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때때로 진심은 진심을 낳는다 - 1.
어둑한 밤길을 헤치며 어딘가로 향하는 도훈의 차 안.
“차 의원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 여야가 됐든 의회와 시 행정부가 됐든 정치나 그와 관계가 밀접한 행정이 서로 주고받는 속성이 있다는 건 현실적으로 부인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어찌나 당당하게 거래하자고 얘기하는지 제가 말문을 잃었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정치인 되기 싫은 겁니다. 저는 거래를 잘 못 하거든요.”
“하하. 사람 참.”
도훈의 말에 쓰게 웃고 난 두진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차 의원이 뭘 요구했길래 거절한 건가?”
“자신이 제안하는 사업 하나를 시 사업으로 받아달라고 하더군요.”
“어떤 사업?”
“그걸 말 안 해서 거래를 못 한 겁니다. 사업을 살펴서 웬만큼 필요성이 인정되면 시 사업으로 수용하지 못할 리가 없잖습니까? 하지만, 뭘 들이밀려고 하느냐고 몇 번 물었는데 끝내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도훈의 말에 두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추측했다.
“아마 필요성이 없거나 현저히 떨어질 사업이겠군.”
“그게 아니면 예산이 왕창 들어가거나요.”
“허허. 차 의원이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나 보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푸념하듯 대꾸한 도훈이 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일요일에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실장님.”
“뭔 소린가. 오늘 내가 당번이잖아. 마침, 중요한 일이 터지기도 했고.”
이젠 비서실 업무도 제법 자리를 잡아서, 도훈이 주말에 일해야 하는 경우 아주 중요하거나 급한 일이 아니라면 두진, 영배, 정임 셋 중 한 명만 도훈과 함께하고 있었다.
승합차를 이용해야 할 때는 영진이 언제가 됐든 출근하지만, 주말엔 도훈이 거의 자기 차를 몰고 다니니 그런 일은 잘 생기지 않았다.
도훈이 두진에게 미안한 표정인 건, 대개 주말에 일해도 몇 시간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해가 진 지금까지 정신없이 뛰어다녔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자네 공약과 관련 있는 거잖아. 아마, 차 의원도 그래서 배짱을 부렸을걸? 그런 일이니 당번이 아니었어도 내가 나서는 게 맞아. 더는 그 소리 말게.”
“네.”
곧 도훈이 두진의 집 앞에 차를 세었다.
“저녁 전인데, 함께 먹고 가지 않겠나?”
“설마 둘째 따님이 와 있나요?”
“예끼, 이 사람아! 우리 마누라는 몰라도 난 그런 욕심 없다니까.”
한 달여 전, 비서실장 사모님의 저녁 초대에 사심이 섞였다는 걸 알게 된 도훈.
그때는 사고 때문에 흐지부지됐고 이후로 초대받은 적이 없지만, 지금도 두진의 부인을 만나는 걸 도훈은 은근히 꺼리고 있었다.
“...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채 도훈이 말하는데, 두진이 뭔가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기··· 지금이라도 연락해보는 건 어떤가?”
“또 그 말씀이십니까?”
“보기에 안 좋고, 도의상 옳지 않다는 데는 나도 공감하네만, 사안이 중요하질 않나. 솔직히 나도 안 내켜.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건 자네 공약과 직결된 일이야.”
“......”
도훈은 두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진이 연락해보라 말한 상대가 다름 아닌 양상택이었다.
사방공사 건으로 불구속 기소된 후 칩거하고 있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현직 시의원이었다.
자신에 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후에 강력히 부인하고 다녔다는데, 구속된 건축사가 신흥건설과 계획을 짜고 양상택에게 돈을 주고 부추겼다고 자백한 게 알려진 다음에는 그러지도 못했다.
양상택이 다행히 구속 기소를 피했다고는 하지만, 돈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사퇴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심지어 민의당 지역위원회 내에서도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얘기는 도훈도 들어 알고 있었다.
“진심이십니까?”
“... 방법이 없질 않은가.”
두진은 지금 그런 양상택에게 시의회에 참석해 찬성표를 던져달라는 요청을 하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평소 두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하면 저런 말까지 하겠는가 싶은 도훈이었다.
씁쓸한 표정의 두진에게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도훈이 말을 이었다.
“실장님.”
“왜?”
“저희 아버님이 이따금 하시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
“매사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고요. 세상일이 제 뜻대로만 되면 그게 천국이지 어떻게 현실 세상이겠냐고요.”
“......”
도훈의 말에 두진은 대꾸를 못 했다.
“지금 비서실장이 아니시라면, 제게 양 의원에게 연락해보자는 말씀을 하셨을 겁니까?”
“... 절대 아니지.”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 이야기 더 할 필요 없죠?”
“... 휴우, 그래.”
두진이 한숨을 내쉬며 답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세.”
부웅.
멀어지는 도훈의 차를 바라보고 선 두진.
“... 그래. 당연히 모든 일이 뜻대로 될 수는 없지.”
캄캄한 하늘 아래, 복잡한 표정의 두진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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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대흥시청 3층 시장 비서실.
“좋은 아침입니다.”
“... 안녕하세요.”
언제나처럼 웃으며 인사하는 도훈과 뒤이어 들어서는 부루퉁한 표정의 영배.
“......”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왈! 왈왈!
말없이 도훈에게 묵례하고 순심이를 받아 안는 두진은 물론, 정임과 영진도 전혀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의 표정이 왜 그 모양인지 잘 아는 도훈은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다들 얼굴 펴세요. 세상 망한 거 아니잖습니까?”
“......”
“오늘 조례 개정 실패한다고 시정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닙니다. 우리 계획에 차질은 빚어지겠지만, 내년에 심의위원 새로 선출할 겁니다. 단지 늦어지는 것뿐이에요.”
“... 그렇죠.”
애써 웃는 표정으로 답하는 정임.
다른 사람들도 표정을 풀려고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노력과 비교하면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담담히 웃으며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을 교환한 도훈이 말을 이었다.
“자, 10분 후에 아침 조회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도훈이 두진에게서 다시 순심이를 받아 안고 시장실로 들어갔다.
쿵.
시장실의 문이 닫히자 그제야 두진이 입을 열었다.
“어렵겠지만, 우리 더는 시장님 앞에서 인상 쓰지 말자고. 지금 누구보다 속이 쓰린 건 시장님이실 테니까 말이야.”
“실장님부터 얼굴 좀 펴세요.”
“노력 중이야. 10분 정도 걸릴 걸세.”
정임의 뾰족한 말에 쓰게 웃고 답한 두진.
“솔직히 시장님이 취임한 이후, 시정이 별다른 문제 없이 풀려나간 게 이상할 정도였어. 안 그런가, 고 주무관?”
“틀린 말씀은 아니죠.”
“홍 주무관 생각은 어때?”
“네. 맞는 말씀입니다.”
행정이라는 건 뭐든지 뚝딱 해치울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현실적 여건이 안 돼서, 이해 당사자의 반대에 부닥쳐서, 예산이 부족해서, 혹은 의회와의 대립으로···.
그게 아니더라도 온갖 원인으로 인해 시가 추진하던 정책이나 사업이 차질을 빚는 건 흔하고도 흔한 일.
도훈이 취임하고 이제 석 달이 되어가는 시점.
그간 어떤 사업이나 시정 과제에 지장은 있었어도 도훈의 의도와 다르게 중단되거나 폐기된 사업은 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정공법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혹은 남들은 생각해내지 못한 기발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막힘없이 달려온 도훈이었다.
그리고 오늘 의회라는 장벽을 만나 처음으로 멈추게 됐고 말이다.
주민참여예산 심의위원회 위원 증원은 사소해 보일 수 있는 문제이지만, 도훈의 공약과 직결된 중요한 사항.
그래서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도훈 본인과 비서실 직원들이 2주 전부터 발로 뛰고 있기도 했다.
그 중요한 일의 추진이 시작도 못 해보고 늦춰지게 됐다.
‘... 이런 일은 또 생길 거다. 하지만, 나중에 되돌아보면 오늘도 그냥 지나간 수많은 날 중 하나가 되겠지.’
속으로 중얼거린 두진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기운 냅시다.”
“네!”
두진의 말에 모두가 답했고, 두진이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다들 웃는 연습 좀 하자고. 오늘은 어딜 가든 웃어. 특히 시장님 앞에서는 말이야.”
“하하, 네.”
“자, 그럼 조회 준비···.”
벌컥.
너무나도 박력 있게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
그의 등장에 비서실 직원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줬다.
“방금 얘기 듣고 왔습니다. 의회에서 조례 개정안 통과 안 될 것 같다는데 진짭니까?”
아주 심각하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묻는 전경완에게 두진이 가까이 다가갔다.
“나가서 얘기하시죠, 부시장님.”
“... 아, 예.”
전경완과 함께 복도로 나가는 두진의 얼굴에 어느새 담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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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망했냐?
“실망했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 그래도 표정관리가 안 될 정도는 아닌가 보다?
“저한테 표정관리의 중요성을 가르치신 분이 워낙 훌륭하셔서요.”
- 그렇긴 하지.
소파에 앉아 순심이를 쓰다듬는 담담한 표정의 도훈과 그런 후손을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는 조상님.
“... 뭐··· 1년 늦춰진다고, 좀 천천히 간다고 생각해야죠.”
- 흠.
도훈이 조상님께 시선을 줬다.
- 왜?
“아니, 그게···. 뭐랄까, 조상님 반응이 예상 밖이라서요.”
- 뭐가?
“이럴 때면, 잔소리가···.”
- ... 잔소리?
조상님의 심드렁한 눈빛이 일순 날카롭게 변했고, 움찔한 도훈이 얼른 말을 바꿨다.
“... 가 아니고 뭐라도 훈계를 잔뜩 늘어놓으셔야 하는데···.”
- 크흠. 이미 스스로 잘 정리하고 있는데 굳이 내 훈계를 보탤 필요가 없잖아.
“그런 겁니까?”
- 그런 거다. 네가 괜히 네 아비 말을 밤새 머릿속에 새긴 게 아닐 테지.
조상님의 말에 도훈이 쓰게 웃었다.
지난밤 복잡한 마음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도훈은 깨어있는 동안 수없이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으니까.
“매사가 뜻대로 되는 건 아닌 게 맞죠.”
- ......
지난 주말은 도훈의 취임 이후 가장 정신없는 주말이었다.
일이 되게 하려고 이 사람 만나 확인하고 저 사람 만나자고 연락하고, 다른 사람 만나달라고 찾아가고···.
그렇게 분주한 시간을 보냈건만 성과는 무(無).
어제, 아무런 소득도 없이 집에 돌아가 매사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게 아닌 현실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그 노력 끝에 직원들 앞에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웃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마음속은 ‘평화’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 네 아비 말도 맞는 말이다만, 세상엔 이런 말도 있다.
“... 무슨 말요?”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멈칫.
순심이를 쓰다듬던 손이 굳어지고 도훈의 고개가 천천히 조상님을 향해 돌아갔다.
끼잉?
눈을 감고 도훈의 손길을 음미하던 순심이가 낑낑거렸지만, 도훈은 조상님께 시선을 고정한 채로 굳어진 상태.
의구심 가득한 후손의 눈빛에 조상님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 ... 왜?
“무슨 꿍···, 아니 뭘 하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 아무것도 안 해.
“진짜요?”
- 그래.
조상님이 장민호, 서태기, 차혜진 중 한 명에게 잠시 빙의하면 반전의 반전을 이룰 수 있겠지만, 도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 방법을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반대나 견제에 수없이 부닥칠 텐데 그때마다 조상님께 나서달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반대로 돌아선 세 의원도 엄연히 시민의 대표인데 ‘빙의’를 해달라는 게 옳은 것인지 확신도 들지 않았고.
“...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실 거죠?”
- 그래, 인마.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아니, 구경만 할 거야.
“약속하십니까?”
- 옥황상제께 맹세하마. 구경만 한다고.
“... 알겠습니다.”
거듭 조상님께 다짐을 둔 도훈이 다시 순심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2시간쯤 뒤.
똑똑.
벌컥!
조회를 마친 도훈이 책상에 앉아 서류와 씨름하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를 하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시장님!”
“뭡니까?”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이 고개도 들지 않고 심드렁하게 묻는데, 전혀 예상 밖의 답이 돌아왔다.
“조례 통과됐답니다!”
“예?”
“개정안 통과됐다고요. 가결이랍니다!”
“... 진짜요?”
“네! 그러니까···.”
깜빡, 깜빡.
영배가 뭐라 더 이야기했지만, 도훈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 상황.
“... 그렇답니다! 하하! 더 자세한 건 제가 지금 나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 그러세요.”
쿵.
웃느라 입이 쭉 찢어진 영배가 문을 닫고 나갔고, 도훈의 고개가 한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아무것도 안···.”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만 한다더니 도대체 뭘 한 거냐?’라고 추궁하려던 도훈의 말이 멈춘 건 조상님의 표정 때문.
눈이 휘둥그레 커진 조상님이 입까지 쩍 벌리고 굳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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