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믿는 구석 - 2.
- 믿는 구석? 너 혹시 내 얘기 한 게냐?
“... 네.”
- 허허, 네 녀석이 날 그렇게까지 믿고 있는 줄은 몰랐네? 얼마 전에는 그렇게 괄시하더니?
“... 그땐 제가 잘못하긴 했습니다만, 제 입장도 생각을 해보세요. 믿는 구석이 뭔지를 밝힐 수도 보여줄 수도 없잖습니까.”
- 허허, 그건 나도 유감으로 생각한다.
“... 공감하신다니 감사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요.”
머릿속에 전해오는 아주 점잖은 음성의 주인에게 도훈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눈까지 흘기고 있는 도훈의 머릿속에 다시 점잖은 음성이 전해졌다.
- ... 쯧쯧. 우리 정씨 집안에서 어쩌다 이런 예의 없는 놈이 나왔누. 인마! 눈 똑바로 안 떠!
“... 크흠. 뭐 이 정도로 예의를 찾으십니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리고 저 정 씨 아니고 김 씨거든요?”
- 네 어미가 정 씨 아니냐. 그럼 너도 정 씨 가문 핏줄인 게야. 요즘 세상에서는 남녀 차별 안 하잖아. 부모의 성을 모두 쓰는 사람도 있던데, 너는 어째 그 모양이냐.
“... 네, 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것이, 도훈은 아무도 없는 눈앞의 허공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 앞에 마주 앉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투였다.
“부족한 후손이 중차대한 고민에 빠져있는데, 겨우 눈 좀 흘긴 것 가지고 그렇게 타박을 하고 싶으십니까?”
도훈의 말소리에 양반다리 위에 드러누운 강아지 순심이가 살짝 눈을 떴다가 심드렁하게 콧김을 내뿜었다.
주인의 생뚱맞은 모습이 아주 익숙한 듯했다.
다행히 미친 게 아니라 실제로 대화하고 있는 도훈이었다.
본인 외에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도훈에게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무척 준수한 용모의 젊은 귀신이 또렷하게 보였으니까.
“... 이게 다 조상님 탓입니다.”
- 그게 왜 내 탓이냐. 결정한 것도 너고 실행한 것도 넌데.
“... 어렸을 때부터 제 머리에 불온한 사상을 주입하셨고, 강 시장하고 한판 붙었을 때 저딴 놈은 목민관의 자질이 없다면서 차라리 제가 훨씬 낫다고 꼬드기셨잖아요.”
- 불온? 꼬드겨? 너 말 다했냐?
“... 틀린 말은 아니···.”
젊은 귀신이 인상을 썼고, 도훈이 찔끔한 기색으로 입을 닫았다.
그러자 도훈이 이미 수만 번은 들은 것 같은 말이 귀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 네 어미가 너 잘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고 또 빌어서 내 다른 것 다 포기하고 딱 붙어서 가르쳤거늘··· 쯧쯧.
“......”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도무지 귀신을 당해낼 수가 없는 도훈이었다.
그렇게 당해온 세월이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말해 무엇할까.
도훈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귀신이 표정을 수습하고 말을 이었다.
- 아비랑 동생이 응원하니까 기운이 좀 생긴 모양이다?
“... 네. 아닌 게 아니라 실제 그렇네요. 선거 전에 통화했을 때 좀 충격을 받았거든요.”
- 쯧쯧. 인마! 네 아비고 네 동생인데, 어째 나보다 더 모르냐? 네가 애냐? 걱정돼서 하는 말은 적당히 걸러 들을 줄도 알아야지.
“평소라면 그랬을 텐데···. 이번은 평소 같은 일이 아니었잖습니까. 스케일이 좀 큽니까?”
- 그래 봤자 코딱지만 한 도시 시장인데, 뭘.
“코딱지요? 조상님은 5만 명이 살 정도로 큰 코딱지 보신 적 있습니까?”
- 풋! 틀린 말은 아니구나.
빙그레 웃는 귀신의 모습은 남자인 도훈이 봐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외가 쪽 조상인 귀신의 피가 도훈에게도 흐르고 있음인지 도훈도 귀신에게는 못 미쳐도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 덕분에(?) 유세 때 ‘고생한다’고 격려하는 아주머니들과 악수하느라 손이 매우 아팠었다.
“휴우.”
- 왜 어르신 앞에서 한숨이야?
“...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도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귀신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답했다.
- 난 거짓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번에 선거에 나왔던 그 누구보다 자질이 있는 게 바로 너야.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아무렴. 나 거짓말 못 한다니까? 그리고 안 그랬으면 내가 지금껏 내 곁에 붙어있었을 것 같냐?
“......”
- 나한테 배웠다고 해도 네가 만능은 아니다만, 부족한 건 주위에서 도움을 얻으면 된다. 이 동네 공무원만 300명이라며? 그럼 이미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300명이나 있는 거잖아. 네가 시장이면 그 사람들은 널 안 도와줄 수도 없는 거 아니냐? 뭐가 그리 겁나냐?
“... 쩝. 아무리 생각해도 제 원래 의도가 순수하질 않아서 말이죠.”
- 망할 강가 시장 놈 떨어뜨리고 말겠다는 거? 그게 어때서? 그런 탐관오리 낙마시킨 건 아주 잘한 거다.
“... 그래도 조상님이라고 좋게 말씀해주시네요.”
- 뭐, 그런 것도 없지 않다만, 네 자질이 훌륭한 건 그것과 상관없이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신이 말끝을 흐리자 방바닥을 향하고 있던 도훈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씨익.
매력적인 미소를 후손에게 선보이며 귀신이 말을 이었다.
- ... 너한텐 내가 있잖아. 믿는 구석이라며?
“... 하하.”
모호한 표정으로 웃고 만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저 ‘자뻑’만 아니면 참 좋은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상님 귀신의 능력만큼은 군 말없이 인정하는 도훈이었다.
또한, 도훈만 귀신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귀신이 생전에 모셨던 왕과 당대의 신료들은 물론이고 후대의 사람들도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이름만 대면 한국인 대부분이 알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질 않은가.
- 땅 꺼지게 한숨 쉬며 멍 때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딱 핵심을 잡고 그것만 집중적으로 생각해.
“... 예.”
- 주위에서 뭐라든 친구가 뭐라든 네 가족이 뭐라든, 최종 결정은 전적으로 네 몫이고 그 감당도 전적으로 네가 하는 거다. 알지?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
“... 예.”
- 잘 생각해봐.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귀신이 홀연히 사라졌고, 도훈의 시선은 방바닥의 상장케이스를 향했다.
푸르스름한 상장케이스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이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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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대흥시 외곽, 대전으로 연결되는 국도 진입로 인근.
각급 후보들의 선거 플래카드가 붙었던 자리에 낙선, 당선 인사 플래카드가 붙은 걸 달리는 차 안에서 본 누군가 중얼거렸다.
“... 벌써 선거 끝났네.”
“그러게 말이야. 왜 이렇게 안 오나 싶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지나갔어. 안 그래, 자기?”
“맞아. 기다릴 때는 몰랐는데 지나가고 나니까 ‘훅’ 하고 지나간 것 같아. 나이 들어서 그런가?”
“호호. 서른셋 먹고 그런 소리 하면 욕먹어.”
“자기밖에 듣는 사람 없으니까 괜찮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대전으로 출근하는 젊은 부부가 차 안에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당이 참패해서 속은 시원한데···.”
“시원한데 뭐?”
“여당이 잘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나도 그래. 대통령만 열일하면 뭐해? 당이랑 국회가 제 역할을 못 하는데?”
“이번에 국회의원 선거까지 같이 해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래야 발목 잡는 짓 더 못할 텐데 말이야.”
“뭐,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권력이 너무 집중되면 위험하지, 자기야.”
“그건 그렇지.”
곧 부부의 대화 주제가 전국 범위에서 자기 동네로 좁혀졌다.
“시장 당선자 당선 인사는 없네? 자기 혹시 봤어?”
“아니, 못 봤어. 장날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면서 유세하는 거 보니까 자금이 딸리는 것 같던데···. 플래카드 달 돈이 없는 거 아닐까?”
“흠, 그 정도일까나?”
“다른 후보 운동원들은 떼로 몰려다닐 때, 그 사람 운동원은 단 두 명씩 다니더라고. 열심히 하긴 하던데, 돈 없고 조직 없다는 거 되게 티 나던데.”
“그래도 당선된 거 보면 신기해.”
“다른 후보들이 너무 꼴불견이었잖아. 난 그 젊은 사람이 우선 욕을 안 해서 좋았어.”
“나도. 나랑 두 살밖에 차이 안 나는 사람이 딱 진정성 있는 공약만 걸어서 그 사람 찍었는데···. 당선 인사도 제대로 안 하는 건 실망···.”
남자가 말을 하다 뭔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왜 그래, 자기?”
“저기 좀 봐.”
“뭔데?”
진입로 신호등이 빨간불이라 부부의 차가 속도를 줄였다.
그런데 저만치 신호등 기둥과 전봇대 사이에 직접 손으로 쓴듯한 글씨가 써진 커다란 천이 걸린 가운데, 일회용 비옷을 입은 두 사람이 뭐라 뭐라 소리치며 반복해서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밑에 뭐라고 쓰여 있어?”
남자가 천의 글씨를 읽다가 맨 밑의 작은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인에게 물었다.
“... 대흥시장 당선자 김도훈 올림.”
인쇄된 것도 아닌 손으로 급하게 쓴 듯한 플래카드.
그리고 그걸 배경으로 서서 새벽부터 여러 사람이 아닌 단둘이 우중에 비옷을 입고 하는 당선 인사.
조수석에 앉은 부인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 뭐 하게?”
“그냥. 왠지 찍어야 할 것 같아서. 참 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좀··· 찡하네.”
“... 그러게.”
신호가 바뀌고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의 차들이 조금은 느리게 움직였고, 곧 그 이유가 밝혀졌다.
부인이 조수석 창을 살짝 내리고 지나가는데 차도에 바짝 다가선 도훈과 영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안전운전하세요!”
차 안의 부인이 손을 흔들자 도훈과 영배도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승용차가 속도를 내며 두 사람이 빠르게 뒤로 멀어졌다.
남자가 룸미러로 여전히 열심히 인사하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오늘은 왠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네.”
“응.”
부부의 입가에 비슷한 미소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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