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믿는 구석 - 1.
후룩!
후루룩!
후루루룩!
후루루루룩!
“... 그게 무슨 생명수라도 돼?”
국그릇에 고개를 처박은 두 사람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30대 여자.
전체적으로 선이 고운 가녀린 미녀인데, 눈매가 조금 매서워 성격 있어 보이는 게 특징이랄까.
역시 도훈의 대학 동기이자 절친인 윤진주의 말에 도훈이 국 표면에서 살짝 입만 떼고 답했다.
“생명수는 아니지만 해장수는 되지.”
“어휴.”
“국 더 있냐?”
“내가 너랑 오빠랑 어제 거하게 술 풀 줄 알고 솥째로 끓여놨다. 다 처먹어.”
“히힛! 역시 너밖에 없다.”
“남의 마누라한테 할 소리냐, 그게?”
도훈과 진주가 툭탁거리고 영배가 오로지 북엇국에만 집중하길 얼마.
큼지막한 솥의 북엇국을 몽땅 비운 두 사람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두드렸고, 옆에 앉은 진주는 가만히 커피를 마시다 입을 열었다.
“일단 축하는 해야겠지?”
“... 안 해도 돼.”
진주의 말에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
“축하는 해야지. 무려 시장에 당선된 건데.”
“... 쩝. 자꾸 되새기지 말아 줄래? 당장은 외면하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도훈의 말에 진주가 도훈보다 더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말을 이었다.
“휴우, 그러게 내가 뭐랬어?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너는 본전도 못 찾을 거니까 나가지 말라고 한 거잖아.”
“그랬지. 그래서 친구 패가망신할까 봐 전화도 열심히 돌렸고 남편도 꽤 닦달했지. 심지어 우리 준수도 친구들한테 입버릇처럼 얘기하고 다녔지. 엄마 아빠한테 너 좀 잘 봐주라고 하라고.”
“...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알긴 아냐?”
“조금만 덜 도와줬으면 더 고마웠을 텐데.”
“이걸 그냥 콱!”
지금은 전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진주의 남편은 학사 장교 출신의 육군 소령이었고, 준수는 10살 된 두 사람의 아들이었다.
서울에서 함께 대학을 다녔고 졸업한 세 사람이 대흥시에 살게 된 것은 진주 때문(?)이었다.
졸업과 거의 동시에 남편과 결혼해 아이를 낳은 진주가 남편의 계룡대 발령으로 대흥시로 이사했고, 이후 하던 일을 확장하며 도훈과 영배를 끌어들였으니까.
학교 다닐 때도 알바로 과외를 하던 진주는 결혼한 후에도 과외를 했다.
처음엔 과외로 시작했으나 점점 규모가 커지다 학원이 됐고, 지금은 대흥시에서 잘 가르치기로 입소문 자자한 학원 원장이었다.
대흥시에 오기 전 서울에서도 학원 강사였던 영배는 아직도 진주와 학원을 함께하고 있었고, 대흥시에 와서 처음 강사를 시작했던 도훈은 반년 만에 적성에 안 맞는다고 그만둔 차이가 있었다.
복잡다단한 일이 있었지만, 다행히 세 사람의 우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선거기간 동안 진주가 운동원으로 뛰지는 못했어도 보이지 않게 많은 도움을 줬다는 걸 도훈은 잘 알았다.
담담한 표정의 진주가 도훈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 그래서 어쩔 거야, 앞으로?”
“글쎄다. 고민 중이야.”
“설마 진짜 하려고?”
“그럴까 말까 고민 중이라고.”
“......”
진주의 눈에 걱정스러운 빛이 어렸다.
절친인 도훈의 ‘상처’를 모르지 않는 그녀였으니까.
얼마간 도훈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진주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말을 이었다.
“참, 너 아버지하고 통화했어?”
“아니.”
“뭐? 동생은?”
“... 역시 안 했어. 어제 자기 전에 핸드폰 꺼놓고 아직 안 켰어.”
“... 아이고 이 화상아!”
도훈에게 쏘아붙인 진주가 조용히 눈치만 보는 영배도 나무랐다.
“오빤 뭐 했어! 오빠라도 챙겨야지!”
“... 왜 갑자기 나한테 불똥이 튀어? 내 아버지, 내 동생도 아닌데.”
“오빠가 선대위 위원장이잖아! 그리고 친구잖아!”
“......”
영배가 말문을 잃은 가운데 도훈이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 가려고?”
“그래야지. 밥 잘 먹었다. 역시 해장은 윤 여사네 북엇국이 최고야.”
엄지를 치켜들며 웃는 도훈에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보인 진주가 정색하고 말했다.
“... 고민 오래 하지 마. 짧고 굵게 끝내.”
“그럴 거야. 오늘 안에 결정할 거야.”
도훈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등 뒤에 선 영배에게 시선을 줬다.
“왜? 형도 가게?”
“그래야지. 너희 집 가서 같이 고민하자.”
“수업 안 해? 어제부터 다시 강의 시작했잖아.”
“지금 그게 문제냐? 오늘은 와이프한테 대타 뛰라고 하지, 뭐.”
영배가 선거운동 기간 선대위 위원장으로서 맹활약(?)했지만, 선거운동은 그저께 이미 끝났다.
함께 고민하자는 영배의 마음은 고맙지만, 자신의 결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도훈은 모르지 않았다.
“그냥 있어. 혼자 차분히 고민 좀 해보게.”
“야.”
“됐으니까 수업 준비나 해.”
“......”
“아, 그냥 있으라니까.”
도훈이 여전히 엉거주춤 선 영배를 마뜩잖게 바라보는데 영배가 애매한(?) 표정으로 답했다.
“... 나 여기 안 산다. 너랑 같이 안 가더라도 내 집에는 가야 할 거 아냐.”
“......”
“둘이 만담을 찍어라, 아주.”
테이블에 앉은 진주가 비웃는 걸 귓등으로 흘리며 두 남자가 진주의 집을 나섰다.
“연락할게.”
“그래.”
돌아서 걷는 도훈의 귓가에 영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먼저 아버지한테 전화 드려. 알았냐?”
뒤돌아보지 않고 손을 대충 흔드는 도훈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와 통화할 걸 생각하니 안 그래도 막막한 현실이 더욱 암울해지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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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도훈은 전화가 아닌 집 청소부터 했다.
2주 정도의 선거운동 기간과 그 전 얼마간, 집은 파김치가 된 몸으로 들어와 단지 몇 시간 등만 붙였다가 나가는 곳이었다.
집에 들어올 여유가 없으니 순심이도 선거운동 본부에 데리고 나가 밥을 먹였을 정도.
당연히 집 청소 같은 건 신경도 쓰지 못했었다.
다만 어제 아침 일찍 투표를 끝내고 대청소와 밀린 빨래를 했기에 오늘은 할 게 별로 없었다.
청소를 마치고 엉덩이를 방바닥에 붙이고 앉으니 벽에 걸린 시계가 겨우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끼잉.
“오냐.”
앉자마자 무릎에 올라와 칭얼대는 순심이를 쓰다듬는 도훈의 시선은 바닥에 놓인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 엄두가 안 나네.”
핸드폰을 켜는 순간, 잠시나마 여유로운 이 순간이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선거운동 시작 직전 집도 이사했고, 3주만 사용하기로 했던 사무실도 어제 오후 청소하고 비워줘서 외부에 알려진 도훈의 거점이 없었다.
선거운동 본부 사람 중 도훈과 영배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자원봉사자 혹은 고용된 선거운동원들이어서 외부에 공개된 연락처 역시 두 사람 것뿐.
전화기를 켜놓은 영배는 새벽에 제일 먼저 연락이 온 방송국을 제외하고는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를 모두 씹고 있었다.
당선증을 받으러 갔을 때, 열 명이 넘는 기자들과 잠시 인터뷰를 하긴 했지만 분명 더 많은 기자가 도훈을 찾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기자들 말고도 연락한 사람이 아마 제법 될 터.
“... 무려 최연소 당선자라니까.”
푸념하는 도훈은 기자와 지인들보다 가족에게 연락할 게 더 걱정됐다.
시장 출마를, 그것도 무려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고 아버지와 여동생에게 전화했다가 들었던 말.
- ... 말세다, 말세.
- ... 오빠, 미쳤니?
경찰공무원을 정년퇴직하고 시골에서 유유자적하는 아버지와 이제 대학 졸업반인 11살이나 나이가 차이 나는 늦둥이 여동생.
가장 가까운 가족의 그런 반응에 도훈은 ‘두고 보라.’는 호언장담을 내뱉고 전화를 끊은 뒤 머리를 쥐어뜯었었다.
3년 정도 회사생활을 했을 뿐, 학원 강사 한다고 ‘탈서울’하고 그 강사 노릇도 반년 만에 때려치운 사람이 도대체 뭘 믿고 호기를 부리냐는 아버지와 동생의 말에 답할 말이 없었으니까.
“휴우.”
도훈은 한숨을 푹 내쉰 뒤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그러자 핸드폰이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윙! 위잉! 윙! 위이이잉!
한참 만에 잠잠해진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도훈.
“... 헐.”
부재중 전화 67통에 신규 메시지 93건.
많아 봤자 하루에 한 번 전화가 올까 말까, 메시지도 한 통 올까 말까 하던, 핸드폰이 아니라 시계에 가까웠던 걸 생각하면 천지가 개벽했다고 할 정도였다.
도훈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하는 대신 아버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리.
달칵.
- 오냐.
“... 뭐 하세요, 아버지?”
- 밭에 나와 있다. 왜, 무슨 일인데?
“... 아니, 그게··· 요.”
- 너 당선된 건 나도 알아. 그래서 메시지 보냈는데.
“... 메시지요?”
- 못 봤어?
“... 네.”
- 그거나 확인해 봐. 다른 용건 없으면 끊어. 나 바쁘다.
달칵.
뚜. 뚜. 뚜.
심드렁한 어투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도훈의 아버지.
“... 경상도 남자도 아닌 전라도 양반이 도대체 왜 이렇게 무뚝뚝 하신가 몰라.”
투덜거리며 메시지창을 띄운 도훈이 아버지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 축하한다. 이왕 된 것, 열심히 해라. (아버지)
전혀 의외의 내용인지라 눈을 깜빡이다 재차 메시지를 읽던 도훈은 뒤늦게 다른 걸 봤다.
“... 보낸 시간이··· 2시 15분?”
아침에 인터뷰한 기자에게 어제 개표기에 문제가 있어 개표가 늦게 시작됐다고 들었다.
당락이 최종 결정된 건 밤 2시를 넘어서였다는데, 당사자인 도훈은 기대가 전혀 없었기에 개표방송은 애초에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영배와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고 자정도 되기 전에 꿈나라에 가 있었다.
그런데 ‘말세’라고 핀잔했던 아버지는 도훈이 당선되나 안 되나를 끝까지 지켜봤던 모양이었다.
“... 에휴.”
한숨을 내쉬고 메시지창을 뒤적거리는데 비슷한 시간대에 여동생 도연이가 보낸 메시지도 있었다.
- 당선 축하해. 달려가서 도와주지 못한 건 미안한데 나 요새 인턴 하는 거 알지? 아빠랑 둘이서 기도는 열심히 했다. 아마, 아빠는 새벽마다 엄마 산소에 가서 엄마한테 오빠 잘 부탁한다고 하셨을 거야. 잘해서 멋진 시장 돼.
“... 쩝.”
겉으로 무뚝뚝해도 속으로 마음 쓰는 아버지였고 그런 아버지를 똑 닮은 자신, 반쯤 닮은 동생이었다.
기자나 지인들의 전화와 메시지가 넘쳐났지만, 아버지와 동생의 응원 메시지보다 더 도훈의 머릿속을 맑게 해주는 건 없었다.
“흐음.”
도훈이 저만치 바닥에 놔둔 당선증을 바라봤다.
당선증을 바라보며 도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믿는 구석도 있는데, 미친 척하고 한번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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