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57화 (58/279)

57. 때때로 진심은 진심을 낳는다 - 2.

얼마 뒤, 정보를 모아온다던 영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이게 무슨 조환지는 모르겠는데, 양상택 의원이 시의회에 나왔다는데? 그 양반이 찬성표 던졌나 봐.

‘설마 실장님이?’

메시지를 확인한 도훈이 시장실 문을 열고 말없이 문가에 섰다.

“하하, 이게 무슨 일···.”

“그러게요. 양 의원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웃으며 기뻐하던 직원들이 무표정한 도훈의 모습에 조용해졌고, 도훈의 시선을 받은 두진이 손사래를 쳤다.

“저 아닙니다.”

“... 진짜죠?”

“네, 진짜로 아닙니다.”

“......”

정색하고 말하는 두진이 진심임을 확인한 도훈이 말없이 돌아서 문을 닫았다.

‘그럼 도대체 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도훈의 시선이 조상님을 향했다.

아무래도 두진만큼 유력한 용의자였으니까.

“......”

- 나 계속 여기에 있었다. 아무것도 안 했어.

“......”

말없이 송곳 같은 눈빛으로 추궁하는 후손과 눈싸움하길 얼마.

조상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백하기 시작했다.

- 오늘 해 뜬 다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난 밤에 움직였단 말이다!

“......”

- 내가 성질이 나서 그놈을 참교육시키긴 했다만, 이런 결과를 노린 건 전혀 아니었다고.

“... 누굴 어쩌셨다고요?”

- 한 놈 있잖냐. 시의원씩이나 되는 주제에 쓸모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이.

“... 지금 양상택 의원 말씀하시는 거예요?”

- 어.

“......”

무엄하게도 조상님을 향한 도훈의 눈빛은 더욱 매서워졌고, 조상님은 머쓱한 표정으로 자백을 이어갔다.

- 내가 어제 그 양가 놈을 좀 만져주긴 했다. 하지만 오늘 시의회 나와서 투표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 정확하게 뭘 어떻게 하셨는데요?”

- 밤새 아주 생생한 악몽에 시달리게 해줬지. 그간 정치하면서 그놈이 행한 삿되고 못된 짓거리의 결과가 다 그놈에게 되돌아와서 쓰레기도 욕할 인간말종이 되는 그런 악몽 말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악몽이었는데요?”

- 그놈이 광장에 끌려 나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공개재판을 받는 거야. 재판장이 죄목 하나하나를 확인하면서 살릴까 죽일까 물어보면 모든 사람이 ‘죽여!’ 하고 소리치는 그런 꿈이었다.

“... 맙소사.”

도훈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아무리 지은 죄가 있다지만, 정도가 심해도 한참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 아마 자다 깨고 자다 깨고를 계속 반복했을 거야. 몸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무척 힘든 밤이었겠지.

“... 자다가 심장마비에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 어쨌든, 그렇게 밤새 악몽에 시달리게 했고 마지막으로 악몽 꿀 때 한가지 슬쩍 느끼게 해준 게 있긴 하지.

“... 설마?”

- 아니라니까! 난 그놈이 시의원 자리 계속 붙들고 있다가는 꿈처럼 되기가 십상이라고 느끼게 했을 뿐이야.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

- 어제 네 녀석이 하도 잠을 못 자고 끙끙대길래 신경질이 나서 그랬던 건데···. 나도 그놈이 무슨 생각으로 의회에 나와서 투표를 했는지 전혀 모르겠단 말이다. 투표의 ‘투’ 자도 그놈 꿈에 안 나왔다고!

“......”

조상님은 웬만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구경만 하겠다는 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이미 뭔가 했다는 걸 말 안 했을 뿐, 대화 이후로 계속 도훈의 곁에 있었으니까.

“도대체 뭐가 어떻게···.”

인상을 쓴 도훈이 중얼거리는데 영배로부터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

띠링.

- 양 의원이 조례 개정안 표결 마치고 의원직 사퇴서 냈대! 지금 그거 논의한다고 의회 정회됐어!

도훈이 다시 조상님께 시선을 주고 입을 열었다.

“조상님 뜻대로 됐습니다.”

- 뭐가?

“양 의원이 의원직 사퇴서 냈답니다.”

- 그래? 뭐야, 그럼? 사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특한 일 한 번 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거야?

“... 그럴 리가 없죠. 듣기로는 그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고 칩거를 했다던데···. 오늘 조례 개정안이 상정된다는 걸 알기나 했을까요?”

- ......

도훈과 조상님이 비슷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얼마 뒤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네, 의장님.”

- ... 점심시간인데 같이 식사나 하시죠.

“좋습니다. 어디서 뵐까요?”

마침 궁금한 게 많았기에 도훈은 안준식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두진과 함께 시의회 현관에 서 있는데, 시의원들과 관계자들이 몰려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점심 맛있게 드세요.”

지나치던 사람들과 인사하던 도훈은 장민호, 서태기 의원과도 마주쳤다.

“커험!”

“에이!”

도훈을 잠시 노려보던 두 의원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인사도 없이 지나갔다.

두 사람에 이어 등장한 건 차혜진 의원.

그녀 역시 도훈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더니 다가와 도훈에게 말을 걸었다.

“시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말빨 만큼 수완도 좋으시네요.”

“제가요?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양 의원님 움직인 게 시장님 아니세요?”

“상상력이 참 풍부하시네요.”

정색한 도훈을 빤히 바라보던 차혜진이 비웃음을 입에 물고는 말을 이었다.

“시치미도 잘 떼시는군요. 뭐, 당연하겠죠.”

“양 의원님 일은 저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도훈이 부인했지만, 차혜진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호호. 여하튼, 이번에 시장님의 또 다른 면모를 본 것 같아서 좀 놀라기도 했고, 안심하기도 했어요.”

“... 안심이라뇨?”

“‘시장님도 별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

“양 의원과 뭘 주고받았는지 궁금하네요. 호호!”

“......”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잃은 도훈을 남겨두고 차혜진이 걸음을 옮겼고, 잠시 후 도훈이 옆에 선 두진에게 투덜거렸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말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제가 왜 저 양반에게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죠? 도대체 어떤 분, 아니 어떤 놈 덕인 걸까요?”

“커험!”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 돌아서니 안준식이 영배와 함께 서 있었다.

도훈은 오묘한 표정의 안준식에게 주목했다.

“...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머쓱함, 미안함, 창피함 등 갖은 감정을 드러낸 얼굴로 겸연쩍어하는 안준식.

- 이놈 설마···?

“설마···?”

조상님과 도훈이 안준식의 표정에서 읽어낸 것을 입에 올렸고, 안준식이 얼른 화제를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커, 커험! 바, 밥 먹으러 가시죠. 제 차로 갑시다! 이쪽이에요!”

안준식의 뒤통수에 의구심 가득한 표정인 사람 하나와 귀신 하나가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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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유서면의 한 음식점.

방에 들어앉은 뒤 말없이 쳐다보는 도훈의 눈빛을 더는 견디지 못한 안준식이 자백을 시작했다.

“제가 오늘 아침 일찍 양 의원님께 전화했습니다.”

“......”

“그간 몇 번 전화를 걸었는데 계속 씹으시다가 오늘 아침에는 받으시더군요.”

“... 그래서요?”

“잠시 대화를 했죠. 오늘 시의회 있는데 나오실 거냐고. 언제까지 계속 그렇게 피하기만 하실 거냐고.”

“......”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계속 피할 수만도 없을 텐데, 어떻게든 정리하는 게 맞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더불어···.”

안준식이 말끝을 흐리자 도훈이 매섭게 눈을 빛내며 추궁했다.

“더불어··· 뭡니까?”

“오늘 중요한 안건 처리가 있는데··· 마지막으로 협조 좀 부탁드린다고 했죠.”

“후우.”

“... 정말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다고요.”

안준식의 말에 도훈과 두진이 한숨을 내쉬었고, 영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 그 양가 놈이 밤새 악몽을 꿔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의장이 한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응한 모양이다.

‘... 그런가 봅니다.’

양상택과 잠깐 마주쳤었다는 영배의 말에 의하면, 양상택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 얼굴은 까맣게 죽었으며 영혼이 탈탈 털리기라도 한 것인지 눈의 초점마저 흐릿했더란다.

도훈은 복잡한 심경으로 안준식에게 말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야 합니까, 아니면 왜 그러셨냐고 추궁을 해야 합니까.”

“둘 다면 어떻습니까?”

째릿.

도훈의 시선을 받고 찔끔한 안준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추궁은 아니고 타박 정도가 맞지 않을까요, 시장님? 어차피 제가 양 의원 설득했다는 건 곧 다 알려질 텐데요.”

“......”

“사퇴서 때문에 정회하고 양 의원님 의사 확인할 때 제 옆에 의회 사무과 과장님이랑 직원들도 있었거든요. 그분들도 ‘그냥 의장님 뜻대로 하려는 겁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안준식의 말에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신 겁니까?”

“제 나름대로 고민도 했습니다만, 사실 우리 딸아이한테 혼난 게 좀 컸습니다. 하하.”

“따님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진이 묻자 안준식이 씩 웃고 답하기 시작했다.

“우리 큰애가 지금 중학교 2학년입니다. 한 열흘쯤 전에 시장님과 마주쳤다던데요.”

“제가요? 따님을요?”

“네. 운계 초등학교 뒷산 공원에서요.”

깜빡, 깜빡.

“딸아이 말로는 저녁에 개 데리고 산책하는 것 같았다던데···.”

“아.”

열흘쯤 전 평일에 모처럼 정시퇴근한 도훈은 공원에 순심이를 데리고 산책갔다가 공부하기 싫어서 학원을 땡땡이쳤다는 여중생 다섯 명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순심이 예쁘다고 모여든 애들과 잠깐 대화를 하긴 했었다.

“... 한 10분 정도 애들과 얘기한 것 같긴 합니다.”

“우리 딸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애들한테 그러셨다면서요? 너무 강압적으로 공부만 시키는 게 싫으면 학생들끼리 의견을 모으라고.”

“... 그랬죠.”

“학생들이 의견을 모아서 공부만 강요하지 말고 다양한 걸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면 선생님, 부모님들도 무조건 무시하지 못할 거라고 하셨다던데, 맞습니까?”

“... 네. 불만을 속에 품고만 있지 말고, 그 불만스런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과 차분히 대화할 길을 찾아보라 말해준 것 같습니다. 뭐, 시민 참여와 관련한 홍보도 좀 했고요.”

도훈이 인정하자 영배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아니, 시장님. 만약에 진짜로 학생들이 그렇게 하면 어쩌려고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학교나 학부모 원성 들으면 어쩌시려고요?”

“들어야죠.”

“네?”

“그런 원성은 들어도 상관없어요. 저는 공부하지 마라거나 안 해도 된다고 얘기를 한 게 아니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의견을 모으면 누구라도 그걸 진지하게 생각해 준다고 얘기를 한 것이니까요.”

“... 그, 그래도···.”

“전 아이들도 대화 상대로 인정받아 대화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해준 겁니다.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요. 우리가 요즘 왜 시민 모임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청하는 건데요?”

“......”

도훈은 시 행정에 시민 참여를 제도화하는 일을 본격화하기 위해 다양한 시민들의 모임에 주목했다.

동호회가 됐든 친목회가 됐든, 시청의 전 직원을 통해 시민들의 다양한 모임을 리스트로 만들고 가능성이 보이는 모임을 다시 정리했다.

우선 선별된 모임이 30여 개.

2주 전부터 그 모임에 참석을 제안해 허락을 받으면 주민참여 예산과 심의위원회를 홍보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도 듣고 했다.

호의적인 얘기만 듣는 것도 아니었고 아예 참석을 거부당할 때도 있어서, 2주 동안 참석한 모임은 여섯 개.

시민과 소통하는 다른 방법도 고민, 추진 중이지만 우선으로 이 무식한 방법을 택한 이유는 효과가 좋아서였다.

시장이 자신의 의견을 시민에게 전하는 것도 시민의 의견을 듣는 것도,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보다 좋은 게 없으니까.

영배가 대답을 못 하자, 안준식이 끼어들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조 비서관. 우리 딸아이나 친구들도 시장님 얘기를 공부 안 해도 되는 방법이 아닌 대화 상대로 인정받는 법이라고 이해했으니까요.”

“... 그,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빙긋이 웃고 난 안준식이 도훈에게 말했다.

“어제저녁에 아내와 조례통과가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데 딸아이가 듣고 있다가 시장님은 중딩도 허투루 대하지 않고 열심인데, 의회 의장씩이나 되는 아빠는 뭐하는 거냐고 타박하더라고요.”

“......”

“조례 개정이 옳다고 믿으면, 의장이랍시고 뒷짐 지고 있을 게 아니라 시장님처럼 일이 되게 하려고 뭐든 해야 하지 않냐고 타박하는데··· 답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그러셨군요.”

“네. 그 녀석이 요즘 부쩍 제가 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 좀 수상했는데, 어제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 애가 됐든, 어른이 됐든 자기 뜻을 표현할 권리가 있어. 더 잘 표현하기 위해 그 뜻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이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리고 그런 의사 표현은 타인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한,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그건 민주주의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했었지.’

여중생 다섯 중 셋은 ‘뭣 헛소리냐’하는 표정이었고, 둘 정도가 그나마 흥미를 보였었다.

도훈이 애들과 대화하던 장면을 되새기는 데 안준식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여하튼, 전 양 의원에게 연락하고 도와달라고 말한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분명 비난받고 반성할 부분이 있지만, 그건 전적으로 제 몫입니다.”

“... 네.”

“시장님을 위한 게 아니라 조례 개정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한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해서 조례 통과시켰다고 딸아이한테 자랑할 겁니다. 물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안 그럴 겁니다만.”

“... 알겠습니다.”

도훈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자 안준식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주문하시죠. 든든히 먹고 오후에 또 열심히 일해야 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안준식을 향해 조상님과 도훈이 중얼거렸다.

- ... 이놈 생각보다 괜찮네.

‘... 그러게요.’

그렇게 조상님과 후손이 동시에 한 사람을 재평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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