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날 잡은’ 일요일.
일요일 낮, 대흥시청.
“... 나 화장실에 갔다 올게. 배가 좀 이상해.”
“탈 난 거야?”
“아무래도 그런···. 윽, 그, 급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얼른 시장실을 빠져나가는 영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훈이 혀를 찼다.
“쯧쯧. 덥다고 그렇게 찬 국물을 들이켤 때 내가 알아봤다.”
오늘도 도훈과 영배는 폭염 순찰을 했다.
도로에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차에서 내려 살필 때도 있었는데, 오늘 오전에는 몇 번 그렇게 차에서 내려 걸어 다녀야 했다.
영배는 그 때문에 더위를 먹기라도 한 것인지 점심을 먹을 때 냉면 육수를 연신 추가 주문해 마시고 또 마셨었다.
- 탈이 날만도 하지. 에어컨 바람맞고 있다가 푹푹 찌는 불볕더위 밑에서 걷다가 하기를 반복했으니···. 무더위가 사람 잡는 말이 실감이 난다.
“옛날엔 여름 더위가 이 정도는 아니었죠?”
- 당연하지.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얼음도 없는 시절에 이렇게 더웠으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
언제나처럼 허공에 양반다리 자세로 둥둥 떠 있는 조상님의 말에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상님이 시장실 한쪽 구석에 켜진 TV 화면에 시선을 주고 말을 이었다.
- 맨날 보는 뉴스 지겹지도 않냐? 다른 것 좀 틀어봐라.
“... 어떤 거로요?”
- 저거 말고 아무거나.
도훈이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천천히 돌렸고, 조상님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 스톱.
“... 하하.”
도훈이 실없이 웃은 건 조상님이 요구로 멈춘 화면에 나오는 게 젊은 청춘 남녀들이 등장해 ‘썸’을 마구 주고받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기 때문.
“회춘이라도 하셨습니까? 갑자기 왜 저런 걸 보자고 하세요?”
- 회춘? 인마, 네가 보기에 내게 회춘이 필요할 것 같냐?
“... 아니죠.”
조상님의 얼굴은 도훈보다 어리거나 최소한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물론,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 처음 만났을 때의 조상님 귀신은, 분명 풍성한 수염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한 미(美) 노년이었으니까.
도훈이 그런 조상님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더니, 그 호칭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젊은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 후부터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사라지고 조상님이라는 호칭이 자리 잡았다.
아무리 본인이 원하고 괜찮다고 말해도, 몇백 년 전의 사람을 ‘형’이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후손아.
“... 네.”
- 너 저런 거 보면 뭔가 느끼는 거 없냐?
“글쎄요. ‘좋을 때다.’ 뭐, 이런 느낌?”
- 인마, 네가 몇 살이나 처먹었다고 벌써 그런 소리를 해?
“하하, 저도 벌써 30대 중반입니다.”
너스레를 떠는 도훈에게 조상님이 쏘아붙였다.
- 벌써? 이걸 그냥! 그리고 30대 중반이 뭐? 요즘은 20대보다 30대가 더 사회적 관계가 왕성한 거 아니야?
“그런 면이 없지 않죠. 경제활동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나이가 빨라야 20대 후반이니, 조금이라도 여유를 갖게 되는 게 30대가 됐죠. 뭐,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 그러니까 말이다. 너도 좀 더 왕성한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는 생각 안 드냐고?
뜬금없는 조상님의 말에 도훈이 묘한 표정으로 조상님을 바라봤다.
“설마, 그 왕성한 사회적 관계라는 게 사내들과 툭탁거리는 게 아닌 여인네들과 ‘알콩달콩’ 하는 그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래, 인마. 너도 연애 좀 하다가 혼인도 하고, 응? 가정은 꾸려야 할 것 아니야?
“...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하세요?”
- 아, 조상이 후손에게 못할 이야기도 아니잖아. 대는 이어야지!
대답이 궁색했던 조상님이 엉뚱한 얘기를 했고, 도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저 정 씨 아니고 김 씨입니다. 그리고···.”
- 그리고 뭐?
“조상님 대는 아주 잘 이어지고 있던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상님 직계 후손이라는 훈훈하게 생긴 친구가 TV에 자주 나왔다던데···.”
- 커, 커험!
딴청을 피우는 조상님을 도훈이 눈을 게슴츠레하고 뜨고 말없이 바라봤다.
조상님은 한참 만에야 그런 후손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참았던 말을 꺼냈다.
- 거, 이쯤 됐으면··· 잊을 만도 하지 않냐?
피식.
도훈은 가만히 웃고는 말을 이었다.
“결국, 진짜로 하고 싶은 말씀은 그거였습니까?”
- 그래, 인마.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조상님께 도훈이 쓰게 웃고 말을 이었다.
“이미 다 잊었습니다.”
- 정말?
“네, 잊은 지 오래입니다. 말씀하셔도 별 감흥이 없어요.”
- 그, 그래?
“그렇다니까요.”
- 그럼 왜 연애를 안 하는데?
“... 하하, 연애가 제가 하고 싶다고 아무 때 아무하고나 막 되는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 ... 그렇··· 지.
“주변에 저와 정분이 날 만한 상황의 여성이 있었던 적이 별로 없습니다. 안 그런가요?”
- ... 최근엔 그랬지.
“최근이 아니고 대흥으로 이사 온 뒤부터니까 몇 년 됐죠.”
- 흠.
“그리고 관성이 있어서 그런지, 별로 그쪽으로 적극적이 안 되더라고요.”
- 허. 참.
도훈도 연애 경험이 있었다.
첫사랑은 풋풋했고, 최근 두세 번은 그렇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두 번인지 세 번인지 도훈도 확신하지 못하는 게 바로 그 증거.
인생 두 번째 연애, 그러니까 군에 가기 전의 연애가 아주 뜨겁고 애틋했으며 드라마틱한 일대 ‘사건’이었다.
조상님조차 그 일을 잘 입에 올리지 않을 정도로.
조상님이 잊을 만도 하지 않냐고 물은 사람이 바로 당시의 연인이었다.
- 쩝. 잊었다니 다행이다만···.
조상님이 중얼거리는데 도훈의 핸드폰이 울렸고 도훈이 액정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진주야.”
- 통화 괜찮아?
“응. 우리 순심이 잘 있냐?”
- ... 네 새끼는 내 새끼랑 실컷 물고 빨고 뒹굴며 놀다가 지금은 시원한 데서 같이 자고 있다. 노는 것도 둘이서, 자는 것도 둘이서··· 아주 남매가 따로 없어.
“남매라고 할 것까지야···.”
도훈이 직접 챙길 수 없을 때 순심이를 진주의 집에 맡길 수 있는 건, 진주도 그녀의 아들 준수도 동물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동물을 좋아하는 가족의 집에 반려동물이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진주의 남편에게 털 알레르기가 있어서였다.
“무슨 일이야?”
- 우리 남편이 오래간만에 기특한 일을 꾸미고 있어서 전화했지.
“박 소령이? 뭔데?”
이어진 진주의 말은 아주 뜬금없었다.
- 너 소개팅 안 할래?
“... 소개팅?”
- 응. 우리 남편이 계룡대에서 근무할 때 알게 된 사람인데 나도 한 번 만난 적 있어. 성격 좋고 예쁜 사람이야. 그때는 애인 있었던 것 같은데, 솔로 된 지 꽤 됐다네. 올해 서른 살이야.
“군인이라는 말이네?”
- 어. 해군 중, 아니 지금은 대위구나.
“... 그쪽은 하겠대? 내가 누군 줄 알고?”
- 네가 시장인 건 알지. 기타 기본정보도 남편이 얘기했는데 만나본다고 했다는데?
“......”
- 아, 할 거야, 말 거야?
“글쎄다. 별로 안 땡기는데···.”
도훈의 심드렁한 말에 대한 진주의 반응은 ‘역시나’였다.
- 야! 네가 무슨 수도승이냐? 홀로 고행하면서 몸에 사리라도 만들어?
진주가 버럭 고함치는 바람에 도훈은 귀에서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뜨려야만 했다.
“...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 그게 아니면 소개팅해. 결혼하라는 것도 아니고 겨우 소개팅인데 그게 안 땡겨? 이제 그 망할 계집애 털고 넘어가자, 쫌!
“... 날이라도 잡았어? 오늘따라 왜 다들 그 소리야?”
- 뭐? 다들? 누가 또 뭐라든?
“아무것도 아니야.”
얼버무린 도훈은 소개팅하라고 닦달하는 진주에게 생각해보겠다고 답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 내가 요즘 소개팅할 정신이 없는데···.”
푸념하듯 중얼거리는 도훈의 곁에서 조상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빨간 날, 주말이라고 꼭 쉬는 것도 아니고 평일에도 야근하는 날이 훨씬 많을 정도로 바쁜 건 사실이니까.
“그나저나 얘가 오래간만에 그 얘기 꺼냈네.”
진주가 언급한 ‘그 망할 계집애’는 도훈의 두 번째 연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와 진주는 중‧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처음 만난 것도 진주와 함께였다.
그래서, 진주는 영배도 모르는 도훈의 상처를 알고 있는 것이기도 했고.
“다 지나간 일 떠올리면 뭐하냐. 일이나 열심히···.”
중얼거리며 일어나던 도훈은 시계를 확인하고 멈칫했다.
영배가 화장실에 가고 20분이 넘게 시간이 흘러 있었다.
“정말 탈 났나 보네.”
도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장실 문을 열고 비서실로 나섰는데, 비서실 문이 열리고 영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층 창백해진 얼굴에 잔뜩 찌푸려진 미간.
아랫배에 손을 갖다 대고 엉거주춤하게 선 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생뚱맞게도 전경완 부시장이었다.
“시장님, 조 비서관 크게 탈 난 것 같습니다. 병원에 보내야 할 것 같은데요.”
부시장과 시선을 마주한 도훈이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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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도훈은 조수석에 누군가를 태우고 폭염 순찰을 하고 있었다.
탈이 난 영배는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으며 자는 중이니 옆자리의 사람은 당연히 영배가 아니었다.
“너무 더워서 해수욕장에도 사람이 없다더니 들에도 사람이 전혀 없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전경완 부시장의 말에 담담하게 맞장구를 치는 도훈.
탈이 난 영배를 정신없이 차에 싣고 병원에 데리고 가 수액을 맞는 걸 확인한 뒤에야 전 부시장이 함께 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의사가 단순한 배탈이니 한숨 자고 일어나면 훨씬 나아질 거라고 해서, 도훈은 영배를 놔두고 부시장을 시청에 데려다준 뒤 다시 순찰에 나서려 했다.
그런데 전경완이 도훈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따라나섰다.
“조 비서관이 더위에 약한 모양이지요?”
“그것보다는 피로가 쌓여서 그럴 겁니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도 있지만, 조 비서관이 애가 둘인데 두 살, 네 살이라 한참 신경 써야 할 나이거든요.”
“아이고···. 허허, 고생이겠네요.”
전경완이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시장님도 서두르셔야 할 텐데요.”
“저요? 아, 결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하하, 어쩌다 보니···. 뭐, 기회가 있겠죠.”
도훈이 웃으며 얼버무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가 진주라는 걸 확인한 도훈은 그냥 무시했고, 전경완이 물었다.
“전화 안 받으십니까?”
“제 친군데요. 잔소리들을 게 뻔하거든요.”
“잔소리요?”
“네. 때아닌 소개팅을 하라고 닦달하지 뭡니까.”
“... 아, 소개팅이요.”
들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어서 도훈은 전경완의 얼굴이 살짝 굳은 걸 보지 못했다.
전경완이 뭔가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는데 다시 도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도훈은 차를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네, 사모님.”
- 시장님. 잘 지내고 있어요?
“하하, 물론이죠. 사모님도 잘 지내시죠?”
- 물론이죠.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송두진의 부인.
전화번호는 진즉에 교환했어도 그녀가 도훈에게 전화를 걸어온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 아, 다른 게 아니고 저녁에 우리 집으로 식사하러 오라고요.
“식사요?”
- 네. 요즘 고생하고 있잖아요. 내가 삼계탕 끓여놨어요.
“하하. 그러셨어요?”
- 그러니까 저녁 먹으러 와요.
“상황 봐서요.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이 전경완에게 설명했다.
“저와 조 비서관이 당선자 시절부터 비서실장님께 이것저것 배우러 그 댁을 다녔거든요.”
“아, 예.”
“따님들이 독립해서 나간 뒤라서 사모님이 저희에게 잘해주셨습니다.”
“그렇군요.”
전경완이 고민하던 화제를 입에 올리려던 순간.
우우웅.
다시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한 도훈이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 우리 마누라랑 통화했지?
“네.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하시더군요.”
- 쩝. 본심은 그게 아닐 걸세.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훈이 묻자 잠시 뜸을 들이던 두진이 말을 이었다.
- 우리 둘째 딸이 집에 와 있거든. 전에 얘기했다시피 걔 나이가 서른하난데 결혼도 안 했고, 남자친구도 없어.
“... 하하, 설마···.”
-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거야. 우리 마누라가 자네 꽤 마음에 들어 하니까.
“......”
- 오고 안 오고는 자네 마음인데, 우리 마누라가 그런 꿍꿍이라는 걸 알고 있으라고 전화한 거야. 이 통화 절대 비밀일세. 마누라한테 들키면 난 쫓겨나.
“... 알겠습니다.”
- 끊겠네. 이 통화는 없었던 거야.
뚝.
“선배님이 뭐라고 하신 겁니까? 따님이 어쩌고 하시던데요.”
“......”
통화가 끝나자마자 왠지 신경질적인 눈빛이 되어 질문을 던지는 전경완.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한 도훈이 어색하게 웃는데 다시 핸드폰이 울렸고, 도훈은 ‘옳거니’하는 마음으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렇게 일요일의 한가로움을 산산이 깨뜨릴 사건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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