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미친 책벌레.
다음날 오후.
도훈과 영배는 대흥시의 어느 아파트 단지 상가 커피숍 앞에서 누군가와 헤어지고 있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또 도움될 일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 주세요.”
“말씀만이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한 선생님.”
“네. 수고해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도훈과 영배가 그가 멀어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신사가 적당히 멀어지자 먼저 입을 연 것은 영배.
“... 느낌이 어때?”
“글쎄···. 업무에 빠삭하신 건 똑같고···.”
“정년을 꽉 채우고 퇴임하셨으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고, 이건 내 느낌인데 저분은 아까 분과는 다르게 기대하는 게 있으신 것 같다. 뭐가 됐든 일 좀 시켜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느낌이었어. 복장부터가 좀···.”
“그래. 기대감 만빵인 건 나도 느꼈어.”
오후 2시부터 시작해 도훈과 영배가 만난 두 번째 사람.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그리고 다음에 만날 세 번째 사람도 모두 정년퇴직한 공무원이었다.
그것도 대흥시청에서 근무하다 최근 3년 이내에 정년퇴직한 공무원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좀 감이 잡혀, 형?”
“... 아직 멀었지, 뭐.”
“부지런히 읽고 외워.”
“... 넌 이걸 어떻게 하루 반 만에 뗀 거야?”
“그러니까 날 샜지.”
“하룻밤 날 샌다고 이걸 다 소화할 수 있다고? 인간이냐? 하긴, 넌 인간이 아니고 미친 책벌레였지.”
도훈을 향해 질린 표정을 지어 보이는 영배의 손에는 두툼한 책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엊그제 시청을 방문했다가 도훈이 받아 온 것으로, 대흥시의 공무원 조직 및 담당 업무부터 시작해서 각 부서가 추진 중인 사업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였다.
거의 사전 두께인 그 책자를 도훈이 영배에게 넘긴 것은 어제저녁.
영배는 책자를 숙지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두말없이 받아들었지만, 그 두께에 1차로 질렸고 도훈이 하루 반 만에 숙지했다는 것에 2차로 질렸으며 앞으로 읽을 건 더 많다는 소리에 3차로 질렸다.
그래도 어제, 자기도 도훈 흉내 낸다고 밤늦게까지 책자를 붙들고 낑낑거렸는데 반도 읽어내지 못했단다.
도훈이 피식 웃고 말을 이었다.
“내가 벼락치기엔 일가견이 있잖아. 내 학점이 형 거보다 더 좋았던 거 기억 안 나?”
“야, 벼락치기도 젊었을 때나 하는 거지. 아직도 그렇게 머리가 쌩쌩 돌아가냐?”
“내가 형보다 젊어서 그런가? 난 되던데.”
“... 어휴, 이걸 그냥 콱!”
으스대는 듯한 도훈의 모습에 영배가 과장되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집중했을 때의 도훈이 어떤 인간인지를 잘 아는 그였기에 이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물론, 도훈이 조상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건 꿈에도 모를 터.
“휴우, 그래서 다음은 어디야? 어디 커피숍이야? 커피도 계속 마시려니까 질린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커피숍 아니야.”
“응? 그럼 집으로 찾아가야 돼?”
“어. 그런데 약속을 못 잡았어.”
“뭐?”
“전화해서 잠깐 시간 내달라고 했는데, 바쁘다고 오지 말라고 하시더라고.”
도훈과 영배는 퇴직한 공무원들을 만나 이런저런 가르침을 청하고 있었다.
책자의 내용 중 궁금한 것을 묻기도 했고, 퇴직한 이들의 경험담을 듣기도 했다.
원래라면 한 시간가량의 대화로는 턱도 없을 테지만, 꼭 질문하고 경험담 듣는 게 전부가 아니어서 그 정도로 제한했다.
‘퇴짜’ 맞았다는 도훈의 말에 영배가 ‘살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야, 그럼 오늘 이걸로 끝이야? 다음에 가는 거야?”
“아니.”
“세 명이라며? 마지막 분은 바쁘다며? 그럼 오늘 못 만나는 거 아니냐?”
“... 세 번째 분은 앞으로도 계속 바쁠 거라면서 오지 말라고 했거든.”
“에이, 그럼 만날 생각이 없다는 거잖아.”
“그래서 더 흥미가 가더라고.”
“... 이건 또 무슨 청개구리 같은 소리냐?”
“일단 차로 가자. 가면서 이야기해.”
도훈이 앞장섰고 영배가 뒤따랐다.
곧 도훈의 낡은 SUV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무작정 찾아가는 거야?”
“응.”
“아이고···.”
영배가 잠깐 이마를 싸쥐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분 뭐에 꽂혔기에 그래?”
“까칠하신 거?”
“뭐? 잘못 들었다.”
“나하고 통화할 때 까칠하시더라고.”
“......”
“거기에 꽂혔어.”
“......”
말문을 잃은 영배가 눈만 깜빡거리는데 도훈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그분에 대한 평가가 흥미로웠거든.”
“평가? 누가?”
“형이 들고 있는 그 자료 받을 때, 그 자리에 부시장부터 시청 간부들 모여 있었어. 오늘 만나는 세 분도 그때 물어서 대답을 들은 거고.”
“그런데?”
“그때 세 분에 대한 평가도 들었거든? 그런데 우리가 만난 두 분에 대한 평가는 무난하다, 훌륭하다, 괜찮은 사람이다는 식이었는데 마지막 분에 대한 평가가 남달랐지.”
영배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남달라? 뭐라고 했는데?”
“... 능력은 있는데, 좀 모난 사람이다?”
“모가 났다? 웬만하면 그런 얘기 잘 안 할 텐데 어지간한 모양이네. 시청 간부들이 다 동료에 후배인 셈인데.”
“그래서 더 관심이 가더라고.”
“... 허, 참.”
“얘길 들어보니까 동료 직원들한테는 되게 깐깐한 양반이었나 보더라고. 직원이 아닌 시민을 대할 때도 그랬던 건 아니고.”
“호오?”
잠시 말없이 생각하던 영배가 뒤늦게 도훈의 의도를 알아챘다.
자신을 바라보는 영배에게 도훈이 씩 웃으며 물었다.
“... 이제 감이 와?”
“오냐. 이 약은 자식아.”
시장 당선자인 도훈과 비서실장 예정자인 영배에게 대흥시청과 시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동료.
그러나 당장에 도훈, 영배가 아는 시청 공무원이라곤 체육관에 탁구 치러 오가다 만난 문화체육과 공무원 몇이 전부였다.
당연히, 도훈, 영배와 공무원들의 ‘화학적 결합’이 잘 이루어질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시의원들의 말을 근거로 추정해보면, 시청 직원 여럿이 여당 혹은 전 여당인 야당에 줄을 대고 있었다.
도훈이 아닌 여야 어느 쪽이 당선됐더라도, 그쪽과 줄 댄 이들이 혜택을 봤을 게 틀림없었다.
물론, 공무원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문제는 여야에 줄 댄 이들이 대개 ‘간부급’이라는 데 있었다.
도훈이 시정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대흥시 공무원 전체가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간부는 당연히 더 중요하다.
아예 몰랐더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알게 된 이상 파악은 해야 한다.
그래야 대처방법을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 간부들에게 모난 사람이란 얘기를 들을 정도면, 최소한 그들과 한통속은 아니었겠네.”
“그렇겠지.”
“너 지금 만날 분 통해서 시청을 한번 쭉 훑고 싶은 거구나? 특히 간부들?”
“뭐, 그것도 있고···.”
“... 다른 것도 있어? 그게 뭔데?”
“... 나중에 말해줄게.”
“그래? 알았어.”
영배가 들고 있던 자료에 관심을 돌렸고, 도훈은 영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뒷자리에 느긋이 앉아 있던 조상님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 너 다시 생각해봐라. 저놈 저렇게 눈치가 느려서야 비서실장은커녕 뭔들 제대로 하겠냐? 비서실장이면 네가 척하면 알아서 착하고 알아듣고 움직여야 할 거 아니냐? 지금 시청은 너희들에게 호랑이굴이나 마찬가진데 말이야. 아니, 도대체 어딜 봐서···.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조상님의 잔소리에 도훈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는 안 붙잡는다고 난리더니 왜 그러십니까?’
- 저 스스로 너 돕는다고 나선 건 기특하다만, 애가 생각보다 영···.
‘... 조상님 눈에 찰만한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예전에 저한테 하셨던 일 기억 안 나십니까?’
- 그, 글쎄다?
도훈이 조상님 귀신을 만난 건 13살 때.
어머니가 동생 도연을 낳은 뒤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졌다가 끝내 돌아가신 지 1년이 되는 제삿날이었다.
한밤중 갑자기 나타난 조상님은 어머니의 영혼이 1년간 지극정성으로 빌어 자신이 나타났다며, 앞으로 도훈의 교육은 걱정하지 말라더니 대뜸 커리큘럼을 읊었다.
천자문까지는 괜찮았다.
논어, 맹자, 소학, 대학, 중용에 어쩌고···.
- 지금은 그런 책 안 읽는데요?
- 뭐, 뭣? 어허! 이런 세상에! 성학(聖學)의 도가 하늘에···.
- 성학이 뭔데요?
- ......
13살짜리가 뭘 알겠는가?
어쨌든, 그가 살던 시대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안 조상님 귀신은 다음날 도훈을 재촉해 ‘책이 많은 곳’을 찾아갔다.
학교 앞 서점 겸 문방구에서 퇴짜맞은 도훈은 한참을 걸어 시내에서 가장 큰 서점에 갔고, 거기서 대낮에 출몰한 귀신이 섬뜩한 안광을 발하는 걸 처음 목격했다.
그다음부터는 학교만 끝나면 의식을 잃더니 해 떨어진 다음에 서점에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 일은 무려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정도껏 하셨어야지. 저 그러다가 아버지하고 정신과 의사한테까지 갔었습니다. 기억 안 나세요?’
- ... 그, 그랬었지.
‘정치학, 행정학 관련 대학교재를 읽는 13살짜리가 세상에 어딨어요?’
- ......
‘제가 괜히 책벌레가 된 게 아니잖습니까!’
- ......
놀기 좋아하던 아들이 서점에 가서 대학교재를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도훈의 아버지는 도훈을 데리고 정신과에 찾아갔다.
의사는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그런 것일 수도 있다더니, 책에 과하게 몰입하는 건 나쁘지만 억지로 못 읽게 하는 것도 안 좋다고 했다.
도훈의 아버지는 고심 끝에 집 작은 방에다 서재를 만들더니 여기저기서 책을 얻고 헌책방에서 구매까지 해서 서재를 가득 채웠다.
서재에는 문학, 철학, 사회과학, 언어 등 다양한 주제의 책이 있었고 조상님 귀신은 1년 가까이 매달려 그 책을 다 읽어냈다.
그 지식은 조상님의 것이 됨과 동시에 고스란히 도훈의 것이 됐다.
그 이후로도 ‘강제’ 빙의는 아니었지만, 하도 조상님이 닦달하는 통에 서점에 가서 책 읽는 게 도훈의 일상이 됐다.
그 결과, 도훈의 별명은 중학교 때부터 ‘미친 책벌레’에서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저한테 했던 것처럼 직접 가르치시던지요.’
- ... 커, 커험.
조상님을 침묵시킨 도훈이 잠시 옛일을 회상했다.
‘서점 가자’, ‘책 보러 가자’고 고장 난 카세트처럼 귀에다 대고 ‘앵앵’거리던 조상님.
그 서슬에 울며 겨자 먹기로 서점에 살며 ‘희생’해야 했던 자신의 청소년기.
대학에 진학하고 도서관에 갔다가 활활 불타는 조상님의 눈빛을 보고 식겁하기까지 했었다.
‘... 세상에 저 양반처럼 책 좋아하는 귀신도 없을 거야.’
도훈의 시선이 영배를 향했다.
책자에 정신이 팔린 영배를 흘끔 한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내 덕에 산 거야, 형. 알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귀신이 책 귀신이야.’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