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5화 (6/279)

5. 만남 - 1.

다음날 오전.

“다시 말씀드리지만, 넓을 필요 없고 이것저것 잡다한 것 필요 없습니다. 그냥 책상, 의자 몇 개에 물 마실 수 있는 냉온수기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 그래도 인수위 사무실인데 구색은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담담한 도훈의 말에 답하는 중년의 남자는 은연중에 도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갖출 필요 없습니다. 오래 쓸 것도 아니고 사람이 몽땅 몰려와서 회의할 것도 아니니까요.”

“... 인수위니까 보고나 회의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요.”

“각 부서에 그 준비만 잘해달라고 전해 주세요. 직원들과의 인사는 오늘 간략하게 했지만, 제대로 된 인사도 할 겸 부서별 미팅은 제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것으로 하죠.”

“... 시장, 아니 당선자님이 부서를 도신다고요?”

“네.”

“아니,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그렇게 준비해주세요.”

“... 알겠습니다.”

도훈이 좀 단호하게 말하자 중년 남자가 마지못해 수용했다.

“그럼 일 보세요. 사무실 준비되면 연락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당선자님.”

중년 남자에게 묵례하고 걸음을 옮기는 도훈.

그가 향하는 곳은 대흥시 시청 청사 입구였다.

등 뒤에서 중년 남자가 한숨을 쉬는 게 느껴졌지만, 옆구리에 두툼한 책자를 끼운 도훈은 모른 척 걸음을 옮겼다.

당선 뒤 처음으로 시청을 찾아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도훈.

미리 연락해 그 어떤 격식도 차리지 말도록 했기에 시청 분위기는 평상시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요청했던 대흥시 시정 현황 자료를 받으며 부시장 및 간부들과 잠깐 차를 마시며 인사한 게 유일하게 형식을 따진 일.

이후 도훈이 직접 각 부서를 돌아다니며 인사하고 악수도 했지만, 시간도 짧았고 안내한답시고 간부들이 따라다니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볼일을 마치고 청사를 나서는 지금, 도훈의 곁에는 중년의 자치행정과장 한 사람만 붙어있었다.

“... 그렇게 안 봤는데, 왠지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네.”

멀어지는 도훈을 바라보며 과장이 중얼거렸다.

경계하는 듯한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서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 묻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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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청사 밖으로 나온 도훈은 자신의 낡은 SUV에 오르자마자 담배부터 꺼내 불을 붙였다.

“... 이게 뭐라고 되게 긴장되네.”

청사 안에서 보낸 1시간 내내, 여유 있고 자연스럽게 행동한 그였지만 마음속까지 편안했던 건 당연히 아니었다.

- 뭐, 그 정도면 첫 출발치고는 나쁘지 않다.

훤한 대낮인데도 조수석에 출몰(?)한 조상님 귀신이 말했고, 도훈은 얼른 주위를 살피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답했다.

“... 노력했으니까요.”

- 왜 주변을 살피냐?

“... 집에서야 보는 눈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밖에서 조상님과 대화하는 걸 다른 사람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 그냥 머릿속으로 대화해도 되잖아.

“... 그럼 실감이 안 나잖아요.”

- ... 깜빡했다. 내가 귀신이었지?

천연덕스러운 조상님의 말에 도훈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 별걸 다 깜빡하시는군요.”

- 너한테 붙어 지낸 세월이 20년이 넘잖아. 가끔 착각할 때가 있어.

“... 어쨌든, 앞으로는 조상님께서도 신경 써 주세요. 멀쩡한 후손 병원에 끌려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시면요.”

- 오냐, 알았다.

도훈의 손에 들린 담배를 무척 부럽다는 듯 바라보던 조상님 귀신이 말했고, 도훈은 차의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 영배 놈이랑 같이 오지 않은 이유가 뭐야?

“그냥요.”

- 같이 오겠다는 걸 극구 말린 이유가 그냥이라고? 이놈이 어디서 되지도 않는 공갈을 치고 있어?

“... 그냥 좀 넘어가 주세요.”

- 넘어가긴 뭘 넘어가? 인마, 너 영배 끌어들일 마음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

“쩝.”

정곡을 찔린 도훈이 입맛을 다셨다.

자신이야 ‘사건 당사자’고 한 번 열심히 해보기로 마음먹었지만, 아무리 절친이라도 그 선택을 영배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도훈이었다.

“저야 순심이만 먹여 살리면 되지만, 영배 형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보수는 적고 고생은 엄청 하게 될 게 뻔한데 어떻게 끌어들입니까?”

영배에게는 4살, 2살 남매가 있었다.

영배처럼 학원 강사이던 형수가 지금은 쉬는 이유도 그 애들을 돌보기 위함이었다.

더군다나 정치, 행정 쪽에 관심이 있었고 조상님 덕분에 관련 공부도 좀 한 자신에 반해, 영배는 정치적 성향이 도훈과 비슷할 뿐 이쪽에 완전한 문외한이었다.

다만, 다른 쪽에서는 영배가 도훈보다 더 정치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도훈이 기본적으로 까칠하고 심드렁한 성격인데 반해, 영배는 다정하고 살가웠으며 번득이는 재치를 자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선거 막판에 두 사람에게 익숙해진 선본 사람들이 역할을 서로 바꿨어야 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을 정도로.

- 아무리 공무원들이 시장 지시를 이행하고 보필한다고 해도, 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최소한 한둘은 있어야 한다.

“... 압니다. 아는데··· 그게 꼭 영배 형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죠.”

- 흠···.

“아직 취임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저도 고민 좀 더 해보겠습니다.”

- ......

조상님 귀신은 도훈이 이 얘기를 하기 싫어 둘러댄다는 것을 잘 알았으나 더 따지지 않았다.

사실, 아쉽기야 자신보다 도훈이 훨씬 더 아쉬울 텐데 저런 결정을 하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을 게 뻔했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도훈은 뒤늦게 핸드폰 2개의 전원을 켰다.

하나는 원래 쓰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인광고’ 목적으로 새로 개통한 것.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옷을 갈아입는데, 원래 쓰던 핸드폰이 울렸다.

“어. 왜?”

- 집에 갔냐?

“응.”

- 인사는 잘했어?

“내가 무슨 세 살 먹은 애냐? 그게 걱정돼서 전화했어?”

- 걱정··· 이라기보다는 궁금해서.

“어이구, 궁금할 것도 참 없네. 인사 잘했고, 별일 없었어.”

- 잘했다. 아, 참. 네 전화가 꺼져 있다고 나한테 여당 부위원장이 전화했더라.

여당 지역위원장은 초선의 지역구 국회의원, 부위원장은 이번에 세 번째로 당선된 시의원이었다.

“... 형한테? 뭐라고 해?”

- 오늘 저녁에 좀 만나자고 하던데? 나이 든 양반이 당선자도 아닌 나한테 아주 공손하더라.

“흐음, 그래?”

당선 인사를 시작했던 날, 낙선한 후보들을 시작으로 여야 각 당에 전화로 간략한 인사를 했었다.

시장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당연히 양 당의 협조가 필요했다.

선거 다음다음 날이었기 때문에 직접 만나기에는 좀 일렀다.

당선된 시의회 의원 일곱 중 여섯이 여당 소속인지라 여당 쪽에 더 공을 들였는데, 낙선한 후보에 이어 통화한 부위원장은 낙선한 사람보다 더 떨떠름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었다.

‘... 인제 와서?’

도훈이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영배가 말을 이었다.

- 만날 거야?

“... 못 만날 이유는 없지. 어차피 앞으로도 얼굴 보게 될 사람인데. 번호 알려줘.”

- 알았어. 내가 같이 갈까?

“형이? 저녁에 수업은 어쩌고?”

- 그건 뭐···.

얼버무리는 영배에게 도훈이 최대한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수한테 떠넘기지 말고 수업에 집중하세요. 조 선생님.”

- 쩝. 알았다. 전화번호는 문자로 보낼게.

“그래.”

통화를 마친 도훈에게 순심이가 달려들었다.

왈! 왈왈!

“그래, 그래.”

바닥에 앉아 순심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쓰다듬으며 도훈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 용건은 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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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음, 열심히 해.”

“물론이죠, 사장님.”

“쩝. 여당이 진 게 아쉽긴 해도 야당 시장보다는 자네가 낫겠지.”

“... 하, 하하하.”

“오늘은 앞으로 잘하라는 마음에 더 신경 써서 만들어 주겠네.”

“하하, 기대 하겠습니다.”

단골 중국집 사장과 인사를 나눈 뒤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도훈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중국관 사장은 평소엔 한없이 좋은 양반이지만, 화가 나면 물불을 안 가리기로 유명했다.

그 괄괄한 성격 때문에 젊어서 경찰서를 하도 들락거려 이혼도 여러 번 당할 뻔했다는 얘기를 무용담처럼 하는 사람이니 말해 뭐할까.

“... 이것만으로도 소정의 성과는 있네.”

굳이 중국관에서 만나기로 한 이유는 여당 사람과 만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혹여 모를 사장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4년 전, 대흥시에 이사 온 뒤 처음으로 개발한 맛집.

해장에 그만인 이 집 짬뽕과 울면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도훈이었다.

도훈은 가게에 단 둘뿐인, 홀과는 제법 떨어진 뒷방 중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점이라서 장식품도 하나 없는 소탈한 실내.

자리에 앉은 도훈이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약속 상대가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아이고! 먼저 와 계셨네. 안녕하세요, 당선자님.”

여당인 민의당 지역 부위원장 양상택을 필두로 들어선 건 세 사람.

셋 모두 도훈이 이름과 얼굴만 아는 여당 소속 시의원 혹은 당선자였다.

“허허, 이거 젊은 분을 시장 당선자로 만나게 되니 나 같은 늙은이가 점점 밀려나는 게 실감 납니다.”

“서른다섯이시죠? 제 큰딸이 마흔인데···.”

“반갑습니다.”

양상택과 다른 한 사람은 60이 넘었고, 이번에 처음으로 당선된 사람도 마흔이 넘은 나이.

간단하게 인사를 교환하고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고 건배를 몇 번 주고받은 뒤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전국에 구인광고를 하셨는데 지원은 많이 받았습니까?”

“건수는 많은데, 진지한 게 없습니다. 좀 더 기다려봐야죠.”

“하하, 난 그 뉴스 보다가 감탄했잖아요. 저렇게도 이미지 메이킹을 할 수 있구나 하고요.”

꿈틀.

‘... 이미지 메이킹?’

양상택의 말에 도훈의 눈가가 씰룩거렸지만,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안 그래도 최연소 기초단체장 당선자로 화제가 됐는데, 이미지 메이킹을 확실히 하셨어요. 허허허!”

“그것뿐입니까? 새벽부터 빗속에서 직접 쓴 플래카드 걸어놓고 당선 인사하는 것도 화제가 됐잖습니까. 저도 그걸 보고 나도 저렇게 할 걸 하고 무릎을 쳤잖습니까.”

“하하, 나도 그랬어요. 역시 젊은 사람이라 그런지 생각하는 것부터가 우리 같은 노땅들이랑 다르더라고.”

60이 넘는 두 시의원 당선자가 하는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에 도훈은 살짝 기분이 나빴다.

이미지를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마음이 급해 방송을 이용해 ‘구인광고’를 했던 것이고, 당선은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뒤늦은 고민 끝에 당선 인사에 나서느라 플래카드도 손수 쓸 수밖에 없었다.

비옷을 입었던 건 비가 와서였고, 영배와 단둘이 했던 건 그 새벽에 동원할 사람이 영배뿐이었기 때문.

도훈은 전혀 이미지를 고려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는데, 직업 정치인이라서 그런지 그런 것까지 ‘계산된 행동’으로 본다는 것이 꽤 불쾌했다.

평소 같으면 이미 성격을 드러내고도 남을 도훈이었지만, 상대는 엄연한 시정 파트너인 초면의 시의원.

상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 도훈의 성질을 억눌렀다.

“오늘 만남을 청하신 까닭을 듣고 싶습니다.”

“어이구, 우리 당선자님 성격도 급하시네요. 허허.”

애써 담담함을 유지한 도훈의 말에 양상택이 너스레를 떨었다.

도훈이 그에 응하지 않고 담담히 바라보자 헛기침을 한 양상택이 용건을 꺼냈다.

“제가 알아보니까 김 당선자님 성향이 우리 당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던데, 맞습니까?”

“... 글쎄요. 일부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하하, 원래 정치가 합의점을 찾아가는 고차원적인 행위 아니겠어요? 야당과도 철천지원수처럼 싸우다 협력할 때가 있는데요, 뭐.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면 거기서 시작하면 되겠지요.”

“요지가 뭡니까?”

“하하, 요지를 말하기 전에 또 건배 한번 하죠.”

쨍!

독한 배갈 잔이 단숨에 비워지고 또 채워졌다.

벌써 여러 잔을 비운 때문인지 모두의 얼굴이 발그레한 게 점점 술기운이 오르는 모습이었다.

불콰해진 얼굴을 들이밀며 양상택이 입을 열었다.

“우리 당과 함께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

여당 시의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훈에게 집중된 가운데, 도훈이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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