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불청객 2 - 1.
- 오빠 말대로 하길 잘했어. 어제, 나 기자 됐다고 얘기했더니 아빠가 한참 말이 없어서 좀 무섭긴 했는데, 결국 잘 해보라고 하셨거든. 그래서인지 오늘 출근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 고마워, 오빠.
메시지를 확인한 도훈이 말없이 웃었다.
어제 아침 먹고 도연이 아버지를 뵈러 갔는데 아버지도 동생도 연락이 없더니 오늘 아침 온 메시지였다.
‘다행이네.’
7월 마지막 주 월요일 아침 대흥시청 시장 비서실.
시장과 비서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 그렇게 주민 전원의 서면 동의를 받았다고 합니다.”
두진의 말이 끝나자 도훈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말을 받았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사업소 직원들이 고생했겠어요.”
“아닌 게 아니라 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명하느라 입이 좀 아프긴 했답니다.”
“집마다? 거긴 마을 회관이 없습니까? 방송해서 모여달라고 부탁하면···.”
“방송해도 모이시질 않았다고 하더군요. 주민들이 그만큼 화가 나셨었단 말이겠죠.”
“... 자업자득이네요.”
도훈의 말에 모두가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두진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거 말고는 쉽게 끝났습니다. 아, 그리고 소장 대리가 시장님께 꼭 전해달라는 말이 있습니다.”
“뭡니까?”
“영한리 주민들이 시장님은 왜 안 오냐고, 얼굴 한번 보자고 했답니다.”
“... 아직 제 멱살이 필요하시답니까?”
“그건 아니고, 일 바로잡아줘서 고맙다고 부침개라도 한번 해 먹이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하하, 다행이네요.”
“아닌 게 아니라 저도 좀 의문입니다. 시장님께서 그 할머님들과의 약속 지키신 거 아닙니까? 할머님들이 좋아하실 텐데···.”
두진의 말에 도훈이 담담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 접니다만, 그곳 주민들의 신뢰를 잃은 건 사업소 직원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그들이 해결책을 들고 주민들을 상대하는 게 맞죠. 앞으로도 그 일로 계속 주민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도 사업소 직원들이고요.”
도훈의 말에 두진을 비롯한 직원들은 묘한 표정을, 영배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영한리 지하수 문제 해결 실마리를 찾아낸 건 도훈이었는데, 정작 그 방안이 구체화 되자 도훈은 손을 뗐다.
처음엔 화난 주민들을 달래는 게 힘들었다지만, 주민들이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은 당연히 환영을 받았다.
즉, 도훈은 주민들에게 칭찬받거나 일 잘한다고 생색낼 수 있는 부분에서 쏙 빠져버린 것이다.
어떻게든 얼굴 팔기 바쁜 시장들만 보아왔던 두진과 직원들이나 홍보에 아주 좋은 소재라 생각했던 영배가 나름대로 생각이나 불만이 드는 게 자연스러웠다.
“뭐, 나중에 공사 시작되면 가서 인사는 잠깐 하기로 하죠. 다음은 뭡니까?”
“정기인사 관련한 겁니다.”
“제가 광복절 전에 한다고 했었죠?”
“네.”
올해는 선거 때문에 정기인사가 미뤄졌다.
거기에, 취임 전에 간부들에 대해 들은 얘기도 있고 사건이 터지기도 해서 도훈은 이 정기인사를 광복절 전에 하겠다고 천명했다.
“각 부서 추천안은 올라왔습니까?”
“네. 하급 직원들은 똑같고, 6급 이상 리스트에는 변화가 좀 있습니다.”
“뭐, 아직 시일이 있으니까 차분히 검토하시죠.”
“알겠습니다. 다음은 주민참여 예산 관련한 겁니다.”
“... 그거 아직 3주 가까이 마감 시한이 남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위원회 내부에 잡음이 좀 있습니다.”
주민참여 예산은 주민이 예산편성 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각 지역 숙원 사업 해결이나 행정의 투명성, 예산의 신뢰성 증대를 목적으로 한 사업이다.
예산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게 아니고 일정 금액을 배정하고 제안을 받은 후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서 최종 심의, 결정하는데, 대흥시는 8월 중순까지 내년 예산안에 반영할 제안을 받는 중이었다.
“제안과 관련한 게 아니고 위원회 구성원 간의 문제입니까?”
“네.”
“그럼 놔두세요.”
“네?”
두진이 반문하자 도훈이 심드렁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위원회 구성원이 15명뿐인 건 너무 적습니다. 최소 2배, 많으면 세 배로 늘릴 생각입니다.”
“... 그게 당장 가능하겠습니까? 지금도 잘 안 돌아가는데.”
주민이 직접 참여해서 원하는 사업을 선정하고 예산을 배정한다는 의의는 좋지만, 참여가 저조하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권’을 노린 이들이 끼어들 여지가 많아질뿐더러 정치권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을 터.
“자치행정과에다 팁 몇 가지 얘기해주고 고민 좀 해보라고 했습니다. 일단 보고를 받은 후에 구체적으로 논의하시죠.”
“... 알겠습니다. 다음은···.”
회의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전화가 울렸고 영배가 움직여 전화를 받았다.
다른 이들은 회의에 집중하는데, 영배의 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예? 진짜요?”
모두의 시선이 영배에게 집중됐고, 영배가 통화를 이어갔다.
“아니, 그게 꼭 오늘이어야 합니까? 네. 아, 그래요? 글쎄요. 제가 확답하기는 어려운데···. 좀 늦어도 상관없다고요? 무슨 중요한 안건이라도···? 아, 예.”
‘어딘데 저런담?’
도훈이 속으로 의아해하는데, 통화를 마친 영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회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두진이 질문을 던졌다.
“어딘데 그래?”
“충남 도지사 비서실이었습니다.”
“도지사 비서실? 거기서 왜?”
“저녁에 도지사님이 시장님하고 식사했으면 한다고···. 늦어도 괜찮다고 하는데요?”
“오늘?”
“오늘 아니면 내일인데, 오늘이면 더 좋겠답니다.”
“공식적인 제안인 거야?”
“어디 알리고 오는 거 아니니까, 우리도 조용히 맞이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되는지 안 되는지 연락해준다고 했습니다.”
“......”
모두의 시선이 도훈을 향했고, 표정을 보자마자 그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아주 마뜩잖은 표정으로 일그러진 게 ‘싫다’고 얼굴로 웅변하는 듯했으니까.
“시장님, 상대는 도지삽니다. 협력의 대상이지 각을 세울 상대가 아닙니다. 하물며, 상대가 먼저 만나자고 하는데 그것도 조용히 밥이나 먹자는데 설마 퇴짜를 놓으실 건 아니죠?”
유일하게 도훈이 왜 저런 표정인지를 아는 영배가 미리 단속하듯 말했고, 도훈은 그 표정 그대로 답했다.
“... 싫어도 만나야지 어쩌겠습니까.”
“왜 싫으신 건데요? 강정문 도지사님, 정치인치고 깔끔한 분 아닌가요?”
정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도훈은 차마 그가 ‘너무 닳고 닳은 정치인이라서’라고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능수능란한 분이라 당해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 설마 도지사님이랑 싸우시게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저 오늘 저녁에 일정 있습니까?”
정임에게 묻는 도훈은 ‘제발 있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정임은 사실대로 답했다.
“지금까진 없습니다.”
“... 휴우. 어쩔 수 없네요.”
도훈이 포기하자 영배의 표정이 밝아졌는데 그가 뭔가를 떠올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저쪽에서 조용한 장소였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어디로 하죠?”
“글쎄···. 은밀히 사람을 만날 식당이라.”
크지 않은 도시다 보니 고급스럽고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그런 식당이 흔치 않았다.
직원들이 골똘히 생각하는데, 도훈이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했다.
“... 아!”
“... 어디 좋은 데 있습니까?”
두진이 묻자 도훈이 싱긋 웃고는 말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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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정말 반갑습니다, 사장님!”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영광입니다, 도지사님.”
“아이고, 영광은요.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닙니다.”
도지사 강정문과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는 가게 사장.
거리를 두고 선 이들이 조용히 속삭였다.
“... 난 사장님 저런 표정 처음 봐.”
“나도 마찬가지야.”
이곳은 다름 아닌 도훈과 영배가 단골인 중국관.
원래 오늘은 정기 휴일인데 영배의 연락을 받은 중국관 사장이 ‘도지사가 손님이라면 대환영이다’며 선뜻 제안을 받아들였다.
최근에 바빠서 못 왔지만, 사장에게 잘 보이려면 안 좋은 소문 도는 시의원보다 자기 관리 철저하다고 인정받은 도지사가 훨씬 낫다는 데 영배도 동의했다.
‘이렇게라도 실속을 차려야지.’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옆으로 영배는 물론 담담한 두진, 조금은 긴장한 정임과 영진이 서 있었다.
강정문 측이 도훈의 비서실 직원도 함께하면 좋겠다고 해서 전원이 참가한 터.
강정문은 중국관 사장과 긴 인사를 하고는, 미리 준비한 종이에 사인하고 함께 사진까지 찍은 다음에 풀려났다.
“오늘 밥은 제가 사는 겁니다, 사장님. 그러니까 재료 아끼지 마시고 실력 한 번 보여주세요. 김 시장이 여기서 밥 먹자고 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죠! 오늘 제 요리사의 혼을 불태우겠습니다. 기대하세요, 도지사님!”
‘... 멘트가 아주 찰지구나.’
상황이 달랐다면 ‘역시 닳고 닳은 정치인’이라고 혀를 찼을 도훈이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강정문의 접대성 멘트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중국관 사장이 주방으로 달려갔고, 강정문이 수행원 두 사람과 다가왔다.
‘... 이건 접대다. 회사에서 자주 해봤던 접대랑 전혀 다름없다.’
진득한 미소를 머금은 강정문의 얼굴을 본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도지사님.”
“오래간만이네요, 김 시장님.”
악수를 교환한 두 사람은 각자의 수행원과도 인사한 뒤 중국관의 뒷방으로 향했다.
미리 가운데 칸막이를 치워놔서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이 앉아도 자리가 넉넉했다.
“흠, 딱 맛집 분위기네요. 기대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맛 하나는 보증합니다. 원래 오늘 정기 휴일인데 도지사님 오신다고 주인이 특별히 문을 연 겁니다.”
“그래요? 하하, 사장님이랑 사진을 좀 더 많이 찍을 걸 그랬네요.”
“뭐, 가실 때 찍으시면 되겠죠.”
도훈과 강정문은 물론, 두 사람의 수행원 간에도 인사가 오갔고, 곧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요리사의 혼을 불태우겠다는 사장의 말이 허언이 아닌 듯, 안 그래도 훌륭한 중국관의 음식은 다른 때보다 더 맛있었다.
“오호? 이거 정말 걸작이네요.”
“... 그러게요. 제가 여기 단골 된 지 몇 년 됐는데, 지금껏 먹어본 중 오늘이 제일 맛있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이거 갑자기 찾아와서 폐를 끼치는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술을 곁들인 식사가 이어졌고, 강정문과 도훈은 물론 모두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다만, 도훈은 억지로 웃느라 얼굴 근육이 무척 땡긴 상황에서도 한 가지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 정말 밥이나 같이 먹자고 왔을 리가 없는데.’
조상님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도훈이 판단하기에 강정문은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닳고 닳은 정치인이었다.
그나마 정치‘꾼’이 아닌 정치’인’이라고 표현하는 건 강정문의 과거 행보가 큰 방향 전환 없이 ‘개혁’이라는 방향을 향해 이어져 왔기 때문이었다.
도훈은 방향보다는 강정문의 행보가 큰 변화 없이 꾸준했다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다.
식사 도중 도훈이 화장실에 들렀다가 담배를 피우러 밖에 나왔다.
“후우···.”
도훈이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런, 김 시장님. 아직 담배 안 끊으셨어요?”
“......”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강정문.
지긋이 웃는 그를 도훈이 빤히 바라보는데,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사실 나도 완전히는 못 끊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담배 한 대만 주세요.”
“... 네.”
둘이 나란히 서 말없이 담배를 피우던 중 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의 저녁 식사는 무슨 의미입니까?”
“... 역시 시장님이네요.”
“네?”
“김 의원이랑 내기했거든요. 김 시장이 ‘왜 왔냐?’고 묻느냐 아니냐로.”
“... 도지사님이 이기셨나 보군요.”
“어떻게 알았어요?”
“웃고 계시잖습니까.”
“하하, 맞아요.”
강정문이 다시 담배를 빨아들였고,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확실히 이기게 해드리죠.”
“......”
“왜 오셨습니까?”
“......”
담담한 말이었지만, 그 누가 들어도 식겁할 만한 질문.
나이를 떠나 초짜 시장이 탄탄한 경력의 도지사에게 감히 할 소리가 아니니까.
당연히, 불쾌할 만도 하건만 강정문은 입가에 웃음을 물고 답했다.
“별 뜻 없어요. 그냥 친분이나 다지자는 거지.”
“......”
“지난번 일로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내가 좀 닳은 건 맞아요. 아무래도 정치를 꽤 오래 했으니.”
“......”
“하지만, 김 시장에게 미움받을 정도로 지저분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
침묵하는 도훈의 옆에서 조상님이 속삭였다.
- 흠, 거짓말은 아니다. 저놈 관상을 보면 협잡질은 소질이 없어.
차분한 눈으로 말없이 응시하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그건 인정해 드리죠.”
“하하, 고맙다고 해야 합니까?”
“아뇨. 하지만, 그래서 더 궁금한 겁니다. 도지사님 같은 정치인이 목적 없이 초짜 시장에게 이런 박대를 받아가며 자리를 지킬 이유가 없으니까요.”
“... 쩝.”
입맛을 다신 강정문이 답했다.
“아무리 정치인이라도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편하게 긴장 풀고 싶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
“진정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함께라면 더 좋지 않겠어요?”
“... 에?”
얼빠진 표정으로 이상한 소리까지 흘린 도훈.
그의 귓가에 조상님이 다시 속삭이고 있었다.
- ... 저놈, 진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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