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불청객과 그의 후배 - 2.
얼마 뒤 시장실.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네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인상을 쓰고 연신 오른손을 주무르는 최승범 기자와 난처한 표정의 도연.
딴 때 없이 냉랭한 도훈과 양쪽의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는 영배.
한참이나 이어진 침묵을 깬 건 최승범 기자였다.
“제가 무척 반가우셨던 모양입니다, 시장님?”
“... 네.”
“조금만 더 반가웠으면 제 손이 아주 으스러졌겠습니다? 하하하.”
감정 가득한 표정으로 쌀쌀맞게 말하는 최승범에게 도훈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저보다 최 기자님을 더 열렬히 반가워할 분이 한 분 계십니다.”
“... 예?”
“그분한테 연락하면 당장 달려오실 텐데, 어떻게 만나보실래요?”
“......”
최 기자는 영문을 몰라 했지만, 도연은 오빠가 아버지를 언급하는 줄 알고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두 남매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게 뭔 소린가.’하는 표정인 최승범에게 도훈이 진득한 미소를 보내며 말을 이었다.
“참고로, 그분 손아귀 힘은 저보다 더 세요. 제가 그분 피를 물려받긴 했는데 아쉽게도 살짝 못 미칩니다.”
“... 예?”
“그분은 한 손으로 사과나 배를 그냥 ‘아작’ 내시는 건 물론 호두도 무척 쉽게 까신답니다.”
“......”
“이렇게요.”
우두둑.
도훈의 주먹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도 소리지만 도연이 열심히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본 최 기자는 영문은 몰라도 더는 ‘시비’를 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도훈을 잘 몰랐다.
“... 지금은 인터뷰가 우선이라···.”
“한 1시간 정도 인터뷰하는 사이에 도착하실 겁니다.”
“......”
“더 걸릴 것 같으면 인터뷰 시간을 늘릴 수도 있습니다.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 하, 하하.”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진 최 기자가 어색하게 웃는데, 도연이 끼어들었다.
“오빠, 제발 그만해요!”
도훈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도연은 알았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간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김도연 기자님.”
“... 네?”
“저는 지금 오빠로서 동생을 만나고 있는 게 아닌데요.”
“......”
“오빠로서는 지금 당장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고하러 동생과 달려가는 게 맞는데··· 그쪽이 더 좋으신가요?”
“... 아, 아닙니다.”
동생을 일격에 패퇴시킨 도훈의 시선이 다시 최 기자를 향했고, 서늘한 도훈의 눈빛을 마주한 최 기자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와, 정말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네.’
최승범이 도연과 동행한 건, 도연을 통해 뭔가 조금이라도 도훈에게서 더 얻어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냥 회사, 학교 후배인 귀여운 녀석이 오래 오빠를 못 봤다기에 나름 배려한 것이었다.
도연이 ITS에 합격한 건 도훈이 시장에 출마하기 한참 전.
또한, 도훈이 시장이 된 이후에도 도연은 그와 남매라는 걸 철저히 비밀로 했다.
때문에, 도연의 오빠가 시장이라는 건 ITS 내에서 아직 아무도 몰랐다.
유일한 예외인 최승범도 도연이 알려줘서가 아니라 사전 조사를 하다 도훈에게 후배와 나이와 이름이 같은 동생이 있다는 걸 알았고, 넌지시 찔러봤다가 진짜 동생이라는 걸 알았다.
- 선배님, 우리 오빠 우습게 보시면 안 돼요. 평소에는 무사태평 허술한 남자일 뿐인데, 마음을 먹으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요. 머리도 뛰어나고 행동력도 있는 데다가, 바늘이 아니라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라고요.
내려오는 차 안에서 도연이 경고했지만, 사회부에서 잔뼈가 굵은 최승범은 새겨듣지 않았었다.
그런데···.
‘... 이 정도면 최종 보스급이네.’
오른손이 으스러질 뻔한 횡액(?)을 당했지만, 비서의 귀띔과 기자의 눈치로 동생이 기자라는 걸 몰랐고 그 충격 혹은 원망 일부가 자신을 향한 거라 짐작했다.
그래서 그걸 빌미로 기선을 잡으려고 신경질을 부렸는데, 방송국 기자인 자신에게는 물론 친동생에게도 말 그대로 ‘얄짤’ 없질 않은가.
물론, 자신에게도 숨겨진 한 수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효과를 확신할 수 없는 데다가 자신에게도 타격이 될 수가 있었다.
기세 싸움에 지기 싫다고 ‘솥에 삶아지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최승범은 최대한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양손을 들었다.
“... 항복입니다, 시장님.”
“......”
“하하, 역시 김 기자 말대로 보통 분이 아니시네요.”
“......”
“안준식 의장님은 시장님을 잘 모르는 것 같고 말입니다.”
“......”
“커, 커험! 할머니가 또 오라는 말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
백기를 든 상대를 빤히 바라보던 도훈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시작할까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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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과 최승범 기자의 인터뷰는 30분이 넘게 진행됐다.
그러나 대흥시와 관련된 질문도, 시정 현안과 관련된 것도 거의 없었다.
“... 생각합니다.”
“그걸 소신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 왜 그런 정치적 소신을 갖게 되신 건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만···.”
“......”
최승범의 질문은 도훈 개인에 관련된 것이 주를 이뤘다.
‘오빠 김도훈’은 당연히 아니고 ‘시장 김도훈’도 아닌 ‘김도훈’ 개인의 가치관과 정치적 소신, 그리고 그것의 성립 과정에 대한 질문이었다.
말하자면, 정치인 김도훈은 어떤 사람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달까.
당연히 자신을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도훈은 점점 심기가 불편해질 수밖에.
“... 그런 것 같습니다.”
“음, 그럼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까요? 김도훈 시장님의 정치적 이상은 뭡니까?”
빠직.
선을 위태위태하게 넘나들던 최 기자의 질문이 일순 노골적으로 바뀐 순간, 도훈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옆에서 지켜보던 영배와 도연이 단박에 눈치챌 정도로.
“자, 잠깐 쉬었다가 하시죠. 벌써 30분이 넘게 지났습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영배가 잽싸게 끼어들고 도연이 맞장구를 쳤지만, 도훈은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
도훈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게 묻고 싶은 게 뭡니까, 최 기자님.”
“지금 물어보고 있는데요.”
“슬쩍슬쩍 간 보다 훅 찌르고 들어오는 게 기자님 스타일인가요?”
“웬만한 기자는 다 그럴 겁니다.”
피식.
실소를 흘리고 난 도훈의 태도가 달라졌다.
담담한 것에서 날을 세운 ‘전투 모드’로.
“꼭 주말이어야 한다는 건 ITS에서 기획한 취재가 아닌 최 기자님의 독단일 수도 있다는 방증이겠죠?”
“글쎄요? 저희 빨간 날에 일하는 게 생활화된 사람들인데요.”
“방송국 인터뷰에 카메라가 없다는 것도 그런 의심에 무게를 더합니다.”
“하하, 모든 취재를 방송에 내보내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정치부도 아닌 기자님이 마치 정치인 인터뷰를 하는 것 같은 건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음, 정치부 기자가 관심 가질 정도로 시장님이 중요한 인물은 아니라는 건 어떻습니까?”
씨익.
도훈이 좀 더 진한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 미소를 본 영배와 도연은 위험 레벨이 점점 더 상승하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인터뷰를 최 기자님 혼자 꾸몄다는데 제 이번 달 월급을 걸죠.”
“흠, 저도 제 월급을 걸면 되는 겁니까?”
“그러시던가요.”
도훈에 단 한 치도 지지 않는 최승범.
그에게 심드렁하게 답한 도훈은 핸드폰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스피커 폰 모드로 전화를 걸었다.
- 114입니다.
“ITS 방송국 보도국 부탁합니다.”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자 도훈은 즉시 연결 버튼을 눌렀다.
“지금 뭐하십니까?”
“사회부에 확인하려고요.”
“오늘 우리 부장님 출근 안 하셨을 건데요.”
“그분 말고도 최 기자님 상급자가 한 분은 있겠죠.”
- 뚜루루루.
두 사람이 팽팽한 신경전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신호음은 울렸고 마침내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
띠. 띠. 띠.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긴 건, 최승범이 종료 버튼을 눌렀기 때문.
최승범이 인상을 구기고 있는데, 도훈이 테이블에 올려진 녹음기 두 개에 손을 가져갔다.
덥석.
“이건 왜요?”
“기자가 회사도 모르게 독단적으로 벌인 인터뷰를 남겨놓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파팟!
녹음기를 잡은 도훈과 그런 도훈의 손을 잡은 최승범의 시선이 허공에서 매섭게 맞부딪치며 불꽃이 튀는 듯했다.
잠시 그렇게 저항(?)하던 최승범이 입을 열었다.
“제 질문 세 개, 아니 두 개에 솔직히 대답해 주시면 지우는 데 동의하겠습니다.”
30분이나 공들인 인터뷰를 삭제해도 괜찮은 이유.
그건 최승범의 생각에 도훈이 진심을 털어놓지 않고 ‘모범 답안’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기자에게는 몰라도 최승범에게는 전혀 영양가 없는 인터뷰였다.
정작 묻고 싶은 걸 물으려는 시점에 도훈이 눈치까지 챘다.
부장에게 인터뷰 얘기를 꺼냈다가 취잿거리가 산더민데 뭔 한가한 소리냐고 된통 깨지질 않았던가.
“동의 안 받아도 될 것 같은데요?”
“아, 쫌! 사람이 적당히 봐줄 줄도 알아야죠. 강도도 빤스까지 싹 다 털어가지는 않잖아요.”
“대신에 목숨을 털어가기도 하죠.”
“... 에휴.”
싸늘하게 쏘아붙이긴 했지만, 도훈은 곧 전투 모드를 해제했다.
다만, 그건 최 기자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옆에 앉은 도연이 너무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어서였다.
“오프 더 레코드라면 질문 두 개 허락하겠습니다.”
“... 끙.”
잠시 고민하던 최승범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도훈은 녹음기를 손수 조작해 저장된 걸 지웠다.
“하세요, 질문.”
“쩝.”
입맛을 다신 최승범이 기운 빠진 표정으로 그러나 칼날 같은 눈빛을 도훈에게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시장 임기 마친 후에 본격적인 정치를 해볼 생각이 있으십니까?”
“전혀요.”
“그럼 재선에 도전하실 생각은요?”
“절대 없습니다.”
질문하기 무섭게 단호한 말투로 답하는 도훈.
그런 도훈에 온 정신을 집중한 최승범.
“... 진심이시네요?”
“당연하죠.”
“왜 예전 인터뷰에서는 그렇게 말 안 하셨어요?”
“직원들 장악력이 떨어질까 봐서요.”
예전에도 재선에 도전할 생각이 있냐고 여러 번 질문받은 도훈.
그때는 ‘나중에 생각해보겠다.’며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영배가 시장에게 ‘재선’ 의지가 없다면, 직원들이 좀 띄엄띄엄 보지 않겠냐며 도훈을 설득한 결과였다.
최승범에게 답한 도훈이 몸을 일으켰다.
“끝났죠?”
“... 네.”
“그럼 최 기자님은 알아서 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 하, 하하.”
불청객에게 축객령을 내린 도훈의 시선이 도연을 향했다.
“자, 이제 오빠 동생으로 돌아가자.”
“... 응.”
“하던 얘기는 마저 해야지?”
“... 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최승범이 조용히 짐을 싸고 있는데, 영배가 끼어들었다.
“시장님, 아무리 그래도 도연이 밥은 먹여야죠. 지금 밥때가 다 됐습니다.”
“하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긴 하네요. 얘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니까요.”
“오호, 그래요? 가만있자, 그럼 아예 진주랑 우리 와이프까지 다 같이 밥 먹자고 할까요?”
“흠, 나쁘지 않네요.”
도훈과 영배의 시선이 도연을 향했고, 도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와 단둘이 있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안전(?)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영배가 비서실로 나가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어, 진주야. 뭐하냐? 바빠? 아니라고? 응. 다른 게 아니라 도연이가 왔어. 그래, 도훈이 동생 도연이. 그래서 저녁을 같이 먹는 게 어떤가 해서.”
영배는 나갔는데 한 사람이 안 나가고 미적거렸다.
결국, 도훈이 기다리다 못해 입을 열었다.
“... 안 가십니까?”
“아, 가야죠. 하하, 가긴 가야 하는데···.”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지만, 이미 짐을 다 싼 최승범의 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용건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 인터뷰는 끝난 게 맞는데···.”
최승범이 여전히 미적거리자 도훈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갔다.
“하하, 그, 그게 우리 후배를 혼자 놔두고 가기가 좀···.”
“그 후배가 제 동생인데요. 제가 동생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습니까?”
“아, 그랬죠, 참. 하하. 그, 그래도 선배로서 후배를 보호할 책무가···.”
자꾸 도연이 핑계를 대는 최승범.
‘응? 이 남자가 설마···?’
평상시의 도훈은 수준 이상의 이성적 판단의 소유자.
하지만 끔찍하게 아끼는 동생이 눈앞에 있으니 자연히 영향을 끼치게 마련.
도훈이 말없이 바라보자 벅벅 뒤통수를 긁던 최승범이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사실, 저도 배가 고픈데 말이죠.”
“......”
“... 시장님을 만나려고 어렵게 시간 만들어서 왔는데 이렇게 빈손으로 가는 게 좀 억울하기도 하고···.”
“......”
뭐라 주절주절 얘기해도 도훈에게는 다 핑계로 들렸다.
“제 질문에 답하면 밥 정도는 먹게 해줄지도 모르죠.”
“질문요? 뭡니까?”
최승범이 반색하며 소파에 앉았고, 도훈이 말을 이었다.
시선은 최승범의 오른손에 고정했고 오른손에 지긋이 힘을 주고 있었다.
“최 기자님.”
“네.”
“결혼하셨어요?”
“... 예?”
전혀 예상 못 한 질문인 터라 최승범이 말문을 잃었다.
그의 반대편에 앉은 도연이 역시.
이글이글.
최승범의 대답을 기다림과 동시에 그의 손을 낚아챌 준비를 마친 도훈의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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