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첫 업무 지시.
“... 휴우.”
소형차를 몰고 출근하다 신호등에 걸린 대흥시 시장 비서실 직원 고정임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 이래도 괜찮은지 몰라.”
오늘은 새 시장의 임기 둘째 날.
어제가 일요일이어서 실질적으로는 오늘이 임기 첫날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어제 토사 붕괴 문제로 밤부터 출근한 새 시장은 실제로는 몰라도 겉보기로는 혼자 열일을 한 듯했다.
“... 나쁜 사람인 것 같지는 않은데, 눈치는 좀···.”
어제, 그제를 생각하던 고정임이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제는 아직 임기가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어제는 다른 비서가 출근했으니 고정임까지 있을 필요가 없다면서 퇴근을 종용했던 시장.
정임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자, 씨익 웃더니 이렇게 말했었다.
- 퇴근하세요. 시장 명령입니다.
이제 네 살 된 아기 엄마이기도 한 고정임.
새 시장이 자신을 배려하려는 마음인 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당선자 신분인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아기 엄마인 것을 알더니 근무 환경이 안정적인 다른 부서로 옮기는 건 어떠냐고 아주 조심스럽게 묻기도 했었으니까.
시장의 일정이 정시출근 정시퇴근이 가능한 것이 아닌 때론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면이 있는 게 사실.
당연히 비서실 일도 마찬가지였다.
-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비서실은 아무래도 제 일정에 영향을 많이 받잖아요. 안정적인 출퇴근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겠어요? 정임 씨가 좀 더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건 꼭 배려가 아닌 의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당선자의 말이 고맙기는 했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임보다 단 두 살 많은, 나이도 새파란 초짜 시장의 비서실.
정임의 새 동료인 비서관도 초짜, 관용차 기사는 논외로 하고 아직도 누구인지 모를 비서실장도 십중팔구 외부에서 영입된 인사.
다시 말해, 비서실 경력자는 오직 고정임뿐인 상황이었다.
“... 그런 판국에 어떻게 내가 마음 편히 다른 부서로 옮겨 가고, 집에서 애기를 보고 있겠냐고.”
정임이 가만히 투덜거렸다.
시장이 잘했으면 싶은 게 정임의 솔직한 속내였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사람이었지만, 선거운동을 지켜본 결과 허파에 바람 든 ‘뻥쟁이’는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과감히(?) 그에게 투표까지 하질 않았던가.
물론, 선거 다음 날 아침 뉴스를 보고 기뻐하기보다는 기겁했었지만.
“... 에휴.”
그런 정임의 속내를 짐작하는지 어쩐지, 마냥 실실거리는 영배와 초지일관 무덤덤한 도훈에게 조금은 속이 터지는 정임이었다.
끼익.
주차장에 차를 세운 정임은 뒷좌석에서 꾸러미를 하나 챙겨 시청사가 아닌 시의회 건물로 향했다.
그다지 굵지 않은 비가 밤새 드문드문 내렸지만, 별일은 없다 싶은 게 시청 청사가 조용했다.
사무실로 가지 않고 의회로 향하는 이유는 도훈의 첫 공식 업무 지시 때문.
- 내일 아침에 시의회 임시회 열잖아요? 정임 씨가 꽃 좀 사 들고 거기 가주세요. 전 내일 아침부터 동사무소,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인사하러 갈 겁니다.
새 시장이 새 의회의 첫 임시회에 참가하는 게 관례는 아니었으니 결례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젊은 신임 시장이 의회 의원들보다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게 문제였다.
의회도 초선이 다섯이나 됐지만, 3선 혹은 재선 의원이 의장이 될 게 뻔한 데 왠지 첫날부터 밉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걱정을 하며 본회의장 뒤편 방청석에 앉아 있는데, 의회사무과 과장이 정임을 알아보고 다가와 말을 건넸다.
“좋은 아침이야, 고 주무관, 시장님은?”
“안녕하세요, 과장님. 시장님은 유서면 면사무소에 가셨습니다.”
“.. 흠. 임시회에 얼굴 비치는 게 관례는 아니니까···.”
“... 그렇죠.”
“비서실장이라도 와서 인사하는 게 좋을 텐데···.”
과장의 마뜩잖은 표정에 정임은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당사자인 의원들이 아닌 의회 소속 공무원도 저렇게 나오는데···.’
정임의 당혹스러움은 다행히 길지 않았다.
- 지금부터 대흥시 시의회 제72회 임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말에 과장이 물러나며 정임은 해방되었다.
곧 그녀는 놀라운 현장을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목격하는 ‘산증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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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웃어주세요. 하나, 둘, 셋!”
찰칵.
기념사진을 찍는 의원들 곁으로 꾸러미를 든 정임이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 누구···?”
“시장 비서실 고정임입니다.”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하하!”
의장이 밝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고 다른 의원들도 대개 웃고 있었다.
구석에 선 이들의 구겨진 얼굴이 마음에 걸렸지만, 정임은 티 내지 않고 얼른 꾸러미에서 하나씩 뭔가를 꺼내 의원들에게 정중히 건네기 시작했다.
“약소하지만, 시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하하, 고마워요. 음, 백합이네요?”
정임이 꺼낸 것은 얇은 비닐로 포장된, 약간의 안개꽃으로 장식한 백합 한 송이.
전에는 의원 개개인에게 꽃바구니를 선물했던 것에 비하면 약소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정임이 그걸 걱정했더니 도훈은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 먹지도 못하는 꽃, 굳이 비싼 거 선물할 필요 없습니다. 꼭 선물해야 한다면 의미가 명확한 걸 선택하는 게 낫겠죠.
꽃을 받아든 의장이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백합이라···. 백합 꽃말이 뭐죠?”
“순결함 아니던가요?”
“그거 맞는데요. ‘진실’이라는 꽃말도 있습니다.”
“아, 그럼 이건 진실하게 의정활동 하라는 뜻이겠네요. 하하, 좋은 선물이네요.”
“뭐, 때 묻지 않은 순결하고 진실한 의원이 되라는 뜻도 되겠죠. 의미 있는 선물입니다.”
“그러게요. 하하.”
꽃을 받아든 의원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아 정임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구석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굳이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해석할 필요 있나?”
“그러게 말입니다. 겨우 꽃 한 송이인데.”
뭐가 불만인지 얼굴을 구긴 60대의 두 시의원.
“하하, 좋은 날이니 좋게 해석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 끄응.”
“그럼요. 꽃 한 송이일 뿐이더라도 의미가 선명하고 좋은데요.”
“... 커, 커험!”
신임 시의회 의장과 부의장의 말에 앓는 소리를 하고 헛기침을 하는 양상택과 서태기.
놀랍게도 초선의원이 시의회 의장과 부의장을 동시에 차지했다.
대흥시 시의회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의장님.”
“의미가 선명하다? 정말 그렇네요, 부의장님.”
의장, 부의장에 이어 다른 의원들도 도훈의 선물을 좋게 말하자 할 말이 없어진 양상택이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정임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나저나 주무관 혼자 인사하러 온 건가?”
“... 네. 시장님은 다른 일정이 있으셔서···.”
“쯧쯧, 시장이 임시회에 참가하는 게 관례는 아니지만, 비서실장이라도 와서 성의를 보여야지.”
“맞습니다. 이건 의회를 무시하는 처사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요, 서 의원. 겨우 주무관 혼자 와서 달랑 꽃 한 송이씩 나눠준다? 이거 참 황송하구먼?”
양상택과 서기태의 노골적인 비아냥에 정임이 어쩔 줄 몰라 하던 순간, 구원의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비서실장 왔습니다.”
“응?”
저벅, 저벅.
“하하, 죄송합니다. 저 뒤에서 지켜보다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반갑습니다, 의원님들. 신임 시장 비서실장입니다.”
고개를 푹 숙였던 정임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옆에 선 정장 차림의 남자를 바라봤다.
다부진 눈매를 가진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남자.
“... 소, 송두진?”
“... 네가, 아니 다, 당신이 비서실장이라고?”
놀란 것은 정임뿐만 아닌 양상택, 서태기도 마찬가지.
특히 양상택은 놀란 정도가 심한 듯, 살짝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 티, 팀장님?”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고정임이 얼떨결에 말을 흘리자, 송두진이 그녀에게 살짝 윙크하더니 신임 의장 앞으로 걸어갔다.
“취임 축하드립니다, 안준식 의장님. 시장 비서실장 송두진입니다.”
“하하, 반갑습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신임 시의회 의장과 신임 시장 비서실장이 굳게 악수를 교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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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쯤 정임 씨가 실장님 만났겠지?”
“아마도?”
“하하, 되게 놀랐을 텐데. 애 떨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설마.”
유서면 면사무소 건물 뒤편 커피 자판기 옆.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작은 플라스틱 지붕 밑에 나란히 선 도훈과 영배는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일찍 나와 면사무소 입구에 서서 출근하는 직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고 면장과도 차를 마시며 잠깐 대화를 나눈 직후였다.
“휴우, 이걸 이번 주 내내 해야 한다니···.”
“엄살 피우지 마.”
“야,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하기에 2주는 너무 짧단 말이야.”
불과 얼마 전까지 학원 강사였던 영배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사람.
선거운동 기간을 포함하면 2주가 아닌 한 달이 훌쩍 넘는 기간이었지만, 아직 이른 기상 시간에 적응이 덜 된 듯했다.
“그나마 여기니까 며칠로 끝나지. 서울이었어 봐, 몇 달은 걸릴걸?”
“... 에고.”
취임식을 안 하는 대신, 일일이 돌아다니며 인사하기로 마음먹은 도훈.
작은 도시지만, 동사무소 하나, 면사무소 셋, 상하수도사업소, 공공시설사업소, 도서관, 지구대, 안전센터 등 인사 다닐 곳이 제법 됐다.
당선자 때 이미 인사한 곳도 있지만, 시장으로서 정식 인사는 꼭 할 생각이었다.
“싫으면 하지 마. 비서관 자리 물어 줄 테니까.”
“누가 싫다고 했냐? 아직 적응 안 된 몸이 원망스럽다고 했지.”
“큭, 말이나 못 하면.”
“킥킥.”
두 사람이 실없이 툭탁대는데, 영배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고 그걸 확인한 영배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왜? 뭔데?”
“홍 주무관님인데 언제 올 거냐고. 말 만하면 지금이라도 차 끌고 오시겠다는데?”
“... 하하.”
도훈은 시장 전용차 기사인 홍영진에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신의 출퇴근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못 박았다.
어제 일로 도훈의 차 안이 진흙투성이가 된 터라 오늘 여긴 영배의 차로 왔지만, 앞으로도 출퇴근은 손수 운전해 할 생각이었다.
홍영진을 배려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몸이 불편한 걸 유지하기 위한 선택.
몸이 편해지면 마음도 해이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어제 조상님에게 혼나며 그 생각은 더 강해져 있었다.
“가자, 형. 순심이 눈 빠지겠다.”
“그래.”
순심이를 픽업하기 위해 도훈의 집으로 가는 길.
문득 송두진을 떠올린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시한 거 잘하고 계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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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대흥시청 비서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팀장님?”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내가 비서실장이야.”
“... 진짜요?”
“응. 왜, 싫어?”
“그런 게 아니잖아요. 너무 놀라워서···.”
“하하, 놀랍기만 해? 정말 싫은 게 아니고?”
“절대 아니에요!”
느긋하게 웃는 송두진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고정임.
그녀는 너무도 반갑고 기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3년 전 비서실로 발령받기 전 고정임은 송두진의 팀원이었으니까.
게다가 올해로 5년 차 공무원인 고정임에게 송두진은 한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존경스러운 선배였다.
“시장님도 조 비서관도 나빴어요.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이고···.”
“하하,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그리고 정임 씨한테는 특별히 더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지.”
“... 왜요?”
“왜긴? 깜짝 쇼는 깜짝쇼답게 해야 하니까 그랬지.”
“팀장님!”
“나 팀장 아니고 실장이야.”
“......”
얄밉게 싱글거리는 송두진의 모습에 고정임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됐든 업무 능력이 됐든, 자신은 송두진을 상대할 수준이 못 됐으니까.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시의회 의장에 선출될 거라 확신했던 3선 시의원 양상택이 질린 표정을 지은 이유.
정장 차림으로 시청 복도를 당당하게 걸어 비서실로 들어온 송두진의 모습에 직원들이 들썩이는 이유.
고정임은 그 이유를 잘 알았다.
‘... 당분간은 시장님이 아니라 실장님이 태풍의 눈이 되겠어.’
고정임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송두진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입을 열었다.
“고 주무관.”
“예, 티··· 아니, 실장님.”
“첫 번째 업무 지시를 내리겠네.”
“네.”
“지금 당장···.”
이어진 송두진의 말에 고정임이 긴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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