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그는 과연? - 1.
광복절 다음 날 아침, 대흥시청 대회의실.
“... 그렇게 시민을 중심에 놓은 시장님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시민과 소통하는 더 큰 내일의 대흥시를 꿈꾸며 업무에 매진합시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전경완의 짤막한 취임사에 직원들이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간략한 부시장 취임식이 끝났다.
도훈은 부시장과 악수하고 먼저 자리를 떴고 전경완은 간부들과 대화를 나눴다.
도훈이 나란히 걷는 두진에게 속삭였다.
“어째 간부들이 좀 긴장한 것 같던데요.”
“아마 긴장한 게 맞을 겁니다. 정기 인사 공고 난 지 며칠 안 됐잖습니까.”
“아, 그 영향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 정기 인사에 하급 직원들의 승진은 있었어도 간부 승진은 없었다.
각자의 과거 경력과 근무 평점, 소속 부하직원의 평가를 고려한 이동이 전부.
새 부시장도 부시장이지만, 간부들이 긴장한 것은 한 사람의 이동 때문이라 두진은 생각했다.
“... 과장 때문인가요?”
“아마도요.”
유일하게 주목받은 이동이 의회 사무과장이 유서면 면사무소로 이동한 것이었다.
과장은 공무원이 된 후에 야간대학을 다니며 지방자치 등 관련 석사 학위까지 따로 취득한 의회 전문가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의회 사무과 말고 다른 부서에서 전혀 근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간이 짧은 징검다리 식이었다.
그건 그만큼의 전문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인데, 그런 이가 의회에서 밀려났고 발령 당일 아침 두진이 그를 찾아가 면담을 했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즉, 그의 이동이 무언가에 대한 문책성 인사라는 걸 간부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간부는 그렇다 치고 직원들은 어떻습니까?”
“시장님은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 같던데··· 혹시 제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과장이 좀 유난스러웠습니다. 그러니 직원들도 올 게 왔거니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네요.”
의도가 있는 인사이동이었기 때문에 도훈은 유독 신경이 쓰였었다.
그런데 직원 대부분이 수긍하고 있다니 조금은 부담이 덜해졌달까.
“벌써 동료의식이 생기신 겁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요.”
한때, 아직 직원들에게 동료의식이 전혀 없다며 검찰 수사보다 더한 것도 감내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 게 바로 도훈이었다.
그게 불과 한 달여 전의 일.
아직 동료의식은 모르겠지만, 직원들의 어려움이나 형편 등은 조금 이해하게 된 도훈이었다.
‘... 그래도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게 분명히 있지.’
다만, 상식적인 원칙에 앞서 고려해야 할 어려움과 형편은 없다고 도훈은 여전히 믿었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원칙을 어기는 것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분명 있다는 것도.
도훈과 두진은 곧 사무실에 도착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네. 다음 일정 없죠?”
“네, 점심 전에 정해진 일정 없습니다. 아, 교육장님이 전화하셨었습니다. 바로 연결할까요?”
“아뇨. 숨 좀 쉬고요. 5분만 있다가 연결해주세요.”
도훈이 탕비실로 가서 원두커피를 잔에 따랐고, 그 곁에서 두진이 차를 탔다.
“오늘은 야근해야겠죠, 실장님?”
“해야죠. 주말부터 어제까지 계속 쉬었으니까요.”
“저녁 약속이 계속 있었잖습니까.”
“그것도 일은 맞습니다만, 살필 게 좀 쌓였습니다. 조 비서관 공부도 공부고요.”
“휴우. 이거 꼭 마감에 쫓기는 기자 같은 기분입니다.”
도훈이 투덜거렸고 두진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저는 30년 넘게 그렇게 살았습니다. 웃긴 게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쫓기게 된다는 겁니다.”
“쩝.”
“지겹거나 싫으시면 적당히 넘기셔도 됩니다.”
“휴우, 그럴 수야 없죠.”
도훈이 시장실로 돌아가며 정임에게 말했다.
“정임 씨, 교육장님께 전화 좀 걸어주세요.”
“... 네.”
도훈이 시장실로 들어간 뒤 전화기를 손에 든 정임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엔 5분 후라고 하시더니···. 하여간, 일 욕심은 못 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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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퇴근합니다. 수고들 하세요.”
영진과 정임이 인사하고 나갔고, 며칠 만에 야근하게 된 세 사람이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오래 걸릴 것 같죠, 실장님?”
“물론이지. 며칠 쉰 영향이야.”
“... 하하하.”
영혼 없는 웃음을 흘리는 영배.
나름대로 일도 열심이고 공부도 열심이지만, 야근을 좋아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도훈이 영배를 보고 피식 웃은 다음 말했다.
“오늘도 도시락 먹을까요?”
“만만한 게 그것밖에 더 있겠나?”
“뭐로 드시겠습니까? 오늘 제가 사올 차롑니다.”
“난 불고기로 하겠네.”
“난 돈가스.”
두진과 영배의 주문을 받은 도훈은 시청 앞 도시락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미리 주문하고 걸어서 찾으러 가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는데, 워낙 주문을 자주 했기에 가게 사장이 이제는 도훈의 목소리만 들어도 도훈인 걸 알아봤다.
- 바로 오세요, 시장님. 주문 밀린 게 없어서 곧바로 준비됩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이 도시락 가게로 향하는데 건널목 앞에서 전경완 부시장과 마주쳤다.
“시장님, 설마 걸어서 출퇴근하십니까?”
“아뇨. 야근인데 도시락 사러 나왔습니다.”
“도시락이요?”
“네. 저 코너 돌면 가게가 있습니다.”
“시장님이 직접 가세요?”
“근무 끝났으니까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도훈의 모습에 전경완은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이 됐다.
“부시장님은 퇴근이십니까?”
“아닙니다. 저도 공부할 게 있어서요. 저녁 먹으러 나왔습니다.”
“혼자서요? 비서는···?”
“비서가 무슨 죕니까. 공부는 저 혼자서 하는 건데요. 그리고 시장님 말씀대로 근무 끝났으니까요.”
“하하, 네···.”
대화가 끊기고 머쓱한 시간이 잠시 이어졌고, 도훈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드시겠습니까?”
“저희라면···?”
“저하고 비서실장, 조 비서관 이렇게 셋입니다.”
“좋습니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답한 전경완은 잠시 뒤 조금 어색한 순간을 겪어야 했다.
전경완의 불고기 도시락까지 추가된 비닐봉지를 도훈이 건네받은 직후.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아니에요. 여기 있습니다, 사장님.”
전경완이 카드를 내밀자 도훈이 얼른 사장에게 현금을 건네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 밥값은 더치페이라서요.”
“아, 그렇습니까?”
얼른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도훈에게 건넨 전경완이 물었다.
“설마 매번 시장님이 도시락 사러 다니시는 건 아니겠죠?”
“네. 번갈아서 합니다. 오늘은 제 차례고요.”
“그렇군요.”
시장실로 연결된 비서실에 들어선 직후, 전경완은 어색한 순간을 다시 한 번 겪어야 했다.
끼익.
“저녁 왔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왔구나.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빨리 좀 오지 그랬나? 나 혼자 이 투덜이 상대하느라···.”
두진의 말이 멎은 것은 미간을 찌푸리고 선 도훈에 뒤이어 비서실에 들어선 누군가 때문.
어색한 미소를 흘리는 전경완의 모습에 두진이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부시장님?”
“헉!”
두진의 말에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영배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범죄 현장’이라도 들킨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영배와 머쓱한 표정으로 굳어진 두진.
도훈이 한숨을 내쉬고 담담하게 전경완에게 설명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조 비서관은 개인적으로 제 친구고, 송 실장님은 선생님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사석에서는···.”
“말을 편하게 하신다는 거군요.”
“네.”
“하하, 이해합니다.”
전경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고 조용히 네 사람이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부시장님은 어쩐 일로···?”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 두진이 말을 꺼내자, 전경완이 도시락 포장을 뜯으며 답했다.
“저도 공부할 게 많습니다. 젊을 때는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녔습니다만, 대흥시는 이번이 처음이라서요, 선배님.”
우뚝.
전경완이 두진을 선배님이라 칭하자 도훈, 영배, 두진이 동시에 굳어졌다.
“왜들 그러십니까? 격식 안 차리는 자리라면서요?”
“... 하하, 그, 그게···.”
나이는 두진이 전경완보다 다섯 살 많지만, 두진은 6급으로 정년퇴직했고 지금도 6급이었다.
실세라 할 수 있는 비서실장이라지만, 4급 부시장이 ‘선배님’이라 부르는 게 당연히 어색할 수밖에.
“근무 시간이나 직원들 앞에서야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편한 자리에서는 편하게 말씀하시죠. 선배님.”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진이 난색을 보이자 전경완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그럼 선배님은 선배님 편하신 대로, 저는 저 편한 대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이고···.”
“어서 드시죠. 맛있어 보입니다.”
전경완이 자기 페이스대로 결론을 내리는 동안, 도훈과 영배는 끼어들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편하게 말하는 현장을 들켰으니 전경완도 동참하겠다는 걸 뭐라 말리겠는가.
그 상대가 도훈도 아닌데.
“... 드시죠, 시장님.”
“네.”
두진의 말에 도훈은 담담히 답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고 영배도 뒤따랐다.
얼마간 말없이 식사하던 전경완이 두진에게 대흥시 시정과 관련된 이런저런 걸 묻고 두진이 답하기 시작했다.
“아, 그건 기획팀이 지난주에 정리한 보고서를 보시면 좀 이해가 빠를 겁니다.”
“작년 우리 시 예산이 1,300억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중에서···.”
“그 문제는 지역경제과 경제진흥팀에서 담당합니다. 재래시장 규모가 작지만 그나마···.”
초짜인 도훈이 시정 현안을 훤히 꿰뚫고 있다지만, 시정 전반에 대한 지식은 두진을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당연하게도, 전경완의 질문에 답하는 두진은 막힘이 없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해서 두진과 대화하던 전경완이 한참 만에 무척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시장님 만나서 여기 오길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오늘 운이 좋았네요. 안 그렇습니까, 선배님?”
“커험, 과찬이십니다.”
두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고, 전경완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모두를 차례차례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면 앞으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야근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
의도를 이해 못 한 모두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전경완이 얼른 설명했다.
“아니, 그게··· 함께 야근하면 송 선배님께 도움받아 제가 좀 더 빠르게 적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시장님과는 아무래도 현안 논의를 좀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을 테니 그 또한 좋은 일 아닙니까?”
“......”
결정은 ‘네 몫’이라는 듯 두진, 영배의 시선이 차례로 도훈을 향했다.
도훈은 선선히 승낙을 못 했다.
“저희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쉽게 결정하실 일은 아니죠.”
선선히 답하면서도 전경완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식사를 마친 전경완은 두진과 잠시 더 대화한 후 자리를 떴다.
“... 미리 ‘자아비판’한다. 앞으로는 야근 때도 좀 더 조심할게.”
“... 나도 그러겠네.”
“신경 쓰지 마세요. 설마 소문은 안 내시겠죠.”
도훈이 담담히 답하자 영배가 도훈이 전경완에게 시간을 달라고 한 이유를 물었다.
“아까, 도지사님 신경 쓰여서 그랬던 거야?”
“응. 업무 관련해서는 전혀 걱정이 안 되는데, 도지사 얼굴만 생각하면 최소한의 거리는 유지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두진도 이해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도지사님이 저를 좋게 보시고 가까이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저는 도지사님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공적으로도 그렇고 사적으로는 더더욱 그렇죠.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요.
도훈이 그런 얘기를 한 게 불과 며칠 전인데, 도지사가 임명한 부시장이 부임 당일로 ‘훅’하고 치고 들어오는 걸 허용하는 게 더 이상했다.
“내 보기에는 상대가 누구라 해도 선을 지킬 스타일 같았네. 물론, 속내까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실장님과 비슷하게 느끼긴 했는데요. 혹시 모르니까요.”
“그건 그렇지.”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천천히 겪다 보면 어떤 분인지 더 정확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갈 길이 구만린데 얼른 공부나 하시죠.”
“... 자네가 오래간만에 옳은 말 하는군.”
“하하, 집에는 가야죠.”
영배의 푸념에 모두가 웃고 나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에 집중한 도훈은 전경완 부시장이 누군가와 자신을 주제로 통화하고 있을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떨떠름한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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