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34화 (35/279)

34. 조상님의 출장.

토요일 아침, 대흥시청 비서실.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도훈과 비서실 직원 전원이 출근한 상태였다.

모두가 소파에 모여앉은 가운데, 영배가 조금은 신난 표정으로 ‘썰’을 풀고 있었다.

“... 그래서, 그다음에는요?”

“순찰차 불러서 지구대로 갔죠. 그 자식, 자기가 때린 사람이 경찰관, 그것도 지구대 팀장이란 걸 알고는 사색이 되더라고요.”

“흠, 운이 좋았네? 그 청년이 도망가려고 안 하고, 그냥 종이가방을 깜빡한 것뿐이라고 둘러댔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건데.”

“맞아요, 실장님. 전 그것까지 기대하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자식이 순간 당황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술 때문에 머리가 안 돌아가서 그랬는지 도망가려다 경찰까지 때렸으니 사실 운이 좋았죠.”

“세상에···.”

기가 찬다는 표정의 고정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뭐, 안 그래도 지구대 가서는 둘러대더라고요. 자기가 술김에 당황해서 그런 거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영배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으스댔다.

핸드폰 액정에는 녹음 앱이 띄워져 있었다.

“녹음했어?”

“하하, 물론이죠.”

어제, 영배는 연락도 신경 안 쓰고 술을 마시려 했던 게 아니라 둘의 대화를 녹음하려고 핸드폰을 내려놨던 것이다.

피식.

듣고만 있던 도훈이 웃었고, 영배도 마주 웃었다.

그 미소의 의미는 두 사람만이 알 터.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경찰서로 넘겼어요. 폭행은 확실하고, 뇌물공여 혐의는 충분한데 그건 지구대에서 따질 일이 아니니까요.”

“하···.”

어제저녁 집 앞 슈퍼 평상에서 동생이 생긴 영배.

그 동생을 의심하다 폭행에 ‘뇌물공여’ 현행범으로 붙들려가게 했다.

기록적으로 짧은 형제의 연이라 할 수 있을 터.

“아이고, 저 경찰서 갔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서 와이프한테 맞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영배가 엄살을 떨었고 기가 찬 표정의 정임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걔가 취업 청탁을 했단 거잖아요? 백화점 상품권 100만 원어치를 대가로 말이에요.”

“어허, 그런 말씀 마세요. 전 능력 밖이라고 얘기했을 뿐이에요. 그 상품권은 뒤져서 나오기 전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고요.”

두진이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취업이 목적이 아니라 엮으려고 했던 거겠지. 조 비서관이 그 종이가방에 손대거나 술김에 챙겨가기라도 했으면 덜컥이지, 뭐. 아마 분명 동영상을 찍었을걸?”

“맞습니다. 그 녀석이 평상이 잘 보이는 곳에다 차를 주차해 놨었대요. 블랙박스에 잘 찍혔다더라고요.”

“그걸 편집하면 충분히 의심할 근거가 되겠네. 현장에서 잡았으니 망정이지. 위험할 뻔했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두진이 질문했다.

“근데 왜 하필 최 팀장을 불렀어?”

“그 양반이 우리 동네 사시거든요. 요란하게 112 부르는 것보다는 그분이 낫겠다 싶었죠.”

“허,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며칠 전에 동네 슈퍼에서 우연히 만나서 맥주 한 잔 같이 마셨습니다. 알고 보니까 최 팀장님네 늦둥이 딸이 제 와이프가 가르치는 학원에 다니더라고요. 중 1인가 그럴 겁니다.”

최 팀장은 두진과 친분이 있는 지구대 경찰관으로 재민이네 아빠 일로 영배와 안면을 익혔다.

늦둥이 딸의 일도 있겠지만, 그와 친해진 건 영배 특유의 친화력이 큰 역할을 했다.

“다 신기한데, 조 비서관님이 눈치를 챘다는 게 제일 신기해요. 도대체 어떻게 그 애가 의도를 갖고 접근했다는 걸 알았어요?”

“하하, 제가 한때 검사 꿈꾸던 사람입니다. 그 정도야, 뭐···.”

“그래서 어떻게 눈치챘느냐고요?”

“간단합니다. 시장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데, 시장 비서를 알아본다? 이상하잖아요? 하하.”

“오호?”

정임의 말에 영배가 웃으며 으스댔지만, 그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당해본 적이 있어서 그래요.”

“네? 당하다니요?”

“야, 도후···. 아니, 시, 시장님!”

영배가 화들짝 놀라 도훈을 말리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예전에 싸고 근사하게 모신다는 삐끼한테 속아서 깡패들이 하는 룸살롱에서 돈 뜯겼거든요. 왜 예전에 있었잖습니까? 취하게 한 다음에 빈 병 잔뜩 보여주고 이거 다 네가 마신 거라 하고 돈 뜯는 수법.”

“아하?”

“경찰이 수사해서 나중에 상당액을 돌려받긴 했는데, 그때 된통 당하고 흑심 품고 접근하는 남자 대처법은 제대로 배웠죠.”

“......”

“하하하하!”

한바탕 웃음이 터졌고, 영배는 분한 눈빛으로 도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 제 아픈 과거사를 손수 밝혀주시고···. 정말 고맙습니다, 시장님. 저도 시장님 과거 좀 아는데···”

영배의 어설픈 위협(?)은 도훈에게 통하지 않았다.

“아, 생각난 김에 다른 얘기도 할까요?”

“어머? 또 있어요?”

“갑자기 조 비서관의 과거가 무척 궁금해지는데요?”

정임에 홍영진까지 그런 반응을 보이자, 영배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양손을 합장해 앞으로 내밀었다.

“... 살려주세요.”

“하하!”

다시 모두가 웃었다.

정반대 상황이 될 수도 있었지만, 모두가 웃는 이 아침은 영배가 슬기롭게 대처한 결과였다.

언제 어디서나 친근한 웃음을 흘리고 다니지만, 영배는 어수룩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걸 도훈은 잘 알았다.

‘웃기만 하는 푼수가 실제로는 전혀 푼수만은 아니라는 걸 알면 좀 달라지려나?’

아직 시청 직원 대다수는 영배를 편히 대하지 못했다.

물론 전보다 나아지기는 했다.

‘앞으로도 나아지겠지.’

영배를 보며 도훈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신중한 표정의 두진이 입을 열었다.

“조 비서가 타겟이 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시장님을 노린 걸 겁니다.”

“당연하죠. 저 같은 비서 따위 왜 노리겠습니까?.”

“이건 확실한데, 누가 그랬는지가 문제로군요.”

도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영배가 동감이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제 그 녀석, 경찰서 가면 곧바로 줄줄 불 줄 알았는데, 안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경찰이 수사하면 뭔가 나오겠죠.”

정임의 말에 두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기대 안 하는 게 좋아. 술 마신 상태에서 실수한 거라고 우기면 경찰이라고 별수 있겠나?”

“어머, 그럴까요?”

“그 젊은 녀석이 전과도 없는 초범이면 경찰도 딱히 압박할 수단이 없을 거야.”

“... 세상에.”

“시장 비서에게 취업 청탁하는 거 심각한 일이지만, 남 일이 아닌 자기 일이었고 좀 어수룩하고 장난 같은 면이 있잖나.”

두진의 말에 영진도 공감을 표했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이건 범죄보다는, 민심을 자극하기에 적당한 소재라는 느낌이 훨씬 강하게 듭니다.”

듣고만 있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뭐, 그건 경찰의 문제고요. 우리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그렇죠.”

“조 비서관을 노렸다는 건 여러분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어우···.”

듣기만 해도 섬뜩하다는 표정으로 정임이 진저리를 쳤다.

정도는 다르지만, 도훈을 제외한 모두가 비슷한 표정이었다.

“저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서 여러분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

“경찰이 잘 수사해서 배후나 책임 소재를 밝히면 좋겠는데, 그건 나중 일이고···. 비슷한 일이 다시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누구냐?’가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

“저도 더 조심하겠지만, 여러분 모두 자기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써주세요.”

도훈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각기 한 마디씩 말을 했다.

“전 퇴직 전에도 까칠하게 굴어 적이 많아서 자기 관리가 생활화된 사람입니다.”

“저도 허투루 비서실 생활한 거 아니에요.”

“... 전 좀 소심해서요. 꼬투리 잡힐 짓은 애초에 죽어도 못 하는 사람입니다.”

도훈의 미안함을 덜어주려는지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두진, 정임, 영진에 이어 영배도 한마디 했다.

“... 전 하던 대로만 하면 괜찮겠죠?”

“좋을 대로 하게. 대신에 앞으로 자네 칼퇴근은 없을 줄 알아.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더니···. 쯧쯧.”

“......”

“하하하!”

“호호!”

두진의 말에 본전도 못 찾은 영배가 식겁한 표정으로 침묵했고, 모두가 웃었다.

“그나저나 누굴까요?”

정임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모두가 비슷한 표정을 했다.

담담한 표정의 도훈이 매끈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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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대흥 지구대 본서인 금산경찰서 형사과.

소란스러운 금요일 밤이 지나고 피곤한 표정의 형사들이 아침 회의를 하고 있었다.

“... 어제 들어온 건 다 정리했지?”

“다 하고 하나 남았습니다, 팀장님.”

“응? 하나? 뭐?”

“그 대흥시장 비서···.”

“아, 상품권?”

“네.”

영배에게 불순한 목적을 갖고 접근했던 청년은 일단 ‘폭행’으로 입건되어 경찰서로 넘어왔다.

폭행이라고 해도 딱 한 대 얼굴을 때린 것뿐이니 지구대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폭행보다 더 중요한 게 ‘뇌물공여’ 미수.

대상이 시장 비서관이고 혐의자를 붙잡은 사람이 비번인 경찰인 데다가, 시장 비서관이 혐의자와의 대화 일체를 녹음까지 했다.

당연히 경찰서로 넘길 수밖에.

“그 자식, 아직도 술김에 그랬다고 뻗대고 있나?”

“글쎄요. 새벽에 물어보고 바쁘다고 뒤로 미룬 이후로는 그냥 자게 내버려 둬서···.”

문제의 청년은 지구대와 형사과에서 한 번씩 조사를 받았지만, 술김에 충동적으로 그랬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신원 확인을 해봤더니 전과는 없지만, 중학생 때부터 학교 폭력 등의 이유로 경찰서를 여러 번 들락거린 전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경찰서에 넘겨진 뒤 오히려 안정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혐의자 주장을 듣고 ‘그래, 알았다.’하고 내보낼 수도 없어 바쁘다는 핑계로 일 처리를 뒤로 미뤘다.

그런데도 혐의자는 형사과 구석에서 편히 자는 상황.

“... 어떻게 할까요, 팀장님?”

“젠장맞을···.”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은 팀장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청년이 사실을 실토하게 할 방법이 딱히 없었으니까.

“...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고 내보내. 입건은 하고.”

“...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 뾰족한 수 있어?”

“......”

말없이 팀장 앞에서 물러난 형사가 구석에서 의자에 기대 자던 청년을 깨웠다.

“음냐. 이제 나가도 돼요?”

천연덕스럽게 눈만 뜨고 묻는 청년의 모습에 형사는 목구멍까지 치솟은 욕을 간신히 내리눌러야 했다.

“마지막 확인만 거치면 나가도 된다.”

“음, 얼른 물어보세요. 배고프네요.”

미간을 찌푸린 형사가 인상을 썼고, 청년이 눈치를 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순간, 뭔가가 청년의 몸속으로 쏙 들어갔지만, 청년도 형사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정말 너 혼자 한 거야?”

“미쳤습니까? 나 혼자 그런 뻘짓을 하게?”

“... 뭐?”

청년은 여전히 천연덕스러운데 형사가 오히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다, 다시 말해 봐. 그러니까 너 혼자 한 거 아니라고?”

“네. 누가 시켰어요.”

“... 진짜냐?”

“네.”

“......”

잠시 말없이 눈만 깜박이던 형사가 정신을 수습했다.

“누가 시켰어?”

“중고등학교 동창 삼촌인데 상품권 주면서 시장 비서랑 좋은 그림 좀 찍어오라고 하더라고요.”

“... 정말이지?”

“네. 그 양반 만나서 얘기하는 거 여러 군데 CCTV에 찍혔을 거거든요. 그거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CCTV? 어디 어디?”

“그러니까···.”

청년의 차분한 이야기는 형사의 핸드폰에 그대로 녹음되고 있었다.

청년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다른 형사들도 여럿 와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그래서 너한테 이 일 시킨 그 사람이 누구야?”

“이름은 모르겠고 황 부장이라는 양반인데요. 내가 만난 건 그 사람이지만, 정작 시킨 사람은 따로 있을 걸요?”

“황 부장? 어디 부장인데?”

질문하는 형사는 물론, 둘러선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살짝 눈빛은 흐리지만, 여전히 천연덕스런 청년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대흥시에 있는 신흥 건설이라는 회산데요.”

형사들의 표정이 심각해진 가운데, 누군가가 힘겨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 끙! 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감히 조상을 이렇게 고생시켜. 아이고, 기운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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