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합석 좀 해도 되겠습니까?
“조 비서관, 잠깐 들어오세요.”
“네, 시장님.”
잠시 외부에 나갔다 들어온 도훈이 부르자 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던 영배가 답했다.
영배가 시장실에 들어서자 도훈은 문을 닫으라 눈짓한 뒤 소파에 앉았다.
“와서 앉아 봐, 형.”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뿐이야.”
“왜 불렀어?”
영배의 빠른 태세 전환에 도훈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형이 쓰는 계좌 번호 하나 알려줘.”
“계좌 번호? 왜?”
“왜긴 왜야. 돈 보내려고 그러지.”
“응? 갑자기 왜? 그나저나 얼마 보내려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나 눈은 반짝반짝 빛내는 영배.
“떼돈 보내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리고 다달이 넣으려고 알려달라는 거야.”
“... 다달이? 한 번에 보내는 게 아니고?”
“응. 아직 월급도 못 받았는데 내가 돈이 어딨어?”
“...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영문을 몰라 하는 영배의 모습에 도훈이 다시 피식 웃었고 영배가 인상을 쓰고 말했다.
“야, 제대로 설명 좀 해봐.”
“아, 형 용돈 보내주려고 그러는 거야. 용돈은 다달이 받는 거 아니야?”
“뭐?”
“형 월급은 고스란히 형수한테 줘. 그리고 내가 계좌에 넣는 돈으로 용돈 쓰라고.”
“......”
영배의 아내가 다시 강사 일을 시작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영배만큼 많은 수업을 할 수가 없어 수입이 줄게 됐다.
영배의 월급을 몽땅 더해도 전보다 총액이 적은 상황.
도훈은 그걸 고려해 작가일 때보다 수입이 늘어난 자신이 영배의 용돈을 책임지기로 한 것이었다.
“네가 매달 내 용돈을 넣어 준다고?”
“응. 월급날마다 넣을게.”
도훈의 말에 영배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를?”
“일단 40만 원으로 시작하자. 형수한테 물어보니까 형 용돈 그 정도 받았다던데?”
“... 맞아.”
“시작은 40으로 하고, 모자라면 늘리자. 앞으로 쭉 내가 책임질게. 세금 같은 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좀 알아봐. 그것도 내가 책임질 테니까.”
“......”
감격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영배.
시장인 도훈에게는 업무추진비가 주어지지만, 도훈은 공무가 아니면 일절 그 돈에 손대질 않았다.
업무추진비를 포함한 공금 지출과 관련해 두진은 도훈보다 더 엄격해 정임에게 ‘실장님 무서워 아무것도 못 사겠다’는 얘기까지 들었을 정도.
지갑이 얇아진 데다가 함께 일하는 이들이 그런 태도니, 알게 모르게 영배의 소비생활은 크게 위축된 상태였는데 한 줄기 구원의 동아줄이 하늘에서 내려온 셈이랄까.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징그러워.”
“내가 미쳤나 봐. 널 껴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용솟음치는 걸 보니까.”
“생각으로 그치는 게 좋을 거야. 아직 용돈 안 들어갔으니까.”
“... 깨우쳐줘서 고맙다.”
실없는 대화를 마친 영배가 도훈에게 계좌 번호를 알려주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나가려는데, 도훈이 불렀다.
“아 참, 형.”
“왜?”
“나한테 용돈 받는다고 형수한테 실토할 거지?”
뜨끔한 표정을 한 영배와 그런 영배를 빤히 바라보는 도훈.
“... 네 얼굴 보니 뒤늦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리 해. 나중에 걸려서 나까지 형수한테 혼나게 하지 말고, 알았지?”
“오냐, 이 꼼꼼한 자식아.”
“일 봐.”
“그래. 어쨌든 고맙다.”
“뭐, 서로 고마운 거지.”
“그래. 계속 서로 고마워하자고.”
“응.”
도훈에게 정겹게 웃어 보인 영배가 돌아서기가 무섭게 진지한 표정을 했다.
‘... 얼마를 삥땅 치지? 3만 원, 5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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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시청 청사 주차장.
“오늘은 정임 씨가 정할 차례입니다.”
“그래요? 그럼 운계면 사거리로 가주세요, 시장님.”
“네.”
도훈의 낡은 SUV에 도훈, 두진, 정임이 탔다.
세 사람은 점심을 먹기 위해 밖에 나가는 터.
이번 주부터 약속이 없어도 점심을 주 2회 이상 구내식당이 아닌 외부 식당에서 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직원들과 안면은 익혔으니, 외부에서 식사하며 상인들이나 일반 시민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게 목적이었다.
도훈은 항상, 다른 직원들은 번갈아 참여하기로 했으며 식대는 당연히 각자 부담이었다.
“메뉴가 뭐야, 고 주무관?”
“음, 날이 좀 더우니까 시원한 메밀국수가 어떤가 싶은데요?”
“나쁘지 않네. 어떻습니까, 시장님?”
“저도 좋습니다.”
운전하는 도훈이 선선히 답하자 뒷좌석의 정임이 물었다.
“시장님은 가리는 음식 없으세요?”
“네. 특별히 없습니다. 아, 애견인이라 개고기는 안 먹고요. 참, 카레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카레요? 카레는 왜요?”
정임이 의아한 듯 묻자 도훈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음식을 하셨거든요.”
“아, 그렇다고 하셨죠.”
“큰 솥에다 한꺼번에 몽땅 끓여서 몇 번이고 먹을 수 있는 종류를 주로 먹었습니다. 카레가 대표적이죠. 뭐, 인스턴트도 질리도록 먹었고요. 그래서 저도, 제 동생도 웬만하면 카레는 돈 주고 사 먹지 않게 됐죠.”
“저런···.”
“하하. 그런 표정 하실 필요 없어요.”
정임이 안쓰러운 표정을 했지만, 도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다.
“지금 가는 곳, 맛집인가?”
“물론이죠. 아, 그러고 보니 두 분께는 양이 좀 적을 수 있겠네요.”
“뭐, 맛이 있다면야 곱빼기를 먹으면 되지. 대신에 맛없으면 고 주무관이 사나?”
“호호,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목적지에 도착한 세 사람은 알아보는 몇몇 시민들과 인사한 뒤 자리를 잡았다.
중년의 사장이 웃으며 맞이해줘서 세 사람은 편하게 주문하고 음식을 받아들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천만에요. 가시기 전에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세요, 시장님.”
“물론이죠.”
음식을 갖다 준 사장이 멀어지자 두진이 정임에게 속삭였다.
“잘 골랐는데?”
“호호, 당연하죠.”
이번 주부터 ‘외식 방침’을 실행한 이후 오늘이 세 번째 외식.
첫 번째는 무덤덤했고, 두 번째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는 식당 주인 때문에 마음이 편하질 않았었다.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식당 주인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후루룩.
후루루룩!
“음, 산뜻하니 좋네요.”
“그렇죠? 호호! 맘에 들어 하실 줄 알았어요.”
“여긴 어떻게 발굴했어? 난 모르는 곳인데.”
“남편이 알려줬어요. 그이가 면이라면 귀신이잖아요.”
“정 선생이? 그러고 보니 여기 딱 정 선생 취향이네.”
“네.”
두진의 말에 정임이 웃으며 답했다.
정임의 남편은 공립중학교 교사.
아직 도훈과 인사한 적은 없었지만, 두진과는 친분이 있었다.
정임의 평가에 의하면 성격이 영배와 좀 비슷하다는데, 다정한 건 비교를 못 한단다.
영배가 와이프를 여왕처럼 모시고 산다는 걸 아는 도훈은 듣고 그냥 웃기만 했었다.
“음, 이거 먹을수록 괜찮네요. 실장님, 우리 사리 하나 추가해서 나눠 먹을까요?”
“그러시죠. 사장님!”
두진이 주인을 불렀지만, 주방 안에서 뭔가를 하는지 보이질 않았다.
“드시고 계세요. 제가 갔다 올게요.”
도훈이 주방 앞에 가서 사리를 주문했다.
“금방 갖다 드리겠습니다.”
“네.”
주방 안에서 보조와 바쁘게 움직이던 사장에게 웃어 보인 도훈이 자리로 돌아가는데 조금 열린 방문을 통해 안에서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계속 팔팔 끓여 먹어?”
“그냥 마시면 안 된다는데 어떻게 해요, 그럼.”
“앞으로 더 오염되면 빨래도 못 할 거라고 했잖어유!”
“아이고, 환장하겄네. 그렇다고 멀쩡히 잘 쓰던 지하수 놔두고 상수도를 깔라고? 그 돈은 누가 대는데!”
“날은 점점 더워지는데, 시원한 지하수를 그냥 쓰지 말라고 하면 어쩌자는 거여! 목말라 죽으라는 거여 뭐여!”
도훈이 걸음을 멈추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최문일이 그놈이 해결해준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은 우리가 등신이여!”
“아, 선거 떨어진 놈 이제야 원망하면 뭐한대유.”
‘최문일? 어디서 들어본···. 아.’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리다 뒤늦게 떠올렸다.
최문일이라는 이름의 야당 시의원이 지난 선거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그놈도 나쁜 놈이지만 시청 것들도 싹 다 접싯물에 코 박고 죽어야 할 놈들이여. 늙은이들만 사는 동네라고 괄시하는 거 아니냐고!”
“선거 끝났단 얘기지, 뭐.”
‘... 이게 무슨 소리야?’
도훈이 어리둥절해졌다.
얘기를 들어본즉, 안에서 대화하는 이들은 지하수가 오염됐으니 더는 식수로 사용하지 말고 새로 상수도를 깔아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대흥시에는 시청 외부에 ‘상하수도 사업소’ 조직이 있었고, 6급 주사가 소장인 그곳이 상하수도 관리 및 요금 징수까지 관련된 모든 일을 처리했다.
취임하고 그곳에 가서 인사도 하고 현안 보고도 받았다.
그런데 관내에 지하수 관련한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거기 소장이···.’
도훈은 첫 만남 때 주눅 든 모습으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하던 소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 그러고 보니 그 소장, 양상택이 언급한 리스트에 이름이 있었지. 절대 상종 못 할 쪽에···.’
양상택이 상종 못 할 이들이라 단정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거나 부패해서가 아니라 야당에 줄을 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직접 본 게 아니니 정말 줄을 댔는지 단순히 친하게 지낸 것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업무능력에 크게 문제가 없다는 것은 확인했던 도훈이었다.
반면에 ‘인재’라고 추천했던 이들이라고 꼭 뛰어나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 역시 확인했었다.
도훈이 그리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방안의 대화는 더 격해졌다.
“우리끼리라도 가서 시청을 확 뒤집어엎어?”
“아이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양반이 뭔 수로?”
“아, 차로 시청에 태워다 주기만 허먼 내가 못할 것 같아?”
“형님, 참으쇼. 보건소서 혈압 높다고 약까지 지어줬담서요.”
목소리에 노기가 묻어났지만, 어떤 적극적인 의지 같은 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즉, 지금 저들의 대화는 ‘행동’을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를 삭이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거기서 뭐 하세요?”
“응? 아, 정임 씨.”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도훈이 돌아보니 정임이 서 있었다.
어느새 도훈은 방 앞 좁은 나무 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정임 씨, 가서 실장님 좀 모시고 와 줄래요?”
“실장님요? 이리로요?”
“네. 바로요.”
“... 알겠습니다.”
정임이 대답하고 돌아서는 순간, 방 안에서 쩌렁 고함이 터졌다.
“아, 날 시청에 대려다 달라니까! 내가 시장 놈 멱살을 붙들고 흔들어서라도 대책을 내놓게 할 테니까!”
드르륵!
“... 뭐여, 총각은?”
“......”
도훈은 분노한 누군가의 고함에 자기도 모르게 방문을 열고 말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이고, 내가 너무 시끄럽게 떠들었나? 이거 밥 먹는 거 방해됐나 보네. 미안해서 어쩐대.”
“......”
목소리로 보아 분명 조금 전에 자신의 멱살을 붙들고 흔들겠다고 고함치던 사람이 분명했다.
그 노기등등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인 할머니가 정작 시장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미안함 가득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말문을 잃은 도훈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고함에 놀라 굳어진 정임이 도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정임 씨.”
“알겠습니다.”
자초지종은 몰라도 도훈의 표정을 본 정임이 얼른 두진을 부르러 갔다.
“... 어디서 본 사람인데?”
“그려? 나도 그런 것 같았는데, TV에 나오는 총각인가?”
“아닌 게 아니라 잘 생겼네.”
방 안 테이블에는 네 분의 할머니가 도훈을 바라보며 속삭이고 있었다.
모두 머리가 하얗게 셌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알록달록(?)하고 펑퍼짐한 편한 옷차림의 시골 할머니들이었다.
‘... 영배 형처럼···.’
누구에게나 곧잘 지어 보이는 영배의 미소를 최대한 흉내 내며 도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시장입니다, 할머니.”
“... 뭐여? 시장?”
“네. 제가 대흥시 시장 김도훈입니다.”
“얼라? 맞어! 저 총각, 시장이여!”
“나도 본 것 같어요, 형님.”
본인이 자백(?)하고 할머니들이 확인해주자 ‘고함’의 주인공 할머니의 미안한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시장님이 뭔 일이래? 우리 같은 다 산 시골 할망구들한테?”
저벅, 저벅.
저쪽에서 두진과 정임이 빠르게 다가오는 걸 곁눈질로 확인한 도훈이 최대한 정겨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제 멱살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잡혀드리러 왔습니다.”
“......”
“그래서 부탁드리는 건데, 합석 좀 해도 괜찮겠습니까?”
“......”
자신을 향해 분노와 신기함이 뒤섞인 눈빛을 보내는 네 분의 할머니를 향해 도훈이 열심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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