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31화 (32/279)

31. 이거…. 잘하면…?

생각에 잠긴 도훈을 놔두고 직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고 있었다.

“범용필터로는 정수가 안 되는 거야?”

“아예 안 되는 건 아닌데, 완벽하지 않고 정수 효율이 떨어진다고 했던 것 같아. 필터 교체 주기도 감당할 수 없게 빨라야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같다고 하면 어떻게 해? 정밀검사 결과 어딨어? 서류를 보고 얘기하자고.”

“그래 그러자고. 그런데 귀찮긴 해도 그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완벽하지 않다는 말 어디로 들었어? 끓여서 마셔야 하는 건 똑같다고. 더구나 지하수 정화를 안 하면 나중에는 더 심해질 거 아니야.”

“허, 참. 이거 쉬운 문제가 아니네.”

소곤거리며 하나씩 확인해 가던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서류를 들고 와 테이블에 쌓아놓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흠···.”

“... 이런.”

“쩝.”

제각기 뭔가를 검토하던 직원들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오염된 지하수에 정수 필터를 설치하는 건 가장 일반적이고 효율적인 해결책이었다.

그 방법의 효과나 효율이 인정받았으므로 국가 부처가 ‘사업’으로 시행하는 것일 터.

하지만, 불행하게도 영한리 공용 지하수는 그 방식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당연히, 다른 해결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딱히 ‘이거다.’ 싶은 해결책이 찾아지지를 않았다.

직원들이 그러는 사이 한참 뭔가를 생각하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오염원 제거는 어떻게 됐습니까?”

“쓰레기는 치웠고, 오염된 공장 부지 흙은 최대한 파내 제거했지만, 지하수는 손대지 못했습니다. 전문업체에 문의했더니 비용이 기본 십억 단위라···.”

“식수만 문제가 아니라 정화도 해야 하는데 비용이 너무 크다는 얘기군요.”

“네.”

속으로 가만히 한숨을 내쉰 도훈이 또 생각에 빠졌다.

뾰족한 수가 없는지 다른 직원들도 이걸 찾아보고 저걸 찾아보며 대화하고 있었지만, 점점 말수가 줄어갔다.

“... 뭐 있어?”

“아니. 자네는?”

“쩝. 딱히···.”

“... 휴우. 이거 난제네.”

감사팀과 교대하고 나온 두진과 영진이 어느새 테이블 가까운 곳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두 사람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30년 넘게 공직생활을 하며 온갖 부서를 거친 두진이지만, 그도 하필 상수도 관련 업무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침묵이 오래 이어지던 어느 순간.

“아이고, 산 좋고 물 맑은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렇게 됐대. 옛날이 좋았지, 진짜.”

직원 하나가 푸념하듯 중얼거린 말이 도훈의 귀에 들려왔고, 그중 한 단어가 도훈의 뇌리에 콕 박혔다.

‘... 옛날이라··· 옛날. 가만, 옛날?’

도훈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뭔가 관련 있는 걸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뭐였지? 뭐였지?’

흐릿한 뭔가를 기억해내려 이마에 손을 짚은 도훈이 한참 끙끙댔다.

깜빡. 깜빡.

떠오를 듯 떠오를 듯하면서도 선명해지지 않는 뭔가에 도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고, 그런 도훈의 표정변화에 직원들의 숨소리가 작아지던 순간.

반짝!

도훈의 머릿속에 기어코 뭔가가 떠올랐다.

‘... 혹시 그거면?’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도훈이 고개를 들고 직원들에게 시선을 줬다.

“... 왜들 그리 긴장하고 있어요?”

“...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장님.”

자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던 도훈이 말을 이었다.

푸념이나 짜증이 아닌 뭔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오 계장님.”

“네, 시장님.”

“영한리, 지하수를 큰 물탱크에 끌어올렸다가 다시 각 가구로 전하는 방식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시장님.”

“그 물탱크 있는 곳 그림이나 사진 있습니까?”

“... 아마 있을 겁니다. 보시겠습니까?”

“네.”

직원이 컴퓨터 하나를 뒤져 사진을 띄웠다.

도훈이 물탱크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시설을 찍은 사진들을 신중히 살피며 뭐라 중얼거렸다.

“... 되려나? 괜찮으려나? 될 것도 같고···.”

영문을 모른 직원이 가만히 곁에 서 있길 얼마.

사진을 다 확인한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궁금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직원이 질문을 던졌다.

“... 뭔데 그러십니까, 시장님?”

“아, 영한리 지하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게 떠올라서요. 이건 잘하면 될지도 모르겠네요.”

“네?”

의아해하는 직원에게 도훈이 설명했다.

“우선, 상수도를 설치하는 건 최고의 대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 외진 곳까지 상수도 연결하면 영한리 주민이 부담해야 할 비용도 문제지만, 우리 시청이 부담해야 할 예산도 상당할 겁니다. 그렇죠?”

“네, 많이 들 겁니다.”

“그럼 좀 예전 방식이긴 한데, 지하수를 뽑아 정화해 그걸로 다시 지하수 자체를 정화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원이 영문을 몰라 하자, 도훈이 인터넷 창을 띄우고는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어디였더라? 청주? 아닌가? 청평? 여기도 아닌데···. 아, 창원이었나?”

몇 번의 실패를 거쳐 도훈은 찾던 것을 인터넷 창에 띄우는 데 성공했다.

“오 계장님, 이것 좀 봐주시겠습니까?”

“... 이건?”

도훈이 띄운 건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 지하수 오염 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어낸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해결방안.

모범 사례라고 선전하고 있긴 한데, 그 날짜가 10년 가까이 지난 예전의 것이었다.

직원이 신중하게 살피는데 도훈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하수를 뽑아 올려 정화하고, 정화한 지하수를 다시 지하로 흘려보내 지하수 자체도 정화하는 방식입니다.”

“......”

“이걸 응용하면 어떨까요? 뽑아낸 지하수를 정화해 사용한 다음, 남은 지하수를 흘려보내는 식으로 말입니다.”

도훈의 말에 직원이 신중히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 좀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건 범용필터를 쓰는 게 아니라 따로 정화 장비를 설치하는 거니까···.”

“정화 효율이 높을 것은 물론이고, 특정 오염물질에 집중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도훈이 웃었고 직원의 표정도 밝아졌다.

어느새 테이블에 앉았던 다른 직원들도 곁으로 와 모니터를 보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모든 환경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고 암반이 많거나 산지가 가까운··· 딱, 영한리 얘기네.”

“물탱크 하나 더 설치하고 정화 장비에···. 아, 관정도 하나 새로 뚫어야 하나?”

“그래도 십몇억에 비할 바는 아니지.”

“정화 장비가 얼마인지에 따라 달라지겠네. 다른 건 천만 원 좀 넘겠는데? 많아야 2천?”

“정화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비용도 적고···. 지하수도 계속 쓸 수 있고···. 맞지?”

“그런 것 같아. 이거 적용한 곳하고 영한리가 환경이나 조건도 비슷한 것 같고···.”

한참이나 모니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확인하던 직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 이거···.”

“... 잘하면···.”

“... 되겠는데···?”

직원들이 허리를 펴고 하나둘 도훈에게 시선을 줬다.

“... 왜 그러십니까?”

“이건 어떻게 생각해 내신 겁니까? 꽤 예전 일인데···.”

신기하다는 듯 묻는 직원에게 도훈이 답했다.

“임기 시작하기 전에 공부할 때, 전국 민원 해결 우수 사례를 살핀 적이 있거든요.”

“......”

“꽤 오래전 것부터 해서 살폈었죠. 그때 봤습니다. 바로 생각이 안 나서 한참 끙끙댔네요.”

“......”

직원들 모두 경탄스런 눈빛으로 말문을 잃고 있는데 도훈이 손뼉을 쳤다.

짝!

“자, 일합시다.”

“네?”

“이거 설치한 지자체나 업체에 연락해봐야죠.”

“아, 예.”

“영한리에 적용이 가능한지, 가능하면 공사 비용이나 기간은 얼마나 될지를 파악합시다. 얼른 이요!”

“알겠습니다.”

네 직원이 흩어져 제각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 해결책이 없어 암울해 하던 표정을 깔끔히 지운 채로.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문의할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도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직원들을 바라봤고, 그 몇 걸음 뒤에서 내내 조용히 지켜보던 두진이 감탄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 내가 조언하긴 했지만, 그게 이렇게 곧바로 효과를 볼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는데···.’

민원 해결 모범 사례를 살펴보라는 건 두진의 조언이었다.

공무원 조직은 뭐든지 ‘기록’하고 그 데이터를 ‘축적’하는 경향이 있어, 보관된 데이터만 잘 활용해도 현실 개선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말과 함께.

말은 그렇게 했고 정년퇴직 전 두진도 전국 지자체들의 모범 사례들을 살피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두진이 아닌 아직 번듯한 시장이 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했던 도훈이 그 데이터 속에서 떡하니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 남다르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두진이 조용히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전화를 붙든 직원들이 결과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시장님, 업체에 확인해 봤는데 정화 장비 비용이···.”

“단순 설치 비용만 확인하지 마시고 장기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것까지 염두에 둬서 제안서나 견적서를 보내달라고 하세요. 아, 그리고 혹시 같은 기술을 시공하는 업체가 또 있는지 꼭 확인하시고요. 아무래도 경쟁입찰을 하면 더 저렴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시장님! 확인해 보니까 정화해서 지하로 다시 흘려보내야 하는 지하수의 최소량이 있답니다. 그것만 지키면 남는 지하수는 다 사용해도 상관없다는데요?”

“영한리 주민이 60분 정도 되지만, 식수와 생활용수 말고 농업용수로도 쓰실지 모릅니다. 그 부분 확인해서 계산해 보는 것으로 하죠.”

“그러겠습니다!”

“시장님!”

“그건···.”

“시장님!”

“그 부분은···.”

직원들과 즉각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며 방향을 잡아주는 도훈의 모습은···.

‘... 아주 제대론데?’

속으로 감탄하던 두진이 곁에 선 홍영진에게 시선을 줬다.

그 역시 도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감탄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 허허.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운도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지.’

두진이 다시 도훈을 바라봤다.

직원들과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는 도훈의 모습에 절로 두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남다르다’고만 여겼을 때도 도훈에게 기대했던 두진이었다.

도훈이 시청에 검찰을 끌어들였을 때 잠시 갈등하긴 했지만, 두진은 고민 끝에 도훈이 자신이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길 원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만큼 남다른 각오로 시장의 책임을 다하려는 것이라 이해하고 남기로 했다.

자신이 예상한 그대로라면, 도훈은 곧 아주 훌륭한 시장이자 행정가로 성장할 거라고 믿었기에 그런 결정을 했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성장이 빠르질 않은가.

‘아니, 애초에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겠어.’

자신이 어림했던 것보다 도훈이 이미 훨씬 큰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두진이었다.

도훈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두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친구 비서실장일,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고 보람될 수도 있겠어···.’

한편, 비서실장이 자신을 향해 애정(?)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도훈은 직원들과 계속 대화해가며 영한리 지하수 해결책을 구체화 시켜갔다.

“이 정도면 대략적인 건 다 나왔죠?”

“네, 시장님. 이거 될 것 같습니다.”

살짝 상기된 직원의 말에 도훈이 담담히 미소 짓고는 말을 이었다.

“이거 마무리하는 건 오 계장님이 맡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서둘러주셔야 합니다. 빨리 해결 안 하면 영한리 할머님들이 시청에 쳐들어와 제 멱살을 붙잡으실지도 모르니까요.”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몇 가지 더 확인해야겠지만, 이 정도면 거의 다 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부탁합니다.”

미소로 직원과 대화를 마무리한 도훈이 두진과 영진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얼굴의 미소를 지워버린 도훈.

“회의실에 들렀다가 시청으로 복귀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도훈이 사고 친 직원들이 경위서를 쓰고 있을 회의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시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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