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첫 민원인.
“시장 되니까 좋아요?”
“음, 그런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게 좋아요?”
“그냥 다 좋은데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 하하.”
도훈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했지만, 상대들(?)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던져오는 질문에 답하며 고개를 돌리느라 어지러울 정도로.
“높은 사람 되니까 좋은 거 아닌가요?”
“글쎄요.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그럼, 월급이 많아서 좋은 거예요?”
“... 아직 월급 안 받아 봤는데···.”
“시장님은 차도 공짜로 생겼잖아요. 공짜가 많아져서 좋은 건가요?”
“... 그, 글쎄요.”
집요하게 이어지는 질문에 결국 머쓱한 표정을 한 도훈.
한 아이가 공책에 적으며 입으로 소리를 냈다.
“... 공짜가 많아서 좋냐··· 는 기자의 질문에 시장님은 뻘쭘··· 한 표정을 했다.”
“......”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비서실장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고, 홍영진은 웃음을 참으려 혀를 깨무는 게 빤히 보였으며, 영배는 아예 대놓고 소리 없이 웃었다.
조금은 난처한 표정이던 담임 선생님마저 입을 막고 고개를 돌린 상황.
‘... 열다섯 부밖에 찍지 않을 신문이라 다행이네.’
오늘의 수업 주제는 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있었던 일을 ‘신문’으로 만들기란다.
곧 여름방학인데, 그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아이들이 직접 ‘신문’ 형식으로 만들어 부모님께 전할 거란다.
요즘 교사들이 웬만한 것들은 다 단톡방에서 학부모들과 공유한다는 걸 아는 도훈으로서는 참 이해 못 할 수업이었다.
어쨌든, 도훈이 초대된 이유는 신문에 실을 기삿감이 마땅치 않아 특별 이벤트 형식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이 반 반장 박준수에 의해서.
도훈은 친구 아들이 벌인 ‘기자 놀이’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시장님은 정말 준수랑 친해요?”
준수 옆에 앉은 여자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준수 녀석의 으스대는 듯한 표정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도훈은 화제가 바뀌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얼른 답했다.
“준수가 날 삼촌이라고 부르긴 해요. 준수 엄마가 내 친구여서요.”
“우리 반에서 시장님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준수가 선거 때 엄마, 아빠한테 시장님 얘기하라고 되게 졸랐거든요.”
“... 그랬어요? 하하.”
또 웃으며 얼버무리려 했던 도훈.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건 애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었다.
“네, 귀찮아 죽는 줄 알았어요.”
“맞아요.”
“나도 그랬어요!”
“하여튼 박준수 더럽게 끈질겨!”
“왕고집쟁이야!”
여기저기서 동시에 쏟아지는 야유에도 당사자인 준수는 여유만만.
녀석의 그 느긋한 표정에 오히려 도훈의 말문이 막혔다.
“... 하, 하하.”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멋쩍은 표정을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아이들의 원성(?)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가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선거 때 시장님 땜에 싸우기도 했어요.”
“... 왜요?”
“아빠는 경험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고, 엄마는 그럼 불륜이나 저지르는 욕쟁이를 찍어야 하느냐고 싸웠어요.”
“......”
“아빠가 뭐라 뭐라 길게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엄마가 이겼어요. 그렇게 욕쟁이를 지지할 거면 나가라고 했거든요. 아빠가 그 말에 두말없이 손들었고요.”
“... 나한테는 다행이네요.”
“히힛.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엄마가 져서 기분 나빠졌더라면 최소한 사흘은 게임을 못했을 거거든요.”
“......”
그 아이의 얘기는 그래도 준수한 편이었다.
“우리 집도 엄마가 이기긴 했는데, 아빠가 불만이 많았어요.”
다른 아이가 입을 열었고 도훈은 억지로 지은 미소에 최대한 균열이 가지 않도록 노력하며 물었다.
“왜요?”
“엄마가 시장님이 젊고 잘 생겨서 좋다고 했는데요.”
“......”
“아빠가 그게 남편 앞에서 할 소리냐고 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거든요.”
깜빡, 깜빡.
도훈은 잠시 말문을 잃고 눈만 깜빡거리다 간신히 말을 이을 수 있었다.
“... 아빠한테 내가 미안해한다고 꼭 전해 주세요.”
“그럴게요. 하지만, 화 풀릴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우리 아빠, 쪼잔하거든요.”
“......”
“풋!”
애들 뒤에 앉았던 어른들 사이에서 기어이 웃음이 터졌다.
잠시 망연해졌던 도훈이 가만히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 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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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우리 점심 먹을 준비할까요?”
“네!”
지옥과도 같은 인터뷰(?)가 드디어 끝났다.
끝났으니 냉큼 갔으면 좋겠는데, 마침 아이들이 점심시간이라 밥도 같이 먹는 것으로 미리 얘기됐단다.
담임 선생님이 음식을 가지러 조리실로 향했고, 영배와 홍영진이 거들겠다고 따라나섰다.
“휴우.”
도훈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있는데 두진이 다가와 위로하듯 말을 걸었다.
“고생하셨습니다.”
“... 네.”
“원래 제안받은 날짜는 화요일이었는데, 이쪽 사정으로 오늘 하게 된 겁니다.”
“... 사정이 뭔데요? 제가 더 난처해질 질문 준비하는 거요?”
“그건 아니고요. 급식 봉사하기로 했던 학부모 중 한 분이 사정이 생겨서 빵구가 났답니다.”
“... 그럼?”
“네. 급식봉사 대타도 겸하는 거죠.”
“......”
“직접 하시겠습니까?”
“... 조 비서관 찬스 쓰겠습니다.”
“하하, 그러십시오. 대신, 이번만입니다.”
“... 네.”
맥빠진 도훈이 숨을 돌리고 있는데 얄미운 놈이 다가왔다.
언제나처럼 히죽거리는 녀석의 모습에 도훈은 화낼 힘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고생했어, 삼촌.”
“... 알면 됐다.”
“히힛! 삼촌 덕분에 신문은 잘 나올 것 같아.”
“... 다행이네.”
맥없이 답하고 난 도훈은 인터뷰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
“준수야.”
“응, 삼촌.”
“왜 삼촌한테 직접 얘기 안 했어?”
“난 그러려고 했는데, 엄마가 말렸어.”
“엄마가? 왜?”
“엄마가 삼촌한테 직접 부탁하면 절대 안 들어줄 거라고 하던데? 공사를 구분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 역시.’
아무리 영악해도 준수는 이제 10살.
원하는 게 있으면 당사자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을 먼저 생각했을 터.
그러나 도훈도 영배도 모르게 정임이 일정을 잡았다는 걸 볼 때, 아무래도 이번 일의 배후에 ‘부처님’이 있다는 의심을 했던 도훈이었다.
진주는 이 사실을 입단속 할 생각까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일이 성사된 다음에는 발각돼도 상관없다고 여겼거나.
‘... 아마 후자겠지.’
“엄마가 시청에 전화 걸어줘서 내가 비서 누나랑 통화했어.”
“... 그랬구나.”
“응, 그 누나 되게 친절하던데? 월급 좀 올려 줘.”
“... 생각해 보마.”
잘하고 오라며 배웅하던 고정임을 떠올린 도훈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히힛! 어쨌든 오늘은 대성공이야.”
“... 다행이구나.”
마주 웃어주던 도훈은 이어지는 준수의 말에 석상처럼 굳어졌다.
“역시 우리 아빠가 최고야!”
“......”
“원래는 아빠를 불러서 인터뷰하려고 했는데, 아빠가 자기는 재미없을 거라면서 삼촌이 훨씬 나을 거라고 했거든.”
“... 그, 그랬어?”
“응!”
“......”
파르르.
도훈이 말없이 몸을 떨었고, 준수는 으스대는 표정으로 뭐라 뭐라 떠들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 부부가 쌍으로···!’
그렇게 도훈이 속으로 절규하며 몸을 떨고 있는데, 조리실에서 음식을 챙겨온 영배가 큰 소리로 말했다.
“밥 먹자, 얘들아! 오늘은 카레다!”
“와아!”
아이들이 환호하며 배식받으러 줄을 서는 가운데, 도훈이 말없이 인상을 구겼다.
카레는 웬만하면 그도 그의 동생도 먹지 않는 대표적인 음식이었기에.
‘... 아까부터 되는 일이 없네.’
한숨을 푹 내쉬며 도훈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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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십시오.”
“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호호.”
“... 감사합니다.”
“또 모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 저도 그럴 수 있길 바랍니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뒷정리까지 마친 도훈 일행이 선생님들, 봉사 나온 학부모들과 인사하고 차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준수가 누군가와 함께 달려왔다.
“삼촌!”
“천천히! 넘어질라.”
“괜찮아!”
준수와 함께 온 건 키가 비슷한 남자아이.
“인사해. 내 친구야. 얜 우리 반 아니거든.”
“그래? 반가워. 나 준수 삼촌이야.”
“아, 안녕하세요. 오재민입니다.”
도훈은 재민이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줬다.
아이들을, 그것도 눈을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녀석들을 ‘떼’로 상대하는 게 아니니 미소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눈치를 보아하니, 단지 인사시키기 위해서 데리고 온 건 아닌 듯했다.
“삼촌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응. 재민이가 삼촌한테 부탁이 있대.”
“나한테?”
어른들의 시선이 일제히 재민이를 향하니 녀석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도훈이 일행에게 말했다.
“다들 먼저 차에 가 계시겠습니까? 저는 애들이랑 저기 가게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행과 헤어진 도훈은 두 아이를 데리고 초등학교 쪽문 앞에 있는 문방구 겸 가게로 향했다.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들려준 뒤 도훈이 말했다.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다. 삼촌 돈 없다.”
“하하, 알았어.”
“자, 그럼 재민이 부탁이 뭔지 들어볼까?”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장단을 맞춰주려던 도훈.
“... 그, 그게요. 흑흑!”
재민이라는 녀석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도훈이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뭐가 됐든지, 삼촌이 도와줄 수 있는 거면 최선을 다할게.”
“... 저, 정말요? 흑!”
“응. 꼭 해결한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 최선을 다할 것은 약속하마.”
“... 그러면요. 흑!”
재민이가 옷소매로 눈가를 마구 훔치고는 도훈을 향해 간절한 표정을 했다.
“우, 우리 아빠, 술 좀 그만 마시게 해주세요!”
“......”
쩍!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그대로 도훈이 굳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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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승합차가 초등학교 교문을 나서자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수석에 앉은 영배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질문을 던졌다.
“부탁이 뭐랍니까?”
“... 아빠가 술 좀 못 마시게 해달라네요.”
“하하! 초등학생다운 부탁이네요.”
“하하하!”
다들 웃어넘기는데 정작 도훈은 웃지 않고 있었다.
“실장님.”
“하하, 네.”
“지구대 대장님이랑 아시나요?”
“지금 대장은 모르는 양반이고 팀장 중에는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알아봐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도훈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본 송두진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뭔데 그러십니까?”
“재민이 얘긴데···. 원래는 아빠가 술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었답니다. 마셔도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셨고, 술 마시면 항상 웃고 재민이한테 용돈도 팍팍 주고 그랬다네요.”
“... 그런데요?”
“갑자기 아빠가 변했대요. 한 한 달 전쯤부터 사흘이 멀다 하고 만취해 들어와서 엄마랑 싸운답니다. 그런데 정도가 심한가 봐요. 이웃에서 신고해서 경찰이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다녀갔을 정도라니까요.”
“... 저런···.”
그제야 모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단순히 아이가 투정부리듯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지구대에 재민이 부모님 사연을 알아보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경찰관들이 여러 번 출동했으면 뭔가 아는 게 있지 않을까요?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무슨 사정인지 알았으면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알아보죠.”
송두진이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영배가 굳어진 도훈의 표정을 보고 말을 걸었다.
“재민이 얘기가 그렇게 심각했습니까?”
“... 뭐, 그렇기도 했는데요···.”
“또 뭐가 있었습니까?”
울먹이던 아이를 떠올린 도훈이 고개를 돌려 학교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 첫 민원인인 셈이니까요.”
“민원은 많이 받았잖습니까?”
당선인 시절부터 여러 사람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은 도훈이었다.
뭘 도와달라느니, 뭘 해결해 달라느니, 뭘 지원해 달라느니···.
다만, 그들의 얘기는 예산을 조정하거나, 직원에게 업무를 맡기거나, 인력을 조정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설사, 당장 해결 불가능하다고 해도 시간을 두고 고민한다면 답이 나올만한 것들이었다.
재민이의 이야기처럼 뜬금없는 막무가내식 민원은 처음이랄까.
다만, 도훈이 마음 쓰이는 건 그 뜬금없고 막무가내식인 이야기가 너무 절실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 그렇게 간절한 민원은 처음이었거든요.”
“......”
담담한 도훈의 말에 영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을 태운 승합차가 학교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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