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1화 (12/279)

11. 비서실장.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시청의 인수위 사무실.

탁.

“... 왔냐?”

“응. 아직 술 덜 깼어?”

“그런가 봐.”

책상에 늘어져 있던 영배가 도훈이 내려놓은 커피잔에 반색하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집 앞에서 포장해 온 거야?”

“형이 여기 커피 맛있다며?”

“흐흐, 자식.”

눈 감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향기를 맡는 영배.

“기분 괜찮아?”

“응. 솔직히 어제 전혀 안 놀라고 안 당황한 건 아닌데, 이젠 괜찮아.”

어제 송두진 부부와의 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영배와 따로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도훈은 이제야 친구를 다독이고 있었던 것.

“미리 상의하지 않은 건 미안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하지만 내가 널 모르냐? 너 인마, 내가 스스로 깨닫기 기다렸지?”

“맞아.”

도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영배가 피식 웃고 말을 이었다.

“아마 깨닫기만 기다린 게 아니고, 공부하고 노력해서 어떻게든 그 자리에 맞는 역량을 갖춰야겠다는 각오를 다질 것도 기다린 것 같은데?”

“그것도 맞아. 생각보다는 오래 안 걸렸어.”

“하, 이 잔인한 새끼. 넌 하여간 친구한테도 봐주는 게 없어.”

“그래서 친구가 몇 안 되나 보지.”

피식.

도훈과 영배가 서로를 마주 본 채 동시에 웃음을 흘렸다.

둘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떻게··· 승낙하실 것 같냐?”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어제 송두진은 끝내 승낙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즉석에서 거절당하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고, 비서실장을 고사하더라도 ‘고문’은 해주겠다는 얘기도 큰 성과였다.

그래도 송두진의 승낙 여부는 취임이 1주일 앞으로 다가온 도훈에게 아주 중차대한 문제였다.

“만약 승낙하신다 해도 계속 맡아달라고 할 건 아니지?”

“당연하지.”

“그럼 미리 그렇게 말씀드렸어야 하는 거 아니냐?”

“송 선생님이 그걸 모르시겠어? 자신이 우리 회초리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시간 벌어주기 용이라는 걸 말이야. 자신의 역할은 형이 어느 정도 준비될 때까지라는 걸 다 짐작하고 계실 거야.”

“흠.”

“내 임기 끝날 때까지 고문으로서 조언 듣는 건 계속하겠지만, 비서실장은 길어야 1년? 아니면 1년 반?”

“... 그건 나한테 달린 거지.”

“그래. 형한테 달렸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도훈의 모습에 영배가 인상을 썼다.

“하, 부담 팍팍 된다.”

“당연히 돼야지.”

“... 얄미운 자식.”

“허이고! 난 요즘 잠도 잘 안 와. 부담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 양반아.”

“뭐, 넌 더하겠지.”

“알면 입 좀 다물어라.”

마음을 연 사람들 앞이 아니면 표정변화도 거의 없는 도훈이지만, 그 속까지 평화롭기만 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오늘은 회의 없지?”

“대통령 모범 따라 월요일에는 가급적 회의 안 잡기로 했잖아.”

월요일에 회의를 잡으면 직원들이 주말에 일해야 한다고 주요 회의를 화요일 이후로 미룬 도훈.

정작 그 지침을 시행했던 청와대에서는 흐지부지된 모양이지만, 거긴 업무의 긴급함과 중요함에서 비교가 불가능한 곳이니까.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는데 도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리리.

액정을 확인한 도훈은 핸드폰을 책상에 올려놓고는 스피커폰 모드로 받았다.

“네, 선생님.”

- 통화 괜찮아?

“네, 말씀하세요. 영배 형도 옆에서 듣고 있습니다.”

- 흠, 밤새 고민했는데··· 결론을 내렸네.

“... 네.”

- 비서실장, 승낙하지.

벌떡!

송두진의 말에 영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 없이 환호했고, 도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

- 단, 조건이 있네.

“... 말씀하세요. 뭐가 됐든, 적극 수용하겠습니다.”

도훈의 옆에서 영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여 송두진을 비서실장으로 기용해야 한다는 뜻일 터.

- 내 조건은···.

송두진의 말이 이어지며 환하게 웃던 영배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진지한 표정을 한 도훈의 눈빛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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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간, 시청 청사 옆 대흥시 시의회 건물.

“아이고! 오셨습니까, 의원님.”

“일찍들 나오셨네요. 허허허.”

소회의실에 앉았던 다섯 명이 일제히 일어나 맞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양상택.

그를 포함해 소회의실에 모인 여섯 모두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의당 소속으로 대흥시 시의원에 당선된 이들이었다.

“어떻게 다들 준비는 잘 돼 갑니까?”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여유가 넘치는 양상택의 말에 답한 것은 50대의 남자 당선자.

“워크숍에서 많이 배웠는데도 그게 끝이 아니더라고요. 공부를 하는 게 아니고 공부할 걸 챙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습니다, 요즘.”

“하하, 열심히 하세요. 초선 때는 다 그렇습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이리 가다 부딪히고 저리 가다 빠꾸 하고 시행착오도 여러 번 거치는 겁니다.”

당선자에게 말한 것은 재선된 서태기 의원.

양상택과 서태기를 제외하면 모두가 초선인 상황에서 60대의 두 의원은 아주 여유가 넘쳤다.

그러나 여유 있게 웃으면서도 두 의원은 알게 모르게 서로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

의회 의원 7명 중 6명이 여당 소속.

당연히 여당에서 의장이 나올 테고 3선의 양상택과 재선의 서태기는 둘 다 그 자리에 욕심이 있었으니까.

말없이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지만, 양상택과 서태기는 속으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그냥 알아서 기어라, 응? 의장은 내가, 부의장은 네가. 모양 좋잖냐?’

‘... 허허, 선수는 딸려도 연륜으로는 안 밀리지, 내가.’

두 의원의 남모를 신경전은 비례 대표인 여성 당선자의 말로 중단됐다.

“그나저나 시장 당선자랑은 다들 인사하셨어요?”

“아, 예. 통화도 했고 오가다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요새 시청 인수위 사무실로 출퇴근하더라고요.”

“젊은 사람이 되게 의젓하던데요? 그러면서도 거만한 느낌 없이 인사는 꼬박꼬박 다 하고 말이에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당선됐겠죠.”

“하하, 틀린 말은 아니죠.”

당선자들이 쓰게 웃었다.

이번 대흥시 선거운동이 뭐가 잘못됐는지 제일 잘 아는 게 그들이었으니까.

“그 사람은 원래 사람이 그런지는 몰라도 되게 침착해 보이던데요? 우리나 그 사람이나 초선인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에요.”

“하하, 속으로는 바들바들 떨고 있을지도 모르죠.”

“에이, 그럼 티가 났겠죠.”

초선들의 도훈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인 게 많았다.

“잘 협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시장과 의회가 협력하면 더욱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죠. 지난번 의회는 시장님이랑 싸우기만 했잖아요.”

“그때야 야당이 다수였으니까요. 쩝, 우리가 이번에 의회 다수당 됐는데 정작 시장은 무소속이 되어버렸으니···.”

“아쉽··· 죠.”

“그러게 말입니··· 다.”

초선들의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한 건, 양상택과 서태기가 대화에 일절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뒤였다.

실내가 조용해진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서태기.

“그··· 시장 당선자랑 같이 다니는 사람 누군지 혹시 압니까?”

“선거 때 선대위 위원장 맡았던 사람일 겁니다.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조 뭔데···. 저도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서태기가 입에 올린 건 당연히 영배.

도훈과 만난 자리에서 ‘협잡꾼’ 소리를 듣고 도망치듯 빠져나오게 한 아주 불쾌한 ‘놈’이었다.

“당선자는 왜 그 사람이랑 같이 다닌답니까?”

“글쎄요. 물어보질 않았는데···.”

“아마 시장 취임하면서 비서실에서 일하지 않을까 싶네요. 비서실장을 맡길 수도 있는 일이고···.”

“하긴, 선대위 위원장이었으니까···.”

비례 대표 당선자가 말끝을 흐린 건 양상택과 서태기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걸 본 50대의 당선자가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에이, 시청에 얼마나 훌륭한 직원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을 비서실장으로 발탁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 하하, 뭐.”

당선자들이 어설프게 반응하는 가운데 양상택과 서태기는 도훈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자식이 아직 똥인지 된장인지를 모르는 건가?’

‘그 자리에서 사과했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우리 코앞에 다 보란 듯이 데리고 다녀?’

그날, 영배는 몰라도 도훈은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로 일관했었다.

도훈이 간간이 맞장구치며 끝까지 자신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던 것도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시의회 다수당인 여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혀 경험 없는 정치 신인의 어리숙함 때문이라고 양상택과 서태기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신들을 모욕한 영배를 인수위에 들였다?

‘... 초장부터 쓴맛 한번 제대로 보여주고 버르장머리를 들여야 하나?’

‘이거, 정치는 현실이라는 걸 확실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겠네.’

그렇게 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양상택과 서태기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씨익.

서로의 의중을 확인한 두 사람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두 선배 의원들의 모습을 안준식이라는 이름의 당선자가 탐탁잖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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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도훈은 대흥시가 아닌 다른 곳에 와 있었다.

“회의 끝날 시간 다 됐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차 드릴까요?”

“차는 됐고, 시원한 물이 좋겠네요.”

도훈을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던 여직원이 생수병과 컵을 놓고 물러났고, 도훈은 물을 마시고 긴장된 목을 축였다.

- ... 잘할 수 있겠냐? 너 이거 쉽게 생각할 일 아니다.

‘압니다. 그래서 긴장하고 있잖습니까.’

- 흐음. 그놈은 왜 하필 조건을 걸어도 이런 걸 걸어서···.

‘... 뭐, 성공만 하면 일거양득이잖아요. 그걸 위안 삼아야죠.’

- 쩝. 그건 그렇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 아니 이보다 어려운 일도 수없이 마주하게 될 거다.

‘그렇겠죠.’

-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잘해라.

‘네.’

따라오겠다는 영배를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떼놓고 혼자 온 도훈.

송두진의 조건을 듣고 난 뒤 잠시 고민했지만, 결론은 명확했다.

조건을 완수하면 송두진을 얻을 수 있어 좋고, 앞으로의 시정을 잘 풀어나가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문제는 송두진의 조건을 완수하는 방식이었는데, 도훈은 고민 끝에 그나마 가장 덜 시끄러울 방식을 택해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터였다.

‘... 언제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긴 한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도훈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남자 둘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 처음 만나는 거죠? 반갑습니다, 당선자님.”

“네. 저도 반갑습니다.”

정장 차림의 두 남자와 도훈이 차례로 악수했다.

진심인지 접대용인지 구별이 안 되는 미소를 보이는 두 남자.

아마도 도훈이 이렇게 먼저 연락하고 찾아온 게 기분이 좋으리라.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법이니까.

“제가 먼저 전화라도 해야 했는데···. 요즘 제가···. 하하, 김 당선자도 이해하시죠?”

“물론입니다. 당연히 바쁘시겠죠.”

상석에 앉은 인상 좋은 남자는 충청남도 도지사 당선자 강정문.

여당 소속 4선 국회의원 출신인 그는 별다른 흠집 없는 경력을 가진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갑자기 연락하셔서 놀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일이 좀 급해서요.”

옆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는 남자는 도지사직 인수위 위원장이자 대흥시와 인근 지역을 지역구로 하는 여당 초선 국회의원 김용진.

도훈이 아무리 시장 당선자라고는 해도 눈앞의 두 사람과는 여러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강정문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듯이 긴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좀 여유 있게 식사라도 함께하며 이야기하면 좋을 텐데요.”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갑자기 연락드렸는데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휴,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야죠. 하하.”

강정문과 김용진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도훈을 바라봤다.

단 10분이라도 좋으니 만나달라고 한 ‘급한 용건’을 듣겠다는 것일 터.

도훈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오늘 제 용건이 두 분을 불쾌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점, 미리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 예?”

초면의 나이도 한참 어린 사람이 불쑥 사과부터 하니 좀 어리둥절한 모양.

그런 두 사람에게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오늘 두 분과 담판을 지으러 왔습니다.”

“담··· 판이요?”

“예.”

일순, 얼굴이 굳어지고 눈빛이 날카로워진 도지사 당선자와 현역 국회의원.

“거래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차가운 인상으로 굳어진 두 정치인을 도훈은 담담하게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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