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33화 (34/279)

33. 사람 잘못 봤어.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시장님이 하셨죠. 자, 건배하죠.”

쨍.

실내 포장마차 구석 자리에 앉은 도훈, 두진, 정임, 영진이 잔을 부딪쳤다.

작은 냄비에 담긴 어묵탕이 가운데 놓였고, 꼬치에 닭발 등 소박한 안주를 놓고 벌이는 비서실의 첫 회식.

그것도 따로 계획을 잡아 하는 게 아니라 일정 끝나고 생각난 김에 충동적으로 벌이는 회식이었다.

“조 비서관이 없는 게 아쉽네요.”

“정말 아쉬운가, 고 주무관?”

“어휴, 실장님. 회식 자리에서까지 주무관, 주무관 하실 거에요?”

“사람 참. 그래, 정임 양. 영배 군 없어서 아쉬워?‘

“에이, 정임 양은 너무 나가셨고요.”

“아, 어쩌라는 거야!”

“하하하!”

두진의 푸념에 모두가 웃었다.

정임이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띄워서 그런지 모두가 편히 웃을 수 있었다.

30분쯤 전 마무리한 민원 담당 직원들과의 저녁 식사자리.

도훈은 처음부터 최대한 부드럽게 직원들을 대했지만, 작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직원들이 굳어있었다.

그나마, 도훈이 꿋꿋하게 웃고 두진과 정임이 직원들과 섞여 열심히 활약한 덕분에, 자리는 점점 훈훈해져 마칠 때는 모두가 미소를 교환하며 헤어질 수 있었다.

어쨌든 쉽지 않은 자리였다.

웃으며 직원들과 인사하고 돌아선 모두가 진이 빠진 표정을 했고, 그런 비서실 직원들을 안쓰럽게 여긴 도훈이 제안해 즉석 회식이 이루어졌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정임 씨. 한잔 받으세요.”

“호호, 영광입니다.”

정임이 회식 얘기에 반색하는 걸 보고, ‘아기’ 혹은 ‘집에 일찍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일절 꺼내지 않는 도훈.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가 있다지만, 엄마도 육아에서 해방되어 마음 편히 술 마실 권리가 있다는 걸 도훈은 잘 알았다.

절친 진주도 있고 절친 와이프 선아도 있으니까.

이런 날, 괜한 얘기 꺼냈다가 어떤 대접을 받는지 이미 몸(?)으로 체득했달까?

“홍 주무관님도 한잔 받으세요.”

“... 저는 영진 씨라고 안 불러주십니까?”

“에이, 저보다 한참 연상이신데, 그건 결례죠.”

“하하, 그렇습니까?”

전보다는 많이 경계를 낮춘 모습의 홍영진.

새벽에 단둘이 대전에 몰래 다녀왔다는 ‘비밀’을 공유한 게 큰 영향을 끼쳤지만, 도훈은 영문을 모르고 이런 변화를 반가워할 뿐이었다.

회식하자고 했더니 기사는 항상 멀쩡히 대기해야 한다며 빠지겠다던 그는, 도훈이 ‘홍 주무관 없으면 안 한다’고 땡깡을 부려 운전대 대신 술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오늘 어떠셨어요?”

“글쎄요.”

정임이 묻자 도훈이 쓰게 웃었다.

오늘 도훈은 민원 담당 직원들에게 업무에 임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을 당부한 뒤 그들의 고충을 들었다.

원칙이라고 해봤자 특별한 건 없었다.

“행정은 도깨비 요술방망이가 아니고 공무원이라도 우리가 만능은 아닙니다. 분명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있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 솔직해라.

- 숨기지 마라.

- 변명하지 말고 먼저 경청해라.

그런 원칙을 말한 뒤, 직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여러분이 그 원칙을 지키면, 결과가 어쨌든 모든 책임은 제가 집니다.”

도훈의 말에 직원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장이면, 정치인이면, 의례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다만, 직원들이 좀 더 신뢰를 보낸 건 도훈이 압수수색 때 보인 모습 때문일 터.

‘그 일이 이렇게도 영향을 줄 줄은 몰랐지.’

그 뒤 도훈은 자신이 말한 원칙을 실천했다.

분위기가 좀 풀린 뒤부터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의 고충을 경청했으니까.

“참,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도훈의 말에 다른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는 시민의 민원을 빠르고 속 시원하게 처리, 해결해주지 못하는 관공서와 행정 시스템이 문제지만, 그 숱한 민원을 접수하고 처리하는 직원들의 어려움 역시 가볍지 않으니까.

- ... 모든 시민을 진심으로 대하는 게 맞죠.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너무 진심을 다하면 공무원 생활 오래 못할 것 같아요. 정말 한도 끝도 없거든요.

도훈은 살짝 술기운이 오른 얼굴로 울먹이던 노인복지 담당 3년 차 직원의 모습을 되새겼다.

그 여직원은 담당하던 분이 ‘고독사’를 하는 바람에 최근 심하게 마음고생을 했다고 다른 직원들이 설명했었다.

대도시에서나 이따금 고독사가 발생하는 줄 알았던 도훈도 꽤 놀랐다.

“이유리 주무관 생각하세요?”

“... 네.”

“모두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건 아니에요, 시장님.”

“그렇겠죠.”

“사람을 상대하는 거니까 당연히 어려운 겁니다. 경찰서나 소방서 민원실 같은 곳은 저희보다 훨씬 심할 테고요.”

“저도 압니다.”

정임과 영진의 말에 도훈이 답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두진이 입을 열었다.

“꼭 민원 업무에서가 아니더라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마음을 다치는 일은 누구나 경험합니다.”

“네.”

“그걸 잘 추스르거나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조직이 되어야 하는데···.”

“......”

두진의 탄식과도 같은 말에 모두가 한동안 침묵하던 중 정임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조 비서관이 없으니까 분위기가 잘 안 사는 것 같아요.”

“그 친구가 항상 밝긴 하지. 좀 대책 없이 밝기만 한 것도 같지만.”

“연락해볼까요?”

“지금? 놔둬. 요새 계속 야근했으니 쉬어야지.”

두진의 말에 도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시장님?”

“아니, 그게···.”

“그게 뭐요?”

도훈이 쓰게 웃고 말을 이었다.

“갑자기 그 인간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쉬고 있을지 의심이 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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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영배의 집 근처 슈퍼 앞 평상.

“진짜야?”

“네. 시청에서 곧 공고를 낸다던데요? 아니에요, 형님?”

“글쎄. 모르겠는데.”

얼굴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제법 친해진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

고개를 갸우뚱하는 영배의 옆에 청년이 찰싹 달라붙어 뭔가를 소곤거리고 있었다.

“에이! 동생한테까지 그런 거 속이면 섭섭하죠.”

“아니, 정말 몰라서 하는 얘긴데···.”

불과 30분 만에 동생이 생긴 영배.

친화력 좋기로 유명한 영배였지만, ‘이정우’라는 이름의 청년도 만만치 않았다.

첫 캔에 통성명하고 두 번째 캔에 말 놓고, 세 번째 캔에 ‘호형호제’를 했으니까.

그런 ‘동생’과의 술자리가 꽤 즐거웠는지 딱 세 캔만 마시고 가려던 영배가 여전히 마시고 있질 않은가.

“거 참, 이상하네.”

“이상하긴 뭐가요?”

영배가 어리둥절한 이유는 동생이 막 언급한 것 때문이었다.

조만간 시청에서 채용 공고를 낼 예정인데 자기 좀 잘 봐달라는 그런 부탁.

말하자면, 취업 청탁을 받은 셈인데 청탁은 둘째치고, 영배가 알기로는 직원채용 예정이 전혀 없었다.

“푸우! 나 정말 못 들어봤다니까?”

“아, 틀림없이 공고 나온다니까요!”

혀가 살짝 꼬인 영배가 의아해하는데, 청년은 확실하다고 우겼다.

캔맥주와 쥐포를 두 번이나 더 샀을 정도로 술을 마신 영배.

중간에 화장실도 다녀왔을 정도로 열심히(?) 술을 마셨다.

새로 생긴 동생도 엇비슷하게 술을 마셔 둘 다 살짝 알딸딸해진 상태였다.

그래도 기억에 없는 채용 계획이 생겨날 정도로 취한 건 아니었다.

“내가 알기론 정직원이고 계약직이고 직원채용 예정이 없는데?”

“형님이 못 보고 빠뜨렸겠죠. 아니면, 아직 시장님께 보고가 안 됐거나요. 아, 시청에 부서가 몇 갠데 형님이 그걸 어떻게 다 꿰겠어요?”

“... 그런가?”

“에이,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러죠.”

영배가 가만히 뒤통수를 긁었고, ‘동생’은 아주 친근하게 웃어 보였다.

“웃지 마, 징그러워.”

“하하! 이렇게라도 웃고 살아야죠. 안 그래요?”

“그렇긴 하다. 후후.”

지금은 웃고 있지만, 불과 조금 전까지 청년은 취업도 못 한 팍팍한 자기 인생을 푸념했고, 영배도 빡센 비서 생활을 푸념했다.

처음 본 사이지만, 그 푸념은 둘 사이에 묘한 공감대를 형성했고 술이라도 신나게 마시자며 속도를 높이게 했다.

그 결과, 초장부터 ‘형님’하고 친근하게 나오는 청년에게 어색하게 웃던 영배가 지금은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어쨌든, 간만에 긴장감을 내려놓고 술을 마시는 영배였다.

영배가 비서가 된 뒤에는 항상 손에서 놓지 않던 핸드폰을 등 뒤에 내려놓고 있는 건 누구한테서 연락이 와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살짝 눈이 풀린 청년이 발갛게 변한 얼굴을 영배 얼굴 앞에 들이밀고 말을 이었다.

“형님이 잘 봐주실 거라고 믿어도 되죠?”

“내가 잘 봐준다고 도움될 게 전혀 없는데?”

“에이, 형님 시장 비서관이잖아요.”

“그건 맞지만··· 내가 직원 뽑는 거 아니거든.”

“형님의 말 한마디면 웬만한 과정은 다 통과일 건데요?”

“... 하하.”

영배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생긴 동생이 아까부터 취업 좀 잘 부탁한다느니, 그 대단한 시장의 절친에 비서관인데 못할 게 뭐냐느니 하는데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였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정말 시청에서 구인 공고가 나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어.”

“그럼 구인 공고가 안 나왔을 때 취직시켜 주는 건 돼요?”

“예끼! 그게 될 턱이 있냐!”

“에이! 할 수 있잖아요! 시장 절친인데.”

“그렇게 생각해?”

쓰게 웃으며 묻는 영배에게 청년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웬만한 사람은 다 그렇게 생각할 걸요? 괜히 시장 절친이 비서관 따위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따위? 그런가? 비서관 따위인가?”

“......”

영배가 씁쓸한 표정이 되자, 취직시켜달라 칭얼거리던 청년이 조용해졌다.

잠시 침묵하던 청년이 갑자기 평상에 드러누우며 소리쳤다.

“아, 형님도 안 되면 내 인생에 취직이란 날은 도대체 언제 온담!”

“쯧쯧. 야, 청탁 한 마디로 취직이 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인생은 ‘케바케’라고요.”

“... 케바케?”

“아, 케이스 바이 케이스요.”

“쯧, 틀린 말은 아니다만···.”

영배가 속상한 얼굴로 드러누운 청년을 가만히 토닥이다가 말을 이었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네.”

영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혼자 남은 청년이 가만히 주위를 살피더니 등 뒤에 놓였던 종이봉투를 영배가 앉았던 자리에 놔두고 일어섰다.

술에 취해 풀렸던 눈빛이 어느새 또렷하게 돌아와 있었다.

피식.

“껌이네.”

청년이 영배가 사라진 가게 옆 어두운 곳을 향해 웃으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형’, ‘형’하고 부르며 보이던 그 친근한 미소가 아니었다.

싸늘하고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자, 가볼까?”

청년이 전혀 술 취하지 않은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채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멈춰 서야만 했다.

웬 중년인 하나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앞을 막아섰기 때문에.

“뭡니까?”

“두고 보면 알아요.”

경계하는 청년에게 중년인이 답하는데 화장실에 간다던 영배가 어느새 돌아와 청년의 뒤에서 다가왔다.

전혀 휘청거림이 없는 멀쩡한 걸음이었다.

“어때요, 팀장님?”

영배는 청년이 아니라 중년 남자에게 친근하게 웃어 보이고는 말을 걸었다.

“자네 짐작이 맞는 것 같은데? 일단 저 종이봉투 안부터 살펴봐.”

움찔!

중년인의 말에 영배는 당황하는 청년을 외면하고 평상 위에 놓인 종이봉투를 살폈다.

위에는 잡동사니뿐이었지만, 밑바닥에 종이 뭉치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와! 어이 동생. 편의점 알바 해서 힘들게 산다는 사람이 어떻게 백화점 상품권을 뭉치로 들고 다녀?”

“그, 그게···.”

“이게 얼마야? 한 100만 원어치는 되겠는데? 요새 편의점은 월급을 상품권으로 주나 봐?”

당황한 청년이 마구 눈알을 굴리다가 잽싸게 내빼려던 순간.

척!

“비, 비켜요!”

“까불다 맞는 수가 있다.”

앞을 막은 중년인이 눈을 부라리며 하는 싸늘한 말에, 안 그래도 벌겋던 청년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비, 비켜요!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요!”

마음이 다급해진 청년이 마구 팔을 휘두르며 거칠게 항의했고, 그 와중에 그의 팔이 중년인의 얼굴을 쳤다.

퍽!

그 즉시, 중년인이 아주 능숙한 동작으로 청년의 팔을 꺾더니 바닥에 엎어뜨렸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청년의 귀에다 대고 중년인이 싸늘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을 폭행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뭐, 뭐?”

“지구대 가서 세세히 따져 봅시다. 어디 뇌물 공여죄도 추가되나, 안 되나.”

“......”

“선생님은 변호사를 선임할···.”

중년인이 미란다 원칙을 읊는 사이, 탁자 위에 놓였던 핸드폰을 들고 영배가 다가왔다.

엎어진 청년의 머리맡에 멈춰 선 영배가 가만히 쪼그려 앉았다.

히죽.

“어이, 동생.”

“......”

“너 인마, 사람 잘못 봤어.”

“......”

고개를 들어 영배의 손에 들린 핸드폰 액정을 본 청년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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