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왜 그랬습니까?
끼익.
“여기 맞죠? 홍 주무관님.”
“예, 맞아요. 아, 저기 나오시네요.”
홍영진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도훈, 두진, 정임이 웬 할머니들과 함께 한 식당에서 나오고 있었다.
조수석에서 내린 영배가 다가가자 도훈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 뭡니까?”
“제 차 키요.”
“그럴 모르는 게 아니고 시장님 차로 뭘···.”
“제 차로 할머니들 댁에 모셔다드리고 오세요. 다들 영한리에 사신답니다.”
영한리는 대흥시 남동쪽 끝자락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그럼 승합차는···?”
“할머니들 모셔다드리는 게 공무는 아니잖아요. 제가 타야죠.”
어리둥절한 영배였지만, 그는 왠지 도훈의 싸늘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려 더는 질문하지 않고 두진에게 시선을 줬다.
‘... 그냥 갔다 와.’
두진이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자 영배는 뭔가 사연이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도훈이 부축한 할머니의 팔짱을 꼈다.
“저 찹니다, 할머니. 가시죠.”
“아이고! 편히 가겄네. 고마워서 어째.”
“버스값 굳었구먼. 고마워!”
“천만의 말씀입니다.”
도훈 일행이 걸음이 불편한 할머니들을 부축해 도훈의 차에 타게 했다.
조수석에 앉은 할머니가 차창을 내리더니 도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시장의 멱살을 붙들겠다던 바로 그 할머니였다.
“정말 바로잡아 줄 거여?”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믿어도 되는 거여?”
“네.”
단호하게 답하는 도훈을 빤히 바라보던 할머니가 차창을 올리며 시크하게 답했다.
“두고 보면 되겄제.”
차가 출발했고, SUV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던 도훈은 두진, 정임과 함께 승합차에 올랐다.
“어디로 갈까요, 시장님?”
“먼저 시청에 정임 씨부터 내려주세요. 비서실을 통째로 오래 비워둘 수는 없으니까요.”
조수석에 앉은 도훈의 목소리가 딴 때 없이 싸늘해, 홍영진은 속으로 움찔했다.
“... 그다음에는요?”
“상하수도 사업소로 갈 겁니다.”
폭발 직전의 활화산 같은 분위기의 도훈을 조수석에 태우고 승합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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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면에 자리한 상하수도 사업소.
점심 직후라 나른함이 감돌던 상하수도 사업소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들어선 사람을 본 직원이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 시장님?”
“...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인사하던 직원이 도훈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전에 만났을 때와는 달리 너무나 싸늘했고, 전처럼 어색하게나마 웃으려고도 하지 않아서.
“직원들 다들 자리에 있습니까?”
“... 네? 네.”
“소장님도요?”
“... 그, 그렇습니다.”
상하수도 사업소 조직은 소장 이하 3개 팀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직원 수는 계약직까지 14명.
그중 야간 경비직원을 제외한 13명 전원이 자리에 있음을 확인한 도훈이 담담히 그러나 아주 차갑게 말했다.
“직원들 전부 회의실로 모이라고 하세요.”
“...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네. 당장요.”
“......”
말을 마친 도훈은 직원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지 않고 일행과 회의실로 향했다.
도훈은 물론, 두진과 영진도 굳은 표정인 걸 본 직원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다른 직원들을 부르러 가는 그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잠시 뒤.
“시, 시장님. 가, 갑자기 왜···.”
“기다리세요.”
도훈은 당황한 얼굴로 회의실에 나타난 소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말을 잘라냈다.
안 그래도 싸늘하던 회의실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얼어붙었고 도훈은 열세 명 모두가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
창가에 선 도훈은 유리창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 ... 다스려라.
‘... 압니다. 아는데 잘 안 되네요.’
-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냐?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분노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설사 복수라 해도 제대로 못 한다고. 기억 안 나?
‘... 납니다. 노력 중이고요.’
- 엉뚱한 사람 잡고 싶지 않으면 감정 다스려. 얼른!
‘... 네.’
조상님이 차분히 다그치자 도훈은 눈을 감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뒷목이 빳빳해질 정도로 분노했던 도훈이 그렇게 감정을 조절하길 얼마.
등 뒤에서 두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모였습니다.”
도훈이 천천히 돌아섰다.
회의실엔 의자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자리에 앉지 않은 상태.
긴장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직원들이 회의실 벽에 빙 둘러서 있었다.
직원들을 하나씩 살피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중 영한리 지하수 문제 모르시는 분 손 드세요.”
“... 영한리?”
“... 지하수?”
누군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얼굴이 굳어지거나 창백해졌다.
직원들 모두를 차분히 살피며 도훈이 입을 열었다.
“손드신 분들, 나가서 일 보셔도 됩니다.”
하수도관리팀 직원들에 계약직 경비원까지 넷이 조용히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영한리 지하수 문제, 주민들이 상수도 설치가 아닌 다른 해결 방식을 원한다는 거 모르셨던 분 손 들어보세요.”
요금 징수 등 회계 쪽을 담당하는 여직원 둘을 포함해 셋이 손을 들고 또 밖으로 나갔다.
“영한리 주민들이 민원 내겠다고 항의한 거 모르시는 분 손 드세요.”
이번에 손을 든 건 세 사람.
하지만, 도훈은 곧바로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중 둘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판단 잘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만 모면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니까요.”
“......”
도훈의 말이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되어 두 직원의 폐부를 찔렀다.
한층 차가워진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상수도 시설팀 사업추진 담당자가 몰랐다고요?”
“... 그, 그게···.”
“관리팀 예산 집행 담당자가 몰랐다고요?”
“... 죄, 죄송합니다.”
싸늘한 도훈의 추궁에 이내 두 사람은 손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결국, 한 사람만 밖으로 나갔고 회의실에 남은 직원은 소장을 비롯해 다섯.
그중에는 사업소 소장은 물론, 상수도 시설팀과 관리팀의 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점점 싸늘해지던 도훈의 눈빛은 냉엄함의 최절정에 달했고 그런 도훈에게 조상님이 속삭였다.
- 저놈들은 몰랐을 리가 없다. 저 다섯이 전부야.
‘... 네.’
관상도 잘 보지만, 조상님이 더 잘 보는 건 사람의 심리 변화.
눈빛, 표정, 호흡, 심박 수의 변화에 기초하고 귀신의 신통력이 더해진 조상님의 거짓말 판별력은 100%였다.
그런 조상님에게 배운 도훈도 나름 사람을 잘 파악한다지만, 이 거짓말 판별력만큼은 따라가지를 못했다.
이 방법을 자주 쓰지 않는 이유는 조상님이 기운을 소모하기 때문이었다.
회의실에 남은 다섯은 항의하는 영한리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쉬쉬했고, 그런 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도훈에게 숨기거나 이에 동조했다.
아주 가당찮은 이유로.
“앉으시죠.”
이제 본격적이라는 듯, 도훈이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두진과 영진은 도훈의 뒤에 그대로 선 가운데, 도훈의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빛을 받은 다섯 직원이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들이 앉는 동안, 도훈의 시선은 오로지 소장을 향해 있었다.
도훈의 입에서 영한리, 지하수 얘기가 나오자마자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의 소장.
한참, 그런 소장을 노려보고 있던 도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소장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더 냉랭하게 느껴지는 담담한 말.
“... 네.”
“왜 그러셨습니까?”
“......”
파랗게 질린 소장과 고개 숙인 직원들에게 도훈의 목소리가 저승사자의 그것처럼 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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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이 도착하고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갑자기 시장의 호출을 받은 기획감사실 감사팀 직원들이 사업소에 도착했다.
도훈이 감사팀 팀장과 직원 세 사람에게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대상은 다섯 명이고요. 지금 회의실에 떨어져 앉아서 각자 경위서 작성하고 있습니다.”
“... 경위서라면?”
“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요.”
“......”
“일단은 그 사람들 경위서 작성하는 거 감독 좀 해주세요. 지금 안에서 감독하고 있는 비서실장님은 이리 오라고 전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 사람들과 불필요한 대화 하면 안 되는 건 아시죠?”
팀장과 직원들을 향해 쏟아지는 도훈의 차가운 눈빛.
안 그래도 사방공사 때문에 찔리는 게 있는 이들이었다.
“무, 물론입니다.”
“부탁합니다.”
감사팀 직원들이 움직인 뒤, 도훈은 사업소 직원들이 앉아 기다리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을 먼저 나갔던 이들 중 도훈에게 호출된 상수도 팀과 관리팀의 넷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로 도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도훈은 표정부터 풀었다.
그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얼굴 펴세요.”
“......”
“여러분은 경위서 쓸 일 없을 겁니다. 여러분 질책하거나 책임 물으려고 모이라고 한 게 아닙니다.”
“... 그, 그럼?”
“급히 대책을 마련할 일이 있습니다.”
“... 그게 영한리 지하수 문제입니까?”
“네.”
도훈이 설명을 시작했다.
운계면 영한리는 산 밑자락에 있는 농촌 마을.
한때는 제법 많은 인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규모가 많이 축소된 곳으로 시 중심가와는 제법 거리가 먼 외딴곳이었다.
영한리는 예전부터 지하수를 사용하던 마을인데 지금도 상수도가 아닌 지하수를 쓴다.
다만, 지금은 집마다 펌프가 있는 게 아니고 마을 공용 관정과 연결된 큰 물탱크로부터 각 집으로 지하수가 전해진다.
말하자면, 영한리 만의 상수도가 따로 있는 셈이랄까.
“5월에 우리 시 지하수 전부 수질 검사했었다면서요?”
“네. 그랬습니다. 영한리 지하수 그때 식용불가 판정이 나왔었죠.”
올해 5월 중순, 수질검사에서 영한리 지하수가 식수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물을 10분 이상 끓여서 마시면 괜찮다지만, 그게 근본적 대책이 될 수는 없는 일.
상하수도 사업소에서는 정밀검사를 의뢰하고 오염원 파악에 나섰다.
“... 오염원이 마을 인근 망한 공장 부지에 몰래 버려진 생활 쓰레기와 산업 폐기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달에 쓰레기를 치우고 공장 터 지하수 폐공했죠. 망한 지 꽤 된 곳이라 책임 소재 가리기가 모호한 상황입니다.”
“아시네요.”
“네.”
상수도 팀 직원이 아는 건 거기까지.
그러나 그가 모르는 뒷얘기가 있었다.
“시의원이 끼어들어 문제를 만든 모양입니다.”
“... 시의원이요?”
“네.”
정치인은 어떻게든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평소에도 그럴진대, 하물며 선거 목전에 어려운 사정이 있는 주민들이라면 어떻겠는가.
현재 영한리에는 30여 가구, 60명이 조금 넘는, 대부분 70대 이상의 노인들이 살고 있었다.
SNS 시대라지만,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이조차 소수.
나이가 많아 활동력이 떨어지고 온라인 활동은 더욱 미미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상수도 문제를 인지한 시의원이 조금은 과감하게 일을 꾸몄다.
선거 직전까지만 해도 사업소에서는 정수 필터를 설치하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업소장은 주민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오히려 더는 지하수를 쓰지 말고 상수도를 가설해야 할 것 같다 했고, 당연히 주민들은 반발했다.
그리고 문제의 시의원이 나타나 주민의 요구대로 문제를 해결해주겠다 했다.
대가로 내건 건 당연히···.
“소장님은 그 시의원과 짜고 지하수 못 쓴다, 상수도 설치해야 할 것 같다고 바람을 잡았습니다.”
“... 어찌···.”
“어차피 필터만 설치하면 되니 잠깐만 입 맞추고 일을 늦추면 된다고 생각했답니다.”
“......”
주민들이 시의원 요구를 따르고 선거 전의 어수선한 상황이라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시의원은 낙선했고, 정밀검사 결과 정수 필터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 뒤, 사업소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쉬쉬하다 오늘에 이르게 된 것.
어이가 없어진 직원들이 침묵하는데, 조금 전 ‘폐공’에 대해 말한 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거,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겁니다. 제 담당이 아니라 확실하지 않은데, 다른 건 몰라도 정수 필터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건 진짭니다.”
“그래요?”
“네.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겠죠.”
환경부에서 무료로 지하수 수질검사를 하고 문제가 있으면 정수 필터도 설치해 주는 일을 했다.
그런데, 영한리 지하수는 그 필터로 해결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걸 시급히 해결하는 게 우리 과제입니다.”
“......”
도훈의 말에 직원들이 말없이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뾰족한 수가 있었다면 이 사달이 나지도 않았겠지.’
도훈이 속으로 탄식하는 가운데, 모두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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