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영배의 칼퇴근.
금요일 아침, 시청 소회의실.
도훈부터 시작해 대흥시 소속 간부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감사팀장이 감찰 결과를 발표하고 있었다.
“확인 결과, 최문일 전 시의원과 모의한 것은 김영환 소장 하나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상수도 팀장, 관리팀장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이런 과정을 모르고 김 소장의 부탁, 혹은 지시를 받아 동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감사팀장의 말이 끝나자 부시장이 도훈에게 시선을 줬고, 도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가했다.
“김 소장은 대가로 뭘 받았답니까?”
“일단, 본인은 금품을 받고 거래한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식사자리에서 도와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았는데,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응했다고 하더군요.”
“그럼 김 소장 말고 다른 직원들은요.”
“그들도 금품이 오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좀 더 확인이 필요하긴 하겠습니다만.”
“그럼, 김 소장 말고 다른 직원들이 알았냐 몰랐냐의 문제로 돌아갑시다. 처음에는 몰랐다고 쳐도, 나중에도 그랬단 말입니까?”
부시장이 묻자 감사팀장이 답했다.
“그 부분까지 완벽히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만, 다만 정황상 이렇게 추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해보세요.”
“두 팀장은 김 소장으로부터 최 의원과 작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짐작은 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담당자 두 사람은 이렇다저렇다 말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흠, 알 수 없다?”
“네.”
“감사팀장은 담당자들의 가담 정도를 어떻게 판단합니까?””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전 사실 여부만 확인할 뿐입니다.”
“휴우, 알았어요.”
부시장이 탄식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고, 한동안 회의실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도훈이 감사팀장에게 앉으라 눈짓했는데, 감사팀장이 쭈뼛거리다 말을 이었다.
“저··· 김영환 소장이 오늘 아침 제게 사직서를 전해왔습니다.”
“사직서요?”
“네.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직하겠다고···.”
웅성, 웅성.
간부들이 술렁거렸고, 부시장 여성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쯧쯧쯧.”
여기저기서 간부들이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차는데, 누군가의 싸늘한 말이 모두를 다시 얼어붙게 했다.
“반려하세요.”
“... 네?”
“사직서 반려하라고 했습니다.”
“......”
“인사위원회 열리고 결과 나온 다음에도 그럴 생각이면 그때 내라고 하세요.”
‘낼 수 있다면 말이지.’
도훈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여성식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시장님.”
하지만 그는 도훈의 냉랭한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부시장을 침묵시킨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상하수도 사업소장과 상수도 시설팀장, 관리팀장을 오늘부로 대기발령 조치합니다.”
“......”
“담당자들도 같은 조처를 내리고 싶지만, 당장에 사업소 업무 공백이 걱정돼서 그렇게까지는 못하겠군요.”
“......”
“사업소장 업무는 하수도시설팀장이, 다른 두 팀은 팀의 선임이 팀장 역할을 당분간 병행하는 것으로 하죠.”
“......”
“감사팀장님은 감찰 결과 일체를 선관위와 경찰에 넘기고 수사 의뢰하세요.”
“... 알겠습니다.”
“인사위원회는 수사 결과 나오면 열겠습니다.”
“......”
“하실 말씀 있으신 분?”
도훈의 말에 여성식이 입을 열었다.
“시장님, 20년 넘게 아무런 흠결 없이 공직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너무 가···.”
“가혹하지 않냐고요?”
“네.”
“가혹하지 않습니다.”
“......”
도훈의 단언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개인적으로는 저도 안타깝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죠.”
“......”
“하지만 했습니다. 특정인의 선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시민을 속이는 얼토당토않은 짓을 말입니다.”
“실수···.”
“처음엔 실수였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실수를 늦게라도 바로잡지 않고 고의로 쉬쉬하고 덮어버림으로써 더는 실수가 아니게 됐죠.”
“......”
여성식은 말문을 잃었고 간부 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시장님께 안 좋은 이야기가···.”
“상관없습니다.”
“네?”
“발단은 제 임기 전이지만, 제가 시장일 때 진행된 일이기도 하니, 저도 충분히 비판받아 마땅하다고요.”
“......”
“더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휴우.”
단호하기 이를 데 없는 도훈의 말과 태도에 누구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냐는 듯 눈을 감고 침묵하거나 고개를 끄덕일 뿐.
“더 하실 말씀 없으면, 회의 끝내겠습니다.”
“......”
“감사팀장님은 비서실장님에게 보고서 제출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은 보고서에 근거해 사과문 초안을 잡아주세요.”
도훈의 말에 두진을 제외한 간부들이 다시 놀랐다.
부시장 여성식 역시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과문이요?”
“네. 시민들에게 사과할 일이잖습니까?”
“......”
“아닙니까?”
“... 맞습니다.”
“회의 끝내겠습니다.”
도훈이 두진과 함께 자리를 떴고, 구석에 앉았던 영배가 뒤쫓았다.
남겨진 간부들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제각기 중얼거렸다.
“허, 이것 참···.”
“쯧쯧쯧.”
“휴우.”
부시장 여성식은 그런 간부들의 표정을 차례로 훑고 있었다.
상당수는 도훈의 결정이 당연하다 여기는 듯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적지 않았다.
안타깝고 허탈한 듯한 얼굴.
뭔가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에, 경직된 채 말이 없는 사람.
여성식이 회유해다겠다고 계획했던 이들 중 여럿이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일이 되려니까 또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여성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다들 일하러 갑시다. 안타깝지만, 시장님 결정입니다.”
간부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부시장님.”
간부 하나가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지만, 여성식은 차분히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듯.
곧, 모든 간부가 자리를 떴고 여성식도 몸을 일으켰다.
“무슨 생각에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여러모로 고맙군.”
아무도 듣지 않는 가운데 여성식이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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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화 안 내십니까?”
시장실 문을 닫고 도훈이 입을 열자, 소파에 앉은 두진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저번엔 실수였지만, 이번엔 시장님 말씀처럼 실수가 아니니까요. 당연한 조치입니다.”
어느새 순심이가 익숙한 듯 두진의 옆에 앉아 있었고, 두진의 손이 천천히 순심이를 쓰다듬는 중이었다.
“다섯 명을 전부 대기발령 하시지 않은 건 잘하신 겁니다.”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겁니다.”
상하수도 사업소 팀장은 셋.
그중 둘이 이번 일과 관련돼 있었고, 경비직원 포함 열넷인 상하수도 사업소에서 한꺼번에 다섯이 빠지면 당장 업무 차질이 불가피했다.
“임기 시작 한 달도 안 됐는데, 안 좋은 일만 늘어나네요.”
도훈이 푸념하듯 말했고 두진이 쓰게 웃었다.
지난번 사방공사 일에 이번 일까지, 앞으로 열어야 할 인사위원회가 두 건이나 된다.
앞의 일은 실수니 인사위원회를 열어도 적당한 선에서 끝낼 수 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원래 좋은 일은 안 좋은 일에 비해 눈에 잘 안 띄는 법입니다.”
“그런가요?”
“네. 공직 사회는 좀 더한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공무원 대부분은 좋은 일, 잘한 일이 있어도 별로 유난을 안 떱니다. 주목받는다고 꼭 좋은 게 아니니까요. 그냥 고과에 기록되는 거로 만족하죠.”
“흠.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네요.”
“뭐, 공무원뿐 아니라 우리나라 조직 문화의 단점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도훈이 화제를 바꿨다.
“부시장님 말입니다.”
“네.”
“어떤 분입니까?”
“... 뭘 물으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에 실장님이 능력은 있고 어디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라 평하신 적이 있잖습니까?”
“그랬죠.”
“그 평가, 지금도 그대롭니까?”
“딱히 바꿀만한 건···.”
두진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도훈은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그제, 상하수도 사업소의 일을 끝마치고 도훈이 시청에 돌아온 얼마 뒤 자초지종을 안 여성식이 나타나 도훈에게 사과했었다.
시장 대행으로 제대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면서.
도훈은 맘먹고 숨긴 일인데 어찌 그것까지 알 수 있었겠냐며 넘겼는데, 당시의 부시장은 제법 화가 난 모습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문제의 직원들에게 강경한 태도였달까.
그런데 오늘 간부회의 때는 달랐다.
잘못한 직원들을 딱해 하면서 관대한 조치를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으니까.
말도 그렇게 했고.
‘상황에 따라 태도가 변할 수도 있다는 건데···. 내가 과민한 건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도훈은 또 화제를 바꿨다.
“저녁에 민원실하고 각 부서 민원 담당 직원들과 식사하는 거 말입니다.”
“네.”
“그 자리에 정임 씨가 참석하면 조 비서관은 오늘 일찍 퇴근시켰으면 합니다.”
상하수도 사업소 일로 민원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점검하고자 오늘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 자리에 영배를 빼고자 하는 건 피로가 쌓인 것 같아서였다.
계속된 야근도 야근이지만, 퇴근해 집에 돌아가도 공부할 게 많은 영배였다.
게다가 영배는 4살, 2살 애들까지 있으니 당연히 육아의 피로도 있을 터였다.
그 때문인지 맨날 도훈과 함께 출근하던 영배는 오늘 늦잠을 자고 지각했다.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온 칙칙한 얼굴로.
“그러시죠. 어차피 길어질 자리도 아니고, 고 주무관이 항상 먼저 퇴근하는 걸 면목 없어 하기도 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전 나가보겠습니다.”
“네.”
이 결정이 꼭 영배에게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두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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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
꿀꺽! 꿀꺽! 꿀꺽!
“푸핫!”
영배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 슈퍼 앞 평상.
캔맥주 세 개에 구운 쥐포 두 장을 산 영배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 평상은 영배가 혼자 술 생각이 날 때 종종 애용하는 곳으로 술은 캔맥주로 통일되어 있지만, 안주는 주머니 사정에 따라 구운 쥐포 아니면 마른오징어였다.
꿀꺽! 꿀꺽!
“크하! 맥주가 보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일찍 퇴근했던 영배가 밤 10시가 넘어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이유.
그건 퇴근하자마자 한잠 자고 일어났더니, 수업을 마친 와이프에게서 애들과 함께 진주네 집에서 놀다 가겠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나 마셔도 돼?’라고 물어 허락까지 받았다.
“휴우. 생각보다 쉽지 않네.”
기분 좋게 맥주를 마시던 영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영배가 비서관이 된 것은, 절친인 도훈을 혼자 시청에 들여보낼 수 없다는 이유 외에도 자기 손으로 뭔가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학원 강사도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쉬지 않고 오래 계속하다 보니 회의가 들었던 게 사실.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내가 도훈이 부추긴 게 맞지.’
도훈이 당선되자 영배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지금껏 보아온 도훈이 마음먹고 나선다면, 함께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그렇게 굳게 마음먹고 와이프와 역할 교대까지 하며 뛰어들었건만, 솔직히 아직은 하루하루 따라가는 것도 벅찼다.
“자식이···. 이 형 힘든 것 알고 용돈까지 챙겨준다는데···. 더 열심히 해야지. 쩝.”
영배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새 캔을 따는데, 누군가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저기 혹시 시장님 비서 아니세요?”
움찔.
깜짝 놀란 영배가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했다.
“누, 누구십니까?”
“아, 저 그냥 이 동네 사는 사람이에요.”
“아, 예. 안녕하세요.”
영배를 알아본 건 작은 종이봉투를 든 서른이 안 된 듯한 청년.
“맥주 드세요?”
“네.”
청년은 영배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없이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쟤?”
영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앉았는데, 청년이 나왔다.
맥주 세 캔과 구운 쥐포 두 장을 손에 들고.
그리고는 영배 옆에 앉아 맥주 캔을 따더니 영배의 눈앞에 캔을 들이밀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건배나 하시죠.”
“... 그, 그러죠.”
탁!
“내 취업을 위해 건배!”
갑작스러운 청년의 고함에 움찔한 영배가 바지에 맥주를 흘렸다.
‘에이, 씨.’
영배가 투덜거리든 말든 청년은 캔맥주를 들이켰고 영배도 뒤따랐다.
청년이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곁눈질하는 걸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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