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9화 (10/279)

9. 까칠한 그 남자

“... 바쁘다는 데도 굳이 찾아오는 건 무슨 똥배짱인가?”

“하하, 저희가 좀 마음이 급해서요.”

“마음 급할 게 뭐 있어. 모르는 건 배우면 되는 거고, 나머지는 원칙대로 하면 될걸.”

“... 하하하.”

대흥시 외곽의 어느 단독 주택 옆.

도훈과 영배가 찾아간 곳은 드문드문 집이 자리한 사이사이 너른 밭이 있는 동네였다.

두 사람이 찾아간 사람은 집 옆 텃밭에서 밭일을 하고 있었다.

도훈과 영배가 인사한 뒤에도 여전히 일손을 멈추지 않는 것이 두 사람과의 대화에는 전혀 흥미가 없어 보였다.

“쉬실 겸 저희와 잠시 대화 좀 하시죠.”

“오늘 할 일 많아.”

“저희와 막걸리라도 드시며 잠시 휴식을···.”

“난 술 마시면 끝을 보는 사람이라 일할 때는 술 안 마신다네.”

“......”

고추밭의 잡초를 뽑는 남자의 느릿한 손길에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남자가 슬쩍 등을 돌리자 영배가 멋쩍은 표정으로 도훈에게 속삭였다.

“야, 어떻게 해?”

“쩝, 저렇게까지 나오시니 별수 없네. 따라와, 형.”

도훈과 영배는 인사도 없이 걸음을 옮겼고, 두 사람이 멀어지자 잡초 뽑던 남자가 슬그머니 뒤돌아보고 중얼거렸다.

“퇴직 공무원 많은데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저래? 귀찮은 놈들.”

불퉁거린 남자가 다시 돌아앉아 잡초 뽑기에 열을 올리길 얼마.

“송 선생님, 저희가 도와드리면 금방 끝나겠죠?”

“응?”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남자가 돌아보니 도훈과 영배가 밀짚모자를 쓰고 장갑까지 끼고 서 있었다.

도훈이 이따금 집에 갈 때마다 아버지의 일을 돕기 때문에 그의 차 안에 모자와 장갑이 준비되어 있었다.

도훈과 영배는 본격적인 ‘도우미’로 변신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

“... 저희가 도와드릴 테니까 밭일 빨리 끝내고 막걸리 한잔 하시죠!”

“......”

두 사람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밭에 들어서더니 제각기 이랑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풀을 뽑기 시작했다.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 풀 뽑은 뒤에 다른 일도 해야 해. 자네들이랑 얘기할 시간 없다니까?”

“그게 뭐든 도와드릴 테니까 얼른 하시죠.”

“아, 오늘 하루로 끝나는 일 아니야. 헛수고하지 말라고!”

“최소한 밤새워 일하시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

“일한 다음에 마시는 막걸리가 참 맛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

해맑게 웃는 영배의 모습에 남자는 말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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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밭 풀 다 뽑고 창고를 가득 채운 물건들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는 대정리에 또 뭔가 급하지 않은 게 뻔한(?) 일들을 마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캬아. 역시 일하고 난 뒤에는 막걸리야.”

“그러게 말이다. 하하.”

집주인 송두진 씨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도훈과 영배는 송두진의 집 마당 평상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송 선생님, 안 드십니까?”

“... 먹어야지.”

“하하! 이거 선생님 댁 김치가 아주 맛있습니다.”

“... 많이 먹어.”

막걸리와 두부는 도훈이 동네 슈퍼에서 사 온 것이고, 김치는 송두진이 냉장고에서 꺼내온 것.

아주 단출한 술상이었지만, 세 시간 넘게 땀을 빼며 일한 덕분인지 도훈과 영배는 게 눈 감추듯 술과 안주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막걸릿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도훈은 옆에 앉은 조상님에게 머릿속으로 말을 건넸다.

‘어떻습니까?’

- 나쁘지 않아. 아니 좋아. 아주 좋아.

‘진짜죠?’

- 이놈아. 내가 사람 관상 잘 보기로 한때 알아주던 사람이었어. 너도 내 사람 보는 눈 인정했잖아?

‘인정은 하죠. 하지만 100% 맞는 건 아니었잖습니까?

- 이번엔 믿어. 관상이 아주 확실해.

‘그래요?’

- 그래, 인마. 저 친구 관상을 보면 지나친 욕심도 없고 사특한 야망 같은 것도 없어. 명예를 중시해서 더러운 일에는 손도 안 댔을 것 같고, 한번 세운 뜻을 쉽게 꺾는 스타일도 아니야. 한마디로 원리원칙에 집착하는 소탈한 독불장군?

‘... 딱 맞네요.’

- 그렇지. 뭐, 네 녀석이 저 친구를 꼬실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도훈이 그렇게 조상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송두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잘난 사람들이 겨우 6급으로 퇴직한 나한테서 뭐 얻을 게 있다고 이렇게 넉살 좋게 비비고 있나.”

“하하, 저희보다야 아시는 게 훨씬 많으시겠죠.”

“... 크흠. 옛날 얘기야.”

“에이, 퇴직한 지 아직 2년도 안 되셨잖아요.”

송두진을 주로 상대하는 건 도훈이 아닌 영배.

아무리 까칠하다 해도 서글서글하게 웃는 영배를 막무가내로 다룰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하, 한잔 받으세요, 선생님.”

도훈은 이따금 한두 마디 참견할 뿐, 영배가 주도하는 송두진 공략은 한참을 이어졌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막걸리 다섯 병이 다 비워졌을 때는, 영배가 자료를 들고 궁금한 것을 찾아 물어볼 정도로 상황이 진척되어 있었다.

다만.

“아니야.”

“그렇지.”

“나도 몰라.”

“맞아.”

“그러면 되겠지.”

영배가 아무리 공을 들여 질문을 던져도 송두진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항상 짧았다.

상황이 그러하니 사람 좋은 영배도 슬슬 지쳐갈 수밖에.

영배의 말이 점점 줄어들던 어느 순간, 너른 앞마당 잔디밭을 보고 있던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 개가 뛰어놀기에 참 좋겠는데···.”‘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송두진의 물음에 도훈이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답했다.

“잔디밭이 넓고 잘 정리되어 있어 개들 뛰어놀기에 참 좋겠다고 했습니다.”

“... 그, 그런가?”

“네. 우리 순심이 데리고 왔었으면 좋아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순심이? 자네 개 키우나?”

“네. 매일 산책하러 나가지만, 제가 빌라에서 살아서 우리 순심이는 이런 잔디밭에서 뛰어놀아본 적이 거의 없거든요.”

“... 흠.”

“순심이한테는 조금 넓을 수도 있겠네요. 바우랑 누리가 왔으면 살판났겠어요.”

“바우? 누리? 걔들은 또 누구야?”

“아, 저희 아버지도 정년퇴직하고 시골에서 사십니다. 거기 집에 마당이 있긴 한데, 여기보다 훨씬 작거든요. 덩치 큰 셰퍼드 두 마리가 마음껏 놀려면 이 정도는 돼야겠죠.”

“셰퍼드? 바우랑 누리가 셰퍼드야?”

움찔.

“... 예.”

‘셰퍼드’란 말에 송두진이 아주 격하게 반응해 도훈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반쯤 포기했던 영배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 혹시 사진 있나?”

“... 예.”

“보여줄 수 있겠나?!”

“무, 물론이죠.”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듯한 송두진의 눈빛에 다시 찔끔한 도훈이 핸드폰을 조작해 순심이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귀, 귀엽군.”

송두진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고, 도훈과 영배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송두진이 사진을 넘기기 시작했다.

“흐음, 믹스견이지? 아무리 봐도 우리나라 토종 발바린데, 맞지?”

“... 맞습니다.”

“흐음, 여자애군. 체중은 잘해봐야 5kg이 안 넘겠네. 그렇지?”

“... 네.”

“몇 살인가? 중성화는 했나?”

“... 5살이고요. 저한테 오기 전에 중성화 수술했습니다. 유기견이었거든요.”

“아이고! 이 예쁜 녀석이 유기견이었다고? 쯧쯧! 인간들이란 진짜!”

“......”

말수 적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가고, 순심이 사진에 집중한 송두진은 떠버리로 둔갑해 있었다.

그렇게 흥분한 송두진은 도훈이 두 셰퍼드와 찍은 단 한 장의 사진에서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진에 정신이 팔린 송두진을 놔둔 채 도훈과 영배가 속삭였다.

“이게 뭔 일이라니?”

“내가 알겠냐? 개를 무진장 좋아하는가 보지.”

“... 좋으면 그냥 키우면 되는 거 아니야? 마당도 넓은데.”

“... 사정이 있겠지. 소리 좀 죽여, 형.”

한참 사진을 바라보고 있던 송두진이 핸드폰을 도훈에게 돌려줬다.

아쉬움 가득한 그의 눈빛에 도훈과 영배가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송두진이 막걸리와 안주가 다 떨어진 걸 보고 도훈에게 말했다.

“자네, 잠깐 나 좀 따라오게.”

“예?”

“술하고 안주 떨어졌잖아. 들어가서 좀 더 챙겨오자고.”

“아, 예.”

송두진을 따라 집 현관 앞에 선 도훈.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송두진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더니 도훈에게 말했다.

“놀라지 말게.”

“예? 무슨 말씀이신지···.”

“들어가 보면 알아.”

“......”

철컥.

드르륵.

송두진을 따라 집안에 들어선 도훈이 굳어졌다.

야아옹!

야옹!

야아아옹!

이야옹!

송두진이 들어서자 합창하듯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이어 고양이들이 ‘떼’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

“... 이, 이게?”

도훈은 미닫이문 앞에 굳어져 있는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간 송두진의 뒤를 일군의 고양이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야옹!

이야옹!

야아아옹!

“알았다, 이놈들아. 밥 줄게, 준다고!”

야아아옹!

이야옹!

야옹! 야옹!

‘... 합창이 아니고 아우성이네.’

도훈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두진이 분주히 오가며 고양이 밥을 챙겼다.

왠지 측은하게 느껴지는 송두진의 등에서 도훈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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