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7화 (28/279)

27. 진국 같은 놈.

“음, 국물이 좋네요. 그렇죠?”

“네, 맛있습니다. 시··· 시, 시원하네요.”

“그러니까요. 별로 기대 안 하고 왔는데 맛이 괜찮아서 다행입니다.”

“네.”

어색한 표정의 홍영진.

그는 마주 앉은 도훈을 딱하게 보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새벽에 문자를 보내더니 난데없이 대전으로 감자탕 먹으러 가자고 할 때까지만 해도, 장난이거나 술에 취해 술주정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진짜로 대전까지 감자탕 먹으러 올 줄이야.

도훈이 영배와 자신에게 동시에 문자를 보냈고, 유달리 잠귀가 밝은 탓(?)에 응답해 생각도 못 한 새벽 감자탕을 먹고 있다는 걸 홍영진은 몰랐다.

‘... 주말에 뭐했길래 저 몰골이래?’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 눈가가 검은 게 무척 피곤한 모습의 도훈.

시청 주차장에서 만나 차를 탄 얼마 뒤부터 도훈이 조수석에서 조는 바람에 홍영진은 ‘무슨 일 있냐?’고 묻지도 못했다.

다만, 술 냄새가 전혀 없는 게 술 취한 김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후룩.

도훈이 감자탕에 집중하자 홍영진도 본격적으로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흐음!”

“괜찮죠?”

“네, 시, 시··· 시원합니다.”

자꾸 ‘시장님’ 소리가 나오려고 해 말을 더듬는 홍영진이었다.

도훈이 가게에 들어오기 전, 시장님 소리를 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으니까.

그런 홍영진의 모습에 도훈이 친근하게 웃고는 다시 감자탕에 집중했다.

빤히 옆에서 이들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 맛있냐?

‘예. 아주 죽여줍니다. 마침 배도 고팠고요.’

- 좋겠다? 맛있는 것도 먹고.

‘아, 왜 그러십니까? 먹을 때는 뭐도 안 건드린다는데.’

- 나랑 머릿속으로 대화할 때 입은 필요 없잖아? 꾸역꾸역 잘만 들어가네.

‘......’

아까 야식 먹을 때는 딴 데 정신이 팔려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아 시장했던 도훈의 손놀림은 빨랐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워낙 몰골이 후줄근해 그런지 도훈을 딱하게 보는 건 홍영진 혼자가 아니었다.

“아이고! 총각, 허기진 모양이네. 많이 들어. 모자라면 고기랑 국물 더 줄 테니까 거리낌 없이 말하고. 아, 밥 한 공기 더 줄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지나가며 하는 말에 도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도훈은 마주 웃고 지나가려는 아주머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회장님은 오늘도 나오셨습니까? 매일 국물 맛을 직접 확인하신다고 유명하던데.”

“물론이지. 지금 주방에 계셔. 조금 있으면 나오실걸?”

“대단하시네요.”

“호호! 우리가 봐도 그래.”

아주머니가 멀어졌고 도훈이 다시 감자탕에 코를 박고 흡입(?)하기 시작했다.

속도를 내는 도훈 때문에 홍영진도 영문도 모르게 급히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연신 침을 삼키던 조상님이 불평했다.

- 아, 이거 정말 고문이네, 고문. 너 인마,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 제사상에 올려드린다고 했잖습니까?’

- 겨우 한 그릇?

‘... 곱빼기로 하지요.’

도훈의 말에 조상님이 가게 메뉴판을 흘끔 하고 말을 이었다.

- 뼈 찜 추가.

‘... 찜 추가해드리면 조용히 협조해 주시렵니까?’

- 오냐.

‘... 알겠습니다.’

귀신인 조상님은 당연히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도훈이 차려준 제사상에 오른 음식은 먹지는 못해도 맛을 볼 수가 있었다.

조상님이 맛을 본 음식은 가진 맛과 기운을 잃어 먹을 만한 게 아니게 변해서 심지어 순심이도 건드리지 않았다.

도훈이 조상님 제사상을 차리는 건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

제사상이라고 그럴듯하게 차리는 게 아니라 종이로 조상님의 위패를 써 붙이고 조상님이 선택(?)한 음식을 상에 올린 뒤 절만 두 번 하면 됐다.

그 제사상의 음식을 맛보는 게 조상님의 유일한 낙(?)인지라 그때마다 5만 원이 넘는 피 같은 돈이 나갔다.

‘... 이번 달도 예산 초과겠군.’

도훈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주방 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중간 솥 국물 기름 철저히 걷어내라. 알았지?”

“네, 어머니.”

“그리고 오늘은 날이 더울 것 같으니까 반찬 신선도에 신경 쓰고.”

“알겠습니다, 어머니.”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 한 분과 고분고분 답하는 중년 여인.

그 할머니가 바로 이 ‘공가네 감자탕’ 체인의 초대 사장이자 회장인 공미진 여사였고, 중년 여인이 2대째 사장이자 며느리였다.

- 호오?

‘... 지금 감탄하실 때가 아니잖습니까?’

- 밥값 하라고? 오냐. 장군감이다. 남자로 태어나 군인이 됐으면 나라를 구했겠어.

‘......’

- 왜 조용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돌격입니까, 후툅니까?’

- 걱정하지 마라. 제 입으로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 같으니까. 한마디로 외골수야.

‘진짜죠?’

- 보기에 그래. 아마 슬쩍슬쩍 간 보는 건 좋아하지 않을 거야. 차라리 정면으로 치고 들어··· 야, 온다!

조상님의 신호를 받은 도훈은 국그릇을 들고 얼마 남지 않은 감자탕을 통째로 들이켰다.

후루루루룩!

새벽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실내에 요란한 소리가 울렸고, 회장의 시선이 절로 도훈을 향했다.

탁!

꺼억!

“잘 먹었다!”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하는 말에 회장 할머니가 도훈을 보고 싱긋 웃었다.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는 도훈이 피곤에 절은 표정으로 아주 생생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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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도훈은 구석 테이블에 회장 할머니, 그녀의 며느리와 마주 앉아 있었다.

감자탕 덕분인지 다크서클이 조금은 옅어진 도훈과 회장 할머니의 표정은 담담한 데 비해, 며느리 쪽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 그래서?”

“생각 끝에 그 일이 불공정하다고 여겨져 가능하면 바로잡아 주실 수 없겠는지 말씀드리러 찾아온 겁니다. 새벽마다 회장님이 국물 맛 확인하러 오신다는 걸 신문기사에서 봤거든요.”

“... 흐음. 그럼 아까 같이 밥 먹던 사람도 우리 공장 알바생인가?”

“아뇨. 마침, 아는 형님이 대전에 오실 일이 있다고 해서 차를 얻어타고 왔습니다.”

“그 얘기를 하러 일부러 왔단 말이야?”

할머니의 말에 도훈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저도 대전에 볼일이 있어서요. 감자탕 맛도 보고 말씀도 드릴 겸 해서요.”

도훈의 말에 회장 할머니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은 상기된 얼굴의 며느리는 뭐라 말을 꺼내고 싶은 모양인데, 할머니가 잠잠하니 참는 게 역력했다.

“그런데 그걸 왜 내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나?”

할머니가 질문을 던졌고 도훈이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공장장의 행동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닌 것 같고, 도훈의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어 하는 듯했다.

도훈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갑질이라는 흔한 말을 모르시지 않을 겁니다. 딱 그 말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죠.”

“... 그래서?”

“알아보니까 이 감자탕 체인이 저 같은 서민에게 사랑받는 곳이라는데, 혹시나 공장 일이 알려져 피해가 있을까 걱정이 됐고요.”

“... 그리고?”

흥미롭다는 표정의 회장 할머니.

도훈은 그녀 말고 며느리의 눈치를 살짝 본 다음에 말을 이었다.

“맛있는 음식으로 잠깐이나마 사람들의 시름을 잊게 하고 싶다는 분이 대표이신데 음식 때문에 사람이 억울하게 눈물짓게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요.”

음식으로 사람의 시름을 잊게 하고 싶다는 건 신문기사에서 찾아본 회장 할머니의 말이었다.

그 말 한마디가 난데없는 알바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모든 ‘행동’의 근거가 됐다.

도훈은 그 말과 조상님(?)을 믿고 일부러 회장 할머니가 있을 시간을 골랐다.

조상님이 말이 통할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그냥 조용히 감자탕만 먹고 가 다른 방도를 궁리할 생각이었다.

‘여기까지는 다행인데···.’

조상님의 분석을 통해 얻은 정보가 100% 맞으라는 법은 없었다.

관상이 인격까지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도훈이 내심 긴장하고 있는데 담담하던 공 할머니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빙긋.

회장 할머니는 도훈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짓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말 하면서 왜 사장 눈치를 봐?”

“그게··· 회장님이야 그 말씀을 한 당사자시지만···.”

“아하? 우리 며느리는 안 그럴 수도 있다 이거야?”

“... 대를 이어 한결같기가 어려운 세상이라서요.”

“하하! 그 총각 용감하네.”

할머니가 소리 내어 웃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 용감한 건가? 아니면 무대뽀인 건가? 알바 잘리면 어쩌려고 그래?”

“저야 잘려도 다른 알바 구하면 됩니다.”

“그래? 나이도 제법 먹은 것 같은데 알바가 아니라 직장을 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 그렇긴 하죠.”

도훈은 회장 할머니와 사장 며느리 뒤편에서 알짱대는 앞치마 입은 젊은 남자를 흘끔 하고는 답했다.

가족인 듯 며느리와 닮은 얼굴이었는데 아까부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도훈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은 그게 다야?”

“네. 부디 선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생각해 보겠네.”

선선히 그러겠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도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왜 남의 일에 참견이냐며 핀잔을 듣거나 면박을 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딘가.

도훈이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회장 할머니가 다시 말을 걸었다.

“참, 감자탕은 맛있던가?”

“네. 아주 맛있었습니다. 정말 시름을 잊게 할만하다 싶더군요.”

“다행이군.”

도훈이 묵례한 뒤 가게를 나갔다.

출입문이 닫히자마자 그쪽을 본 채 푸근히 웃고 있던 회장 할머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승범 애미야.”

“네, 어머님.”

며느리를 부른 회장 할머니가 엄하게 말을 이었다.

“날 밝자마자 공장장 잘라라.”

“... 정말 잘라요, 어머님? 작은 아버님이 서운해하실 텐데···.”

공장장은 회장 할머니 남편의 동생 아들이었다.

그러나 설사 자기 아들이라고 해도 이런 문제를 넘어갈 그녀가 아니었다.

“그딴 건 내 신경 쓸 바 아니다.”

“......”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었다가는 솥에 넣고 삶아버릴 거라고도 전해. 알았냐?”

“네.”

더없이 싸늘한 회장님의 말에 사장 며느리가 고분고분 답하고 물러나자 할머니가 뒤에서 왔다 갔다 하던 젊은 남자를 불렀다.

“왜요, 할머니?”

“아까 그놈 말이다. 맞지?”

“뭐가요?”

“뭐긴 뭐야, 이놈아? 맞으니까 너 지금 그놈 쫓아가려고 앞치마 벗은 거 아냐?”

“... 쩝. 모르시는 게 없네요.”

“헹! 이놈아,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흔들어 보이는 회장 할머니.

그녀는 세상일에 관심이 많아 주방에 들어갈 때가 아니면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는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방금 다녀간 청년이 단순한 알바생이 아니라는 것도 진즉에 눈치챘고.

“이번 일 못 본 척해라.”

“아이고, 할머니! 이게 얼마나 흥미진진한 기사···.”

“휴가 내내 서빙하고 싶지?”

“... 할머니 쫌! 저 요즘 기사···.”

“너도 삶아주랴?”

“... 포기할게요.”

솥에 넣고 삶는다는 건 회장 할머니가 정말 화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

진짜 삶아진 사람은 다행히 없지만, 그 리스트에 오르면 두 번 다시 상종하지 않는 게 할머니의 철칙이었다.

손자를 포기시킨 할머니가 출입문을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 헹. 저런 놈이 진국인데···.”

후줄근한 모습으로 나타나 알바생인 척하고 자기한테 득 되는 것도 아닌 남의 얘기만 하고 사라진 남자.

할머니는 첫눈에 누구인지 알아봤는데, 녀석은 시장의 ‘시’ 자도 꺼내지 않고 겸손하게 용건만 마치고 갔다.

“흥미로운 놈일세.”

웃으며 중얼거린 할머니가 걸음을 옮겼고, 손자가 뒤를 따랐다.

도훈과 비슷한 나이인 듯한 젊은 남자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 할머니만 아니면···. 쩝.’

아주 오래간만에 휴가를 받아 집에 왔다가 재미있는 걸 건질 기회를 놓쳤다.

최근 부장이 자신을 보는 눈치가 심상치 않아 더 아쉬웠다.

‘참, 진국 같은 놈이네.’

‘... 절호의 기회였는데···.’

할머니와 손자가 한 사람을 생각하며 서로 다른 의미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 연이틀 무리해서 그런가? 왠지 으스스하네.”

주차장을 향해 걷던 어떤 남자가 파르르 몸을 떨며 갈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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