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2화 (13/279)

12. 담판, 혹은 거래 - 1.

불과 몇 초전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진 실내.

김용진의 눈빛은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지만, 강정문의 눈빛은 어느새 조금은 풀어진 채 다른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다름 아닌 호기심.

‘나이도 어린 얼치기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들고 왔기에 거래라고 하는지 궁금한가 보지?’

도훈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얼굴이 점점 더 달아오르는 김용진 대신 강정문이 입을 열었다.

“담판이 됐든 거래가 됐든, 일단 내용을 들어볼까요?”

“네.”

도훈이 핸드폰을 꺼내 조작한 뒤 테이블에 내려놨다.

- 드르륵.

- 안녕하십니까?

- 아이고! 먼저 와 계셨네. 안녕하세요, 당선자님.

- 허허, 이거 젊은 분을 시장 당선자로 만나게 되니 나 같은 늙은이가 점점 밀려나는 게 실감 납니다.

- 서른다섯이시죠? 제 큰딸이 마흔인데···.

- 반갑습니다.

“이게 뭡니까?”

강정문이 묻자 도훈이 재생을 중단시킨 뒤 답했다.

“제가 얼마 전에 시의원 당선자 세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먼저 만나자고 제안해서요.”

“... 혹시 우리 민의당 소속인가요?”

“네. 이건 그날 제가 녹음한 겁니다.”

“... 계속 들어봅시다.”

톡.

도훈이 액정을 건드렸고 녹음이 다시 재생됐다.

- 오늘 만남을 청하신 까닭을 듣고 싶습니다.

- 어이구, 우리 당선자님 성격도 급하시네요. 허허.

화기애애한 대화에 이어 곧 의미심장한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 우리 당과 함께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대화가 이어질수록 김용진의 눈에서 노기가 풀렸고, 강정문의 얼굴은 재미있어하는 표정이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김용진과 강정문의 얼굴이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

- 음···.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자면 지역경제과 기업지원팀장 강ㅁㅁ, 사회복지실 복지기획팀 남ㅇㅇ, 건설교통과장 이ㅎㅎ, 안전총괄과···.

정점에 달한 것은 ‘인재추천’에 뒤이어 ‘사업 제안’이 나왔을 때였다.

- 유서면에 말이죠. 아주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게 하나 있는데···.

- 그것도 문제지만, 우리 운계면에 당장 필요한 것이···.

강정문과 김용진이 녹음에 집중한 가운데,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던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재미있네요.’

- 뭐가?

‘저 두 사람 반응이요. 너무 정반대라서요.’

- 그건 그렇구나.

김용진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이를 악문 화를 참는 모습이라면, 강정문은 어느새 여유롭고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 연륜의 차이겠지. 저쪽은 초선이라며? 도지사는 4선이나 했고. 당연히 이런저런 일을 겪어본 정도가 서로 다르겠지.

‘... 연륜이라고 좋게 포장해 줄 필요가 있습니까?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정도가 다른 거겠죠.’

- ... 자식, 할 말 없게 만드네.

도훈과 조상님의 대화는 김용진이 입을 열면서 끊겼다.

- 오늘 저와 만나신 건 지역위원장님도 동의하신 겁니까?

- 김 의원? 하하, 그럼요.

“난 의원들이 김 당선자와 인사하러 만난다는 줄 알았습니다. 저런 이야기가 오갈 건 상상도 못 했어요!”

“... 그러시겠죠.”

항변하는 김용진을 무시한 채 도훈이 액정에 손을 대 녹음 재생을 멈췄다.

“이 뒷부분은 딱히 중요한 게 없어서요.”

도훈이 자세를 바로 하고 앉자 강정문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이 녹음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 그렇게 느끼신다면 당선자님과는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움찔.

일체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단칼에 자른 도훈의 시선이 김용진을 향하자, 강정문이 태도를 바꿨다.

“너무 성급하네요, 김 당선자.”

“강 당선자님처럼 닳고 닳은 사람이 아니라서요, 제가.”

화들짝.

옆에 앉은 김용진이 놀랄 정도로 담담하나 송곳 같은 도훈의 말에도 강정문은 눈썹조차 꿈쩍이지 않았다.

도훈과 강정문이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강정문이 먼저 반응한 것은 뒤늦게 뭐라 말을 꺼내려는 김용진을 제지한 뒤.

“담판 혹은 거래라고 했죠?”

“네.”

“원하는 게 뭡니까?”

“문제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만?”

“안다고 치고 한번 말해보세요. 손해 볼 것 없잖아요?”

“......”

도훈의 차분한 눈빛이 강정문을 향했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눈빛.

강정문을 응시한 그대로 도훈이 입을 열었다.

“이 녹음에서 설레발 치는 대흥시 시의원 두 사람이 시의회 의장이 안 되도록 해주십시오.”

도훈의 말에 강정문과 김용진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강정문의 변화는 찰나의 미미한 것이었다면, 김용진은 똥을 씹은 듯한 것에서 활짝 미소가 개화한 천지개벽 정도라고 할까.

아마 예상보다 이쪽에서 원한 게 대수롭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 그게 다입니까?”

“네. 다만, 조건을 하나 단다면 그 두 사람이 의장이 못 되는 이유가 저나 이 녹음 때문이라는 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흐음.”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강정문이 침묵했고, 김용진이 입을 열었다.

“... 그러면 그 녹음이 공개되지 않고 묻히는 겁니까?”

“네.”

반색한 김용진이 강정문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강정문은 도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도훈이었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얼굴 뚫어지겠습니다.”

“하하. 좋아요. 이 거래를 통해 김 당선자가 얻는 이익이 뭡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훌륭한 동료를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저히 못 봐줄 것 같은 의장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송두진이 도훈과 영배에게 내민 조건은 바로 양상택이나 서태기가 시의회 의장이 되는 걸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의장이 되면 어떻게든 그걸 배경으로 도훈을 쥐고 흔들어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를 꾀할 것이기 때문이라 송두진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주된 일은 시장을 돕기보다는 시의회랑 싸우는 것이 되고 말 거라나?

송두진이 비서실장 자리를 승낙하는 건, 두 시의원 말고 다른 사람이 의장이 된 걸 확인한 뒤라고 송두진은 못을 박았었다.

- 자네 능력 좀 보여 봐. 아마 어렵겠지만.

마지막에 얄밉게 보탠 그의 한 마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 도훈이었다.

아마, 불가능할 거로 생각하고 내건 조건일 터.

“의장이 아닌 그냥 의원도 충분히 시장을 골치 아프게 할 수 있을 텐데요?”

“뭐, 그건 제가 감당할 몫이고요.”

“......”

강정문이 침묵했고 김용진이 끼어들었다.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초선의원입니다. 의장이 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

“의원님도 초선이시죠?”

“... 예.”

“인수위 위원장 맡을 때, 누가 초선이 뭘 알고 설치냐고 안 하던가요?”

“......”

피식.

도훈이 간단히 김용진을 침묵시키자, 강정문이 빙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만약 그 거래를 거절한다면요?”

“......”

침착함을 유지하는 도훈과는 달리 김용진이 눈을 크게 뜨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강정문이 다시 손을 들어 올려 그를 제지했다.

“거래를 거절한다면 김 당선자는 어떻게 할 겁니까?”

“사실, 제가 여기 온 건 도지사 당선자님보다는 김 의원님을 뵈러 온 이유가 큽니다.”

“... 그래요?”

“네. 김 의원님이 대흥시가 소속된 지역위원회 위원장이니까 말입니다.”

“... 그래서요?”

“뭐, 김 의원님이 거절하시면 충청남도 위원장을 만날 생각이었고, 그다음에는···.”

“왜, 청와대라도 가게요?”

강정문이 비꼬듯 말했지만, 도훈은 담담함을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통령은 당적이 없죠. 대신 민의당 당 대표라는 분이 엄연히 계시죠, 아마?”

“... 그렇죠.”

“최종적으로는 당 대표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강 당선자님을 뵙고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도 강 당선자님만큼이나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분일 테니까요.”

“글쎄요. 여하튼, 당 대표조차 거절하면 어떻게 할 심산입니까?”

일절 표정변화가 없는 도훈이 답했다.

“시민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요.”

“... 대중에게 공개하겠다?”

“애초에 그게 옳은 걸 테죠.”

“... 흐음, 괜히 시끄러워지는···.”

“제가 시장 당선자가 아닌 일개 시민이었다면, 당연히 그 방법을 택했을 겁니다. 지금껏 미룰 필요도, 김 의원님이나 강 당선자님을 찾아올 필요도 애초에 없죠.”

강정문은 도훈과 시선을 교환한 채 말이 없었고, 김용진이 굳어진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 녹음, 김 당선자 생각보다 별일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판단은 유권자인 시민들이 직접 들어보고 내리는 게 맞는 겁니다. 저나 김 의원님이 이러쿵저러쿵할 필요가 없이요.”

“......”

잠시 세 사람이 말없이 자리를 지켰고, 도훈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넘어버렸군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

“거래에 응하실지 말지는 내일 정오까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더 드렸으면 좋겠는데, 작은 시 당선자일 뿐이지만 저도 할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도훈이 핸드폰을 챙겨 걸음을 옮겼다.

도훈이 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강정문이 긴 침묵을 깼다.

“김도훈 당선자.”

도훈이 고개를 돌려 강정문을 바라봤고, 강정문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우리 당과의 협조는 물론이고, 재선··· 어려울 겁니다.”

강정문의 말에 도훈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었다.

피식.

“... 제가 지금 재선 따위 손톱만큼이라도 고려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강정문, 김용진이 침묵하는 가운데 명백한 비웃음을 남긴 도훈이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남겨진 두 사람의 침묵이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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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시로 돌아가는 차 안.

- 인마,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려고 갔다가 더 키우면 어떻게 하냐? 시의원 제어하려다 국회의원에 도지사랑 척을 지면 어떻게 해?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습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쪽에서 일부러 자극하는데 꼬리를 내릴 수는 없었잖아요. 기세 싸움인데.”

- 아무리 그래도···. 어휴! 못 산다, 내가.

“... 이미 다 사신 것으로 아는데요.”

- ... 지금 농담이 나와?

“주변에서 도와주질 않으니, 저 스스로라도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해야죠.”

- 시끄러!

조수석에 앉은 조상님 귀신이 인상을 쓰고 호통을 쳤지만, 도훈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 막 나갔다는 반성은 안 되냐?

“... 좀 오버했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반성까지는 안 됩니다. 도지사가 일부러 저를 자극하는 게 뻔히 보였는데요, 뭘. 빈틈을 노린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는데, 화 안 내고 차분하게 마무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 겁나지 않아?

“겁날 게 뭐가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저 시장 만들어 준 것도 아닌데.”

- 허허, 이럴 때 보면 내 후손답지 않게 간 하나는 참 커요.

“전 다른 조상님의 후손이기도 하거든요. 그쪽 혈통은 좀 과감한가 봅니다.”

- ... 말이나 못 하면.

도훈이 알기로 조상님 귀신은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

한마디로, 견해가 다른 상대라고 해도 논쟁할 때가 아니면 동료로 예우하는 점잖은 선비.

다만, 그런 조상님의 노력이 별로 빛을 발한 적은 없었고, 그의 인생은 고난과 유배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다.

- ... 진짜 깔 거야?

“까야죠. 방법이 없는데.”

- ... 임기 시작과 동시에 시의회가 적이 될 텐데?

“... 생각이 제대로 박혔다면, 시의회 의원 모두가 적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일곱 중에 다섯이 초선이니까, 그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합니다.

- 그건 너무 낙관적인 예측이고.

“애초에 제가 시장이 된 게 조상님이랑 영배 형의 낙관적 예측이 초래한 일입니다.”

- ... 쩝.

“그리고 지금 제게 송 선생님은 그 정도 모험할 가치가 있는 분 아닙니까?”

- 쩝, 틀린 말은 아닌데···.

“집에 가서 얘기하시죠. 저 운전에 집중하렵니다.”

- ... 그래라. 이 벽창호 같은 자식아.

후손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조상님 귀신이 뒷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 흠, 이상해. 그 도지사란 놈 관상이 염치없고 지저분한 철면피는 분명히 아니었는데··· 왜 그딴 식으로 싸가지없이 나온 거지? 당최 이해가 안 가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조상님 귀신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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