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어떤 사람입니까?
월요일 점심시간.
청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도훈과 영배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야, 중국관 사장님이 준 그 리스트에 있는 식당 안 갈 거야?”
“... 글쎄···.”
“에휴. 왜 마다하는 거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도훈은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괜히 영배가 도훈의 절친이 아니었다.
“너 인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구나?”
“......”
“에고. 친구야. 이럴 때는 속된 말로 얼굴에 철판 까는 거야.”
“... 형이 시장이라면 간다는 거야?”
“당연하지.”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영배의 답에 도훈은 쓰게 웃었다.
“선거 때 역할을 바꿨어야 했다는 생각을 이럴 때마다 하게 된다니까.”
“에이, 그건 아니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니긴 뭘. 형이 했으면 아주 잘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뭐? 끔찍? 내 앞에서 그런 얘기가 나와?”
“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담배를 다 피운 도훈과 영배가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건물 모서리를 도는데 홀로 서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깜짝 놀랐다.
“깜짝이야!”
“죄송합니다.”
혼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시의회 의장 안준식.
“아니, 거기서 뭐 하고 계셨습니까?”
“지금 의장님 하시는 거요.”
“......”
영배와 도훈이 지나치려는데 안준식이 불렀다.
“조금만 있다가 가시죠?”
“......”
안준식이 할 말이 있는 눈치여서 도훈은 영배를 먼저 보내고 자리에 남았다.
“주말에도 여기저기 도셨다면서요?”
“네. 의원님들도 그러시는 것 같던데요.”
“시장님이 시민들 챙기는데 눈치가 보여서 의원이 쉴 수 있었겠습니까?”
안준식이 투덜거렸고 도훈이 말없이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나가서 시민들 살피자고 의원들 독려한 게 바로 안준식이었으니까.
“아, 그거 아십니까?”
“뭘 말입니까?”
“토요일에 차 의원이 노인정에 갔었는데 거기서 심하게 꾸중을 들었답니다.”
“왜요?”
“일 잘하는 시장 발목 붙잡지 말라고요.”
“......”
안준식이 피식 실소를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어르신들도 알 건 다 알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의장님이 그런 발언 하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듣는 사람 없는 데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면서요?”
“... 그렇긴 하죠.”
도훈이 담담히 웃는데, 안준식이 주변을 살피고는 도훈에게 한발 다가와 속삭였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말입니다.”
“... 네.”
“차 의원에게 제보했다는 사람도 시 간부 중 하나입니다.”
“... 그렇군요.”
담담한 도훈을 빤히 바라보던 안준식이 말을 이었다.
“안 놀라시네요?”
“반쯤은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더는 그 문제에 신경 쓰지 말자고 마음먹었고요.”
“하긴, 요새 분위기를 보면 그 소동이 오히려 시장님께 득이 됐죠.”
“......”
도훈이 담담한 표정 그대로 바라보자, 안준식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얼른 말을 이었다.
“물론, 시장님이 그걸 기대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네.”
안준식이 여전히 담담한 도훈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했다.
“저도 시장님 덕을 봤습니다.”
“... 무슨 말씀이세요?”
“그 문제로 소란스러워졌더라면, 당연히 의회도 영향을 받았을 테니까요.”
“......”
담담히 시선을 교환하는 도훈과 안준식.
도훈은 그가 차 의원 ‘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보아하니, 남몰래 모임을 했다는 간부들이 과거 여당 인사들과 친했던 이들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
간부들의 돌출행동에 여당까지 관련 있는 게 아니냐 추궁당할 걸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 설마···?”
“무슨 의심하는지 짐작하는데,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그리고 간부들도 머리 좋은 사람들이에요. 지금 우리 당이 다수라고는 해도 시의회뿐이잖아요. 자기들에게 득 될 게 없다는 거 잘 알 겁니다. 시장님은 분명 우리 당 소속이 아니니까요.”
“......”
“우리 당 의원들에게 간부들과 거리 유지하라고 열심히 단속하고 있습니다. 두 분 선배님들까지요. 그나마 한 분은 요즘 얼굴 보기 힘들지만요.”
양상택은 구속까지 되진 않았지만, 검찰이 기소할 예정이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액수의 금품을 받고 시에 공사를 요구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어쨌든,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진 덕분에 요즘 시의회에서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믿겠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한데, 저쪽은 좀 상황이 다를 겁니다.”
“... 그런 것 같네요.”
차혜진 의원이 ‘제보’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일부 간부와의 끈이 유지되고 있다는 간접 증거라 할 수 있었다.
다만, 도훈은 이쪽이고 저쪽이고 그걸 캐서 문책하고 어쩌고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유착’ 관계가 시정에 문제 혹은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은.
“전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일체 무시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의장님도 모른 척 넘기세요.”
“그러지요.”
안준식이 선선히 답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지난주에 도지사님 왔다 가셨다면서요?”
“네. 월요일 밤에요.”
“허허.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신 겁니까? 우리 지역위 사람들 아무도 몰랐는데.”
조금은 뚱한 표정의 안준식에게 도훈이 차분히 답했다.
“전혀 그런 성격 아니었습니다. 저하고 비서실 직원 전부 다 도지사님이랑 저녁 먹었을 뿐입니다.”
“... 진짜요?”
“네. 당일 오전에 연락이 와서 잡힌 약속이었습니다. 도지사님이 수행원 둘 데리고 오셨고, 저랑 비서실 직원 넷 합해 여덟 명이 밥 먹고 술 마신 게 전부입니다. 도지사님이나 저나 일 얘기는 전혀 안 했고요.”
“......”
안준식이 가만히 도훈을 살피다 한숨을 내쉬었다.
강정문 도지사가 대흥시를 다녀갔음을 알게 된 건 중국관에 사진이 떡 하고 내걸린 직후.
지인이 그 사진을 보고 알려줘 조금은 놀라 중국관에 찾아가 사장에게 그 날 얘기를 전해 들었다.
때문에, 이 일로 도훈을 부러워는 해도 원망할 게 아니라는 걸 ‘이해’는 하고 있었다.
“쩝. 당 사람들도 좀 챙기시지.”
“......”
도훈은 겉으로는 담담했지만, 속으로 조금 뜨끔했다.
‘... 여당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건 미처 생각 못 했네.’
지역위원회는 정당의 가장 근본 조직.
도지사라면 당연히 잘 챙겨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직, 강정문은 공식 일정으로 대흥시를 다녀간 적이 없다.
그런 판에, 비공식으로 조용히 시장만 만나고 갔으니···.
도훈은 제안에 응했을 뿐이었지만, 상대가 도지사이다 보니 지역 여당 사람들에게 복잡미묘한 시선을 받게 된 터였다.
“앞으로는 제가 좀 더 조심해야겠습니다.”
도훈이 자기반성을 하며 그런 말을 하자 안준식이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도지사와 시장의 관계가 도지사와 시의원의 관계보다 우선되는 게 맞죠. 맞는데··· 저희가 좀 서운한 거뿐입니다.”
“그러니까요. 의원님들과 손발을 맞춰야 하는 건 도지사님이 아닌 전데, 의원님들이 제게 감정 상하시면 안 되잖습니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닙니다.”
안준식이 정색하는데 도훈의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비서실.
안준식에게 눈빛으로 양해를 구한 도훈이 전화를 받았다.
“네, 접니다.”
- 시장님, 어디세요?
“저, 청사 밖 자판기 앞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도훈이 묻자, 정임이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 조금 전에 연락받았는데 순찰 나간 우리 직원들이 길에서 쓰러진 할머님 한 분을 발견해 지금 대전 병원으로 직접 이송 중이래요.
“네?”
대흥시에는 제대로 된 종합병원이 없었다.
응급실을 가진 병원이 있긴 했지만, 진료 과목이 한정되어 모든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어 119 구급대조차 웬만한 환자는 곧바로 대전으로 이송하는 형편이었다.
놀라 움찔했던 도훈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119하고 논의해서 그런 결정을 한 거랍니까?”
- 네. 조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연락 온 것도 우리 직원이 아니고 안전센터였어요. 할머니를 태운 직원 차는 그대로 대전으로 가는 중이고 혹시 몰라서 대전 남부소방서 구급대에 협조 요청도 했대요. 대전과 대흥 중간 지점까지 구급차가 내려왔다가 직원 차와 합류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 위급하신 겁니까?”
- 저도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안전센터 직원이 센터 들리지 말고 곧바로 대전으로 가라고 했다는 게···.
“... 이런.”
너무도 찌는 듯한 더위인지라 농촌 지역 어르신들을 더 살피겠다고 실행한 직원 순찰이었다.
경찰서가 아닌 지구대, 소방서가 아닌 안전센터뿐인 대흥시인 터라 일반 공무원들이 더 큰 책임을 질 수밖에 없으니까.
두 명씩 짝지어 외곽의 농촌 마을을 돈다고 해서 성과가 있을 거라 기대한 것도 아니고 그런 상황이 애초에 벌어지지 않는 게 더 좋다는 걸 도훈은 모르지 않았다.
다만, 예상치 못하게 환자를 실제로 발견했다면 부디 무탈했으면 하는 심정이랄까.
“... 더 하실 말씀 있습니까?”
- 아뇨, 그게 전부입니다.
환자를 차에 태우고 대전으로 달려가는 상황에서 시장이 따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전화를 끊으려던 도훈이 깜빡 잊은 걸 떠올리고 물었다.
“아, 그런데 그 직원들은 누굽니까?”
- 그게··· 부시장님하고 비서입니다.
“... 누구요?”
- 부시장님이 오늘 순찰하는 직원들 격려차 점심을 사셨거든요. 순찰도 잠깐 참여하기로 했는데, 그러다 우연히 쓰러진 할머님을 발견하셨답니다.
“... 알겠습니다.”
도훈이 전화를 끊었고, 안준식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최근 항상 굳은 표정인 여성식의 얼굴을 떠올리며 도훈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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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오후, 대흥시청 부시장실.
- ... 폭염 순찰에 나섰던 부시장과 비서가 신속히 대처한 결과, 85세의 할머니가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119안전센터와 상의해 가까운 응급실이 아닌 대전의 종합병원으로 곧바로 환자를 이송했고, 오 모 할머니는 응급실에서 의식을 회복하고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빙긋.
지역 뉴스에 나오는 자신의 인터뷰 화면을 바라보는 여성식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월요일, 시청에 있기가 답답해 충동적으로 직원들에게 점심을 샀고, 시청으로 복귀하는 게 마뜩잖아 비서와 폭염 순찰을 했다.
마을 입구에서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대전까지 차로 달리는 사이에는 당황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어제부터 지역 TV와 신문사 기자들이 찾아들며 제대로 실감했다.
‘... 내게도 운이 트이는구나.’
오늘 아침, 장관에게 격려 전화까지 받았고 지역 아침 방송에 이 얘기가 보도된 직후부터 지인들의 연락이 쇄도했다.
최근, 의연한 시장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 의기소침했던 여성식에게 일대 반전이 찾아온 셈.
‘...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일은 당신 실수야.’
기자들은 ‘폭염 순찰’을 생각해낸 시장과의 인터뷰도 청했다는데, 정작 시장은 모든 인터뷰를 자신에게 미뤘다.
어떤 경우에도 얼굴 팔기 바쁜 시장만 보아왔던 여성식은 무척 의외였지만, 그는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덕분에 자신을 향한 시청 직원들의 눈빛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달라졌다.
미소와 함께 ‘고생하셨습니다.’ 인사하던 도훈을 떠올리며 여성식이 중얼거렸다.
“운이 네게만 있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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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대흥시청 시장실.
도훈은 갑자기 걸려온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어르신이 무탈하셔서 다행이죠, 뭐.”
- 하하하! 그건 그래요. 공무원들이 조를 짜서 직접 순찰까지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그걸 김 시장이 생각해냈다니 칭찬하지 않을 수 없네요.
“... 과찬이십니다.”
연신 칭찬하는 강정문에게 도훈이 뻘쭘한 표정으로 답하는데, 강정문이 화제를 돌렸다.
- 그 TV에 나온 여성식 부시장 말입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그분 여기 오기 전에 도청에 계셨습니다. 도청에 지인도 제법 있고 인사 자료도 있지 않습니까?”
- 그건 그런데, 3년간 거기 있었잖아요. 인사 자료를 보긴 했는데, 나는 겪어보지 않은 분이라 김 시장에게 묻는 겁니다.
“글쎄요. 저도 그분을 안 지가 두 달도 안 됐을 뿐입니다만···.”
- 아, 느낌이라도 있을 것 아닙니까?
조금 집요하게 여성식의 평가를 요구하는 강정문이 조금 의아해진 도훈.
“... 그냥 단순히 관심이 생기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 ... 하여튼, 눈치는 빠릅니다. 김 시장.
“뭔데 그러시는 겁니까?”
- 이유를 알면 혹시 여 부시장에 대한 김 시장의 평가가 달라지는 겁니까?
강정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사라졌기에, 도훈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여성식 부시장 어떤 사람입니까?
도훈은 최근 꺼칠한 얼굴에 온갖 감정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지내고 있는 여성식을 떠올렸다.
자신을 향한 그 눈빛에 담긴 온갖 감정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두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질시와 분노.
그 이유를 짐작했지만, 모른 척 넘기고 있었던 도훈이었다.
때가 되면, 스스로 다스릴 거로 생각하면서.
- 김 시장? 듣고 있어요?
“네, 도지사님. 여 부시장은···.”
담담한 표정이 된 도훈이 차분히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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