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불청객과 그의 후배 - 1.
토요일 오후, 도훈이 사는 빌라 주차장.
작은 발바리 한 마리가 옆에서 조는 가운데, 건물 그늘 낡은 SUV 뒤에 숨듯이 쪼그려 앉은 남자 둘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제 장례식이 끝난 한 사람을 애도하며 뒷산 공원에서 간만에 둘만의 조용한 술자리를 가졌던 도훈과 영배.
오늘 영배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두 잔 테이크 아웃 해 와서 모처럼 느지막하게 일어난 두 사람은 망중한을 즐기는 중이었다.
“야, 이 빌라에 아직도 너 말고 사는 사람 없냐?”
“어. 그러니까 월세를 전세로 바꾸자니까 주인이 마뜩잖아하면서도 바꿔줬지.”
선거비용을 정산받은 도훈은 그 돈으로 월세부터 전세로 바꿨다.
3층짜리 신축빌라의 유일한 거주자인 터라, 건물 주인은 어쩔 수 없이 도훈의 요구에 응했다.
“주인이 대전 산다고 했던가?”
“청주. 한 달에 두 번 정도 와서 복덕방 사장 닦달하고 가는 것 같더라.”
“아직도 그 사람은 네가 시장인 거 몰라?”
“그러니까 아무 소리 안 하겠지. 그 양반이 알고 입에 올리는 즉시 난 여기 뜰 거야. 귀찮아질 게 뻔하잖아.”
도훈이 사는 빌라는 주택 단지로 조성된 지 제법 됐지만, 실제로 집은 그다지 많지 않은 곳에 자리해 있었다.
드문드문 단독주택이나 빌라가 위치했고 대부분의 공터는 주민들이 텃밭을 만든 그런 모습.
주변에 닭을 키우는 집도 있어 새벽이면 ‘꼬끼오’ 소리에 잠을 깰 때도 있었다.
그런 판이니 새벽같이 출근했다가 밤늦게 퇴근하는 도훈이 이 동네에 산다는 건 도훈의 지인과 비서실 직원을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다.
“... 그나저나 웬 뜬금없는 인터뷰냐?”
“누가 아니래.”
“혹시 지하수 건이나 내 일 때문이려나?”
“글쎄···. 영한리 건이면 딱히 내가 할 말이 없잖아. 경찰이랑 선관위가 오히려 할 말이 많겠지. 그리고 형 일이면 내가 아니라 형한테 인터뷰 요청하지 않겠어?”
두진과의 공부도 쉬기로 한 오늘 두 사람이 이렇게 깔끔하게 차려입고 밍기적거리는 이유.
그건 오후 5시로 예정된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 시간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냥 주중으로 미루지 그랬냐? 귀찮다.”
“귀찮아도 형이 더 귀찮겠냐? 인터뷰하는 건 난데.”
“... 쩝.”
“정임 씨한테 듣기로는 그쪽에서 꼭 주말이어야 한다고 했대. 이번 주말 아니면 다음 주말. 이번 주를 고른 건 나였어. 뭐, 길어봤자 얼마나 길겠어. 그리고 아마 안 의장이랑 친분 있다는 사람일 건데, 그것도 좀 생각했지.”
“... 하긴, 네 인터뷰 때문에 나도 합법적으로 밖에 나올 수 있었다. 에휴, 애들이랑 놀아주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진다.”
“하하하.”
실없는 농담이 오가다 인터뷰 시간이 가까워졌고, 순심이를 챙긴 두 사람이 도훈의 차에 올랐다.
차가 시청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야, 참. 너 아버님한테는 연락 자주 해?”
“1주일에 한 번 정도? 뭐 통화가 길지는 않지만.”
“날이 점점 더워지는데 건강 잘 챙기시라고 해. 우리 부모님은 서울은 벌써 에어컨 없으면 못 산다고 하시더라.”
“내가 그런 말 하면 우리 아버지가 항상 뭐라고 하시는지 이제 형도 알 때가 되지 않았나?”
“더러 들어는 봤지. ‘너나 잘해라.’”
“... 정답.”
도훈의 담담한 말에 영배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딱 두 번밖에 못 뵀다만, 너희 아버님만큼 개성 강한 분도 흔치 않아.”
“그렇긴 하지.”
“도연이는? 걔는 잘 지낸대?”
“바쁜가 봐. 안 그래도 아까 전화했었는데 안 받더라고.”
“다음 달에 코스모스 졸업이던가? 인턴 한댔지?”
“응. 회사 이름은 안 알려줬는데, 4대 보험 다 된다는 걸 보면 괜찮은 것 같아.”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게 어디냐.”
“그러니까.”
차는 곧 시청 주차장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한 공중파 방송국 로고가 붙은 승용차를 발견했다.
“벌써 왔나 본데?”
“그러게.”
“기다리게 했다고 기사 나쁘게 쓰면 어쩌냐?”
“우리가 늦은 거 아니야. 아직 다섯 시 안 됐어.”
순심이를 데리고 청사 현관을 향해 걷던 두 사람은 저만치 앞에서 전화통화를 하는 젊은 여성 하나를 발견했다.
여성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가운데, 도훈과 영배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 어디서 본···.”
“... 왜 낯이 익지?”
도훈과 영배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때마침 다른 쪽을 보며 통화하던 여자가 몸을 돌렸고,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날씬한 몸매에 갸름한 턱선, 하얀 피부에 부드러운 눈매, 어깨까지 내려온 풍성한 머릿결.
상당한 미인임과 동시에 도훈에게 단박에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매력적인 용모의 주인공은···.
“... 야, 저 사람···.”
“... 도연이?”
도훈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와 똑 닮아 아버지가 목소리 한 번 높인 적 없이 애지중지하시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이라 도훈 자신도 끔찍하게 여기는 동생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어? 오빠들!”
통화하던 동생도 도훈과 영배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도훈이 하도 예뻐하는 동생이라 영배와 진주도 도연을 여러 번 만났었다.
전화를 끊고 빠르게 달려온 도연은 오빠와 반가운 포옹 같은 걸 하는 대신 냉큼 쪼그려 앉아 순심이를 쓰다듬었다.
“순심아, 오랜만이야!”
왈왈! 왈왈!
순심이가 열렬히 꼬리 치며 달려들었고, 도연은 순심이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 오빠보다 개가 더 반갑냐?”
“에이, 오빠는 가끔 전화통화라도 하잖아.”
해맑게 웃는 동생의 모습에 어이없다는 표정이면서도, 도훈은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오랜만이에요, 영배 오빠.”
“그래. 잘 지냈냐?”
“네. 언니랑 애들은 어때요?”
“잘 지낸다. 선아는 다시 학원에 나가고 민욱이, 민지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큰다. 이젠 둘을 한꺼번에 안으면 팔이 떨어질 것 같아.“
“호호!”
영배와 인사를 마친 도연의 시선이 도훈을 향했다.
“연락도 없이 어떻게 된 거야? 아니, 그보다 너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호호! 오빠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지. 그리고 일 때문에 그래.”
머쓱한 표정으로 얼버무리는 동생의 모습에 도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는데, 청사 현관에서 누가 나타나 빠르게 다가왔다.
그 남자를 발견한 도연이 움찔 놀라더니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말을 이으려 했다.
“오빠, 내가 오빠한테 급히 설명할 게···.”
“어, 김 기자! 벌써 시장님 만났네?”
“... 있는데···.”
“......”
아무래도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듯한 젊은 남자.
지금 중요한 건 그가 아니라 그가 한 말이었다.
“... 김 기자?”
“... 기자~ 아?”
“호호. 그, 그게 있잖아.”
“......”
도훈과 영배의 멍한 시선에 도연이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이 사태를 촉발한 남자가 다가와 서더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인터뷰하기로 한 ITS 사회부 최승범 기자입니다.”
“......”
“하하, 제가 인터뷰 준비하다가 저희 수습 김도연 기자가 시장님 동생이란 걸 알고 일부러 동행을 청했··· 습···.”
“......”
자신에게 시선도 안 주는 도훈과 영배의 표정을 본 남자도 뒤늦게 뭔가 이상함을 알아챘다.
“... 하, 하하···.”
어색하게 웃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고, 굳어진 표정의 도훈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기자?”
“......”
“기자~ 아?”
“오, 오빠. 그, 그게 말···.”
도연이 뭔가 설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도훈의 표정을 보니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김도연.”
“... 응, 아, 아니 네.”
“따라와.”
싸늘하게 굳은 얼굴의 도훈이 성큼 걸음을 옮겼고 순심이를 안은 도연이 고개를 푹 숙이고 얼른 뒤를 따랐다.
현관에 남겨진 영배와 기자 양반이 머쓱한 표정으로 남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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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시장실.
소파에 앉은 도훈이 여전히 싸늘한 표정인 가운데 그 옆에 동생 도연이 마치 이등병처럼 각을 잡고 앉아 있었다.
“... 그러니까 4대 보험 다 된다는 그 회사가 ITS였다?”
“그, 그렇다니까.”
“... 까?”
“아니, 그, 그렇습니다!”
좀처럼 동생에게 화를 내지 않는 도훈이지만, 일단 화를 내면 봐주는 게 전혀 없었다.
자세는 물론이고 말투까지.
대학 졸업을 목전에 둔 데다가 어엿한 직장인이기까지 한 도연이지만 오빠 앞에서는 꼼짝도 못 했다.
그녀에게 도훈은 단순한 오빠가 아니라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업어 키운’ 반쯤 엄마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인턴이 아니고 수습기자시라고?”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아시냐?”
“... 아, 아니요.”
“... 휴우.”
움찔!
도훈이 한숨을 푹 내쉬자 도연의 자세에 좀 더 각이 잡혔다.
“왜 속였어?”
“소, 속인 건 아니··· 에요. 다, 다 밝히지 않은 것뿐이지··· 요.”
“말장난할래?”
“... 아니요.”
“왜 다 밝히지 않았어?”
“... 이럴 것 같아서요.”
“... 이런다는 게 뭔데?”
“화내고 있잖아요.”
“......”
도훈의 아버지나 도훈이나 도연을 끔찍하게 아끼는 건 마찬가지.
번듯한 남자에게 시집가 행복하게 살라는 시대착오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도연이 뭐가 됐든 좋은 직장에 들어가 평온한 생활을 하길 바랐다.
공중파 방송국인 ITS라면 좋은 직장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할 터.
다만,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기자는 일이 힘들고 험하기로 유명한 직종.
자신이 힘든 일 없이 평탄하게 살길 바라는 아버지나 오빠가 일단 말릴 거라는 걸 도연은 잘 알았고, 그래서 합격한 이후에도 차마 말을 못 했던 것이다.
“어쩌다 보니 기자가 된 거냐 아니면 되고 싶은데 말을 안 했던 거냐? 나 너 기자 되고 싶다는 얘기 들은 기억이 없는데?”
“후자요.”
“... 언제부터?”
“대학교 1학년 때요.”
“......”
도연의 전공은 사학(史學).
대학에 가기 전까지 그녀의 꿈은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중국의 뻔뻔스러운 동북공정을 물리치고 정권 잡았다고 우리 현대사를 제 마음대로 다시 쓰는 짓거리를 못 하게 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 포부를 품고 도훈이 나온 K대와 엇비슷한 Y대 사학과에 들어가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닌 도연이었다.
‘... 그러고 보니 대학에 들어간 이후 다른 건 몰라도 꿈에 관한 대화를 한 적이 없네.’
도훈이 때늦은 후회를 했다.
역사학자의 꿈을 가졌던 동생이 대학원을 안 가고 인턴을 한다고 얘기했을 때 좀 의아하긴 했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런데 인턴도 사실이 아니고 기자를 ‘떡’ 하니 하고 있을 줄이야.
‘... 일은 이미 벌어졌다. 되돌릴 수는 없어.’
외모는 어머니를 쏙 빼닮았지만, 동생도 아버지 딸이라는 건 ‘성격’에서 증명된다.
한번 결정하면 웬만해서는 되돌리지 않는 건 아버지나 도훈, 도연 남매가 다 똑같았으니까.
“휴우···.”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고 도연의 어깨가 움츠러들던 순간.
똑똑!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영배가 안으로 들어섰다.
“저기, 도훈아.”
“... 왜?”
“밖에 기자가 기다리는데···.”
“......”
“약속한 시각이 30분 넘게 지났어.”
“... 휴우···.”
또 한숨을 내쉰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1분 있다가 나갈게.”
“알았어.”
영배가 나갔고 도훈이 동생에게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얘기는 나중에 하자.”
“... 네.”
“넌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 알았지?”
“아니, 그, 그게···.”
“당장 아버지께 갈래?”
“... 아, 아니요.”
도훈이 몸을 일으켰고, 도연도 자세를 풀고 얼른 따라 일어났다.
문 손잡이를 돌리려던 도훈이 동생을 돌아보고 물었다.
“아까 저 사람이 널 일부러 데리고 왔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냐?”
“네.”
“기자 양반에게 감사부터 해야겠네. 그 사람 덕분에 동생 직장을 정확하게 알게 됐으니.”
도훈이 표정을 풀고 말하자, 도연도 조금은 긴장이 풀렸는지 눈치를 보며 대꾸했다.
“아닌 게 아니라 좋은 선배예요.”
“좋은 선배?”
“아, 제 학교 선배이기도 해요. 기자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고.”
“... 어떻게?”
“진실에 눈감지 않고 약자의 목소리에 늘 귀 기울이는 기자가 되려고 노력한달까요?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말없이 실천하는··· 뭐, 그런 스타일이에요.”
“흐음?”
도훈이 빤히 바라보자 도연이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존경할 만한 선배거든요. 학번 차이가 많이 나긴 하는데, 저 1학년 때 학교에 와서···.”
도연이 뭐라 이야기했지만, 도훈의 귀에는 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온 정신을 붙든 것은 ‘1학년 때’.
‘... 아까 저 녀석이 기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게 1학년 때라고 했지. 그렇다면, 문밖의 기자 놈이···.’
동생을 험난한 기자의 길로 꼬신 원흉일 수도···.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도훈의 머리에서 일순 ‘이성’이 사라졌다.
벌컥!
도훈이 갑자기 문을 열고 비서실로 나서자, 소파에 앉았던 남자가 접대성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시장님.”
“... 네.”
“하하,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ITS 사회부 최승범 기자입니다.”
웃으며 손을 내민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
어디서 본 듯하다는 건 지금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 반갑습니다.”
싱긋.
도훈도 웃으며 남자의 손을 마주 잡았다.
기자가 도훈의 미소가 전혀 호의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구면···.”
우두둑!
“끄아아악!”
최 기자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살벌한 미소를 머금은 도훈이 전심전력으로 오른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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