 아니더라도 써먹을 일이 많을 거다.”

“평생 써먹게 되겠죠. 그러니 지금 제대로 배워야 하고요.”

안준식에 이어 도훈이 말했고,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피식 웃었다.

“방금 뭔가 되게 느끼했는데.”

“그러게.”

마주 앉은 아이들의 반응에 두 사람은 표정을 수습하고 말을 이었다.

“자, 다음 질문.”

시청 앞 패스트푸트 가게에 열 명가량의 중학생들과 마주한 도훈과 안준식.

오늘의 강연은 학생 인권 어쩌고를 고민하는 모임에서 주최했다.

급조된 게 분명한 모임을 만들어 강연을 주최한 주범은 일전에 공원에서 만났던 안준식의 딸과 친구였고, 나머지는 친구의 부탁에 자리를 채운 게 거의 확실한 아이들이었다.

그래도 햄버거 하나씩과 음료수를 앞에 두고 이어진 오늘의 강연은 제법 알차게 이루어져, 다행히 지루해하는 녀석들은 없는 듯했다.

“하나, 둘, 셋. 김치.”

“김치!”

1시간이 채 안 걸린 강연의 마지막 순서로 모두 모여 기념사진도 찍은 뒤 도훈과 안준식은 아이들과 헤어졌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오늘 초대에 응해주셔서요.”

“감사는 아버지께 해라. 네 아버지가 강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안 왔을 거야.”

“헤헤. 아빠한테는 따로 인사할게요. 다음에 또 봬요.”

“그래. 어서 가보렴.”

꾸벅 인사하고 친구들과 멀어져 가는 안준식의 딸을 도훈이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곁에 선 안준식이 투덜거렸다.

“자식이···. 시장님 반강제로 모시고 온 것도 나고 햄버거값 낸 것도 난데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 하고 가네.”

“따로 인사를 한다잖습니까.”

“글쎄요. 집에서 건성으로 한마디 하고 말겠죠. 어쨌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야 뭘요. 마침 일정도 없었는데, 알찬 시간 보냈고 햄버거 잘 먹었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전 다른 데 가볼 곳이 있습니다.”

묘한 표정의 안준식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도훈이 그를 흘끔 하고 중얼거렸다.

“왜 저렇게 표정이 떫담? 딸이 인사 안 하고 간 게 내 탓도 아닌데.”

“그게 다 딸 가진 아빠 마음이라는 거다. 넌 딸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영배가 곁에서 속삭였고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고 대꾸했다.

“뭔 소리 하는 거야?”

“그런 게 있어. 에휴, 나도 우리 민지 중학생 되면 저런 걱정 해야 하려나?”

“점점 더 이해 못 할 소리만 하고 있네. 들어가자.”

“어.”

천천히 시청을 향해 걸으며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갔다.

“추석 선물은 다 도착했겠지, 형?”

“아마도. 내일이 금요일이니까 내일까지는 다 도착할 거야. 택배를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전부 시 안에서 배달하는 거니까 문제없을 거라고 했어. 미리 다짐도 다 받았고.”

추석 선물을 보내느냐 마느냐 잠시 고민했던 도훈은 지역 상인들의 물건을 구매해 엄선된 이들에게만 보내기로 했다.

전에는 지역 유력자나 단체, 시청 직원들, 보육원과 양로원의 복지시설이 대상이었지만, 이번엔 유력자와 단체, 시청 직원들이 빠지고 생활보호대상자나 혼자 사는 노인 등이 추가됐다.

당연히 선물도 쌀이나 식재료, 생필품 등 꼭 필요한 물건들로 골랐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따가 확인 한 번만 해봐.”

“알았다. 그나저나 나는 선물 안 주냐?”

“내가 주면 형도 나 줄 거야?”

“당연하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는 법인데.”

“마음은 확인했으니 그냥 귀찮게 실물 주고받지 말고 퉁 칩시다.”

“큭큭, 나쁘지 않네.”

실없는 대화를 하며 도훈과 영배가 사무실로 돌아오니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시장님.”

“아, 안녕하세요.”

소파에 앉아 정임, 두진과 대화하던 여자가 인사했고 그녀를 알아본 도훈도 답례했다.

“여긴 어쩐 일로···. 혹시 부시장님 뵈러···.”

“삼촌 보러 왔으면 시장실이 아니라 부시장실에 갔겠죠. 오늘은 도지사님 심부름을 왔습니다.”

“심부름이요?”

“아, 여기 문화체육과에 공무가 있기도 해서요. 겸사겸사 왔습니다.”

투피스 정장 차림에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젊은 여자는 다름 아닌 부시장 조카 민세경이었다.

‘공무? 아, 맞다. 행시 패스했고 도청 직원이라고 했었지.’

도훈은 예전에 영배에게서 들었던 민세경의 정보를 떠올렸다.

도훈을 향해 매력적인 미소를 보내고 있는 그녀였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만남 이후 도훈이 그녀를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이따금 전경완이 ‘조카가 극성이라 골치가 아프다.’ 투덜거리던 때를 제외하고는.

도훈은 그때도 뭐에 극성이냐고 묻지 않았고 전경완도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하기야, 도훈에 대한 정보 좀 알려달라고 조카가 보챈다는 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잠시 따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시장님? 도지사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시죠.”

도훈과 민세경이 시장실로 들어갔다.

“... 저 둘, 묘하게 그림이 된단 말이야.”

자기 책상에 앉은 영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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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시장 군수 회의’를 여기서요?”

“네.”

“흐음.”

세경이 전한 도지사의 말은 다음 ‘시장 군수 회의’를 대흥시청에서 열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7월 말에 시장, 군수들의 상견례를 겸한 첫 회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강정문 도지사는 분기에 한 번 정도씩 회의를 하며 충남도와 기초단체 간의 협력을 강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도청에서만 모이는 게 아닌 각 기초단체에서 돌아가면서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도 했는데 다음 회의 장소로 대흥시를 꼽은 모양이었다.

“전화로 하셔도 될 걸 왜 굳이···.”

“혹시 시장님이 거절할 수도 있으니 설득하는 역할도 같이 맡기셨습니다. 여기 정식 제안 공문입니다.”

“하하···.”

세경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고 살짝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도훈이 이를 받아 확인했다.

‘... 그 양반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도훈이 강정문의 접근을 꺼리는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건 강정문의 개인적인 관심이나 친분 쪽이지 업무와 관련한 분야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즉, 이런 회의까지 거절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여기 보니까 오후 느지막하게 회의하고, 그 이후에 뒤풀이 겸 저녁 식사까지 하는 것으로 되어 있네요. 맞습니까?”

“네. 첫 회의를 간략하게 하고 말았잖아요. 도지사님께서 이번에는 꼭 식사를 함께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비용은 도에서 책임지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시에서는 회의 준비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뒤풀이 장소를 몇 곳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고요.”

“알겠습니다. 일단 저는 긍정적입니다. 간부들 의견도 확인해서 내일 정식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호호! 감사합니다. 저는 혹시나 하고 긴장했는데···.”

세경이 밝게 웃었고 도훈이 담담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밥까지 사신다는 손님이신데 거절할 이유가 없죠.”

“어머?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시장님 알뜰하신 면이 있나 봐요.”

“우리 시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렇습니다.”

웃으며 답한 도훈이 화제를 돌렸다.

“예정 날짜가 10월 중순인데, 우리 시에서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됩니까?”

“시에서는 단체장님들의 회의 장소와 설비, 음료 정도만 신경 써주시면 될 겁니다. 자세한 얘기는 시에서 담당자를 정해 주시면 도청 실무팀이 연락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청은 혹시 비서실에서 담당합니까?”

“아뇨. 비서실이 워낙 바빠서요. 비서실 인원이 포함된 실무팀을 작게 꾸렸습니다.”

“아, 예.”

도훈이 누구에게 맡길까 생각하고 있는데 세경이 상큼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이따금 뵙게 될 것 같습니다.”

“네?”

“전화나 메일도 있지만, 회의 준비를 잘하려면 아무래도 만나서 얘기하는 게 제일이니까요.”

“... 무슨 말씀인지 잘···.”

“제가 실무팀 팀장이거든요.”

“아, 예.”

도훈이 세경의 말뜻을 뒤늦게 알아챘다.

도훈의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하던 세경은 도훈에게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자 적잖이 실망했지만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아, 예.”

도훈이 대화를 마치려 했고, 세경이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훈이 세경을 배웅하려는 듯 시장실 문 쪽으로 다가가는데 뭔가를 고민하던 세경이 입을 열었다.

“아, 참 시장님.”

“네.”

“... 그게···.”

세경이 말을 못하고 망설이자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데 그러세요?”

꾹.

서류가방 손잡이를 잡은 손에 핏기가 가실 만큼 있는 힘껏 힘을 준 세경이 입을 열던 순간.

“저기 소···.”

똑똑.

“잠시만요.”

세경에게 말한 도훈이 시장실 문을 열었고, 문밖의 영배에게 물었다.

“뭡니까?”

“아, 부시장님이 오셨습니다. 조카··· 분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 오셨답니다.”

영배의 말이 중간에 느려진 건 ‘부시장’이란 말에 도훈 뒤에 선 세경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펴지는 걸 봤기 때문.

“그래요? 안 그래도 얘기 끝났습니다. 아, 말씀하시려던 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뵙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도훈에게 상큼하게 웃으며 답한 세경이 묵례하고 시장실을 나서 비서실 입구에 선 전경완을 향해 걸었다.

“어, 세경아, 왔··· 냐.”

전경완이 멈칫한 것은 조카가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가시죠, 부시장님.”

“... 어, 그래.”

부드럽지만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조카의 말에 다시 흠칫한 전경완이 조용히 세경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뭔 일 있었냐?”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 그냥.”

영배의 소리 죽인 질문에 답하는 도훈은 세경이 ‘소개팅은 잘하셨나요?’라고 물으려 했다는 건 짐작도 못 했다.

- 쯧쯧. 여하튼, 그쪽으로는 눈치가 전혀···.

‘무슨 말씀이세요?’

- 쯧쯧, 모르는 게 약이다. 에잉!

‘......’

어리둥절한 후손을 향해 조상님이 혀를 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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