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새로운 시대로(完)
블러드 로열의 중앙 광장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평상시에도 유동 인구가 많은 장소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당연한 광경일지도 모른다. 발 디딜 곳 없이 꽉 찬 광장을 통과한 란랑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곳도 이미 귀족과 관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목적지로 향하려면 빙 돌아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뒤쪽으로 빠져나가는 건데.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원망하려면 이 행사의 자리를 이렇게 나눈 기획자를 원망해야겠지.
그렇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두 진형을 나눠놓지 않았다면, 분명 걷잡을 수 없는 사고가 발생했을 터다.
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무대 앞에는 좌우로 귀빈들의 자리가 나뉘어 있었다.
좌측에는 델리아 신성제국을 대표하는 귀족들이.
우측에는 한때 마족이라 불렀던 연 제국을 대표하는 관료들이.
서로 반목했던 역사가 길었던 만큼, 두 진형을 바라보는 고위 인사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표면에서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이는 없지만, 한숨을 비롯해 혀 차는 소리. 귓속말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란랑의 귀에 들렸다.
마족과 우리가 왜 같은 자리에 있는지. 어째서 이런 자리를 만든 건지. 성녀님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몇 번이고 들은 만큼, 하나 같이 특이할 것도 없는 내용이다.
이 자리를 달갑게 여기는 사람보다,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훨씬 많았으니까.
무대 안쪽으로 들어선 란랑은 길게 늘어선 줄을 성큼성큼 지나쳤다.
줄을 선 손님은 열이면 열, 제국의 관계자들이다. 사용인을 대동한 귀족들이 이런저런 선물을 들고 있었다. 진귀한 물품은 물론이고, 먹을 것을 비롯해 신기한 동물을 가져온 이도 있었다.
두 손이 빈 란랑을 관계자라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녀의 발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문 앞에서 손님을 받는 것은 낯익은 쌍둥이 시녀였다.
다가오는 란랑이 보이지도 않는지, 루인과 마린은 한 사용인이 건네준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공녀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자리에 계신가요?”
“죄송합니다. 공녀님은 지금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지라. 개인적인 용무는 차후에…. 란랑?”
이제는 완전히 익숙한 얼굴이다. 란랑을 본 두 시녀는 밝은 표정을 띠었다.
“오랜만에 뵈네요. 피차 바쁠 텐데. 행사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나요?”
“그쪽은 소피아가 힘내고 있어요. 딱히 제가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요.”
“음, 별로 든든한 소리는 아니네요.”
“당구풍월(堂狗風月).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죠. 소피아도 예전의 그 아이가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악마의 침공으로부터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황녀 전하를 보좌하는 데 미숙함이 많던 시녀는, 이제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사용인이 되어 있었다.
란랑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마린과 루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란은 안에 있나요?”
“네, 집사님이라면 아가씨를 보좌하고 있답니다.”
이야기는 행사가 끝난 뒤 나누기로 한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으니까.
두 사람과 함께 란랑은 안쪽으로 향했다.
안쪽도 소란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행사 준비로 바쁜 루드비히 가의 식솔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다. 본가에서 사용인 대부분을 데려왔지만, 이번 행사는 그 규모부터가 남달랐다.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른 방은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좀 지나가겠습니다.”
마린과 루인이 있음에도 길을 만드는 것이 힘들다.
가까스로 축하 손님들 틈을 빠져나간 란랑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가씨. 반가운 손님이 왔습니다.”
고풍스러운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나타난 얼굴은 익숙한 남자였다.
알베르트 란.
검은 연미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집사가 세 사람 그녀들을 맞이했다.
“란랑?”
“안녕, 란. 들어가도 되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란랑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일종의 의상실이었던 모양일까. 화려한 옷으로 가득 찬 방은 생각외로 공간이 넉넉했다. 알베르트를 지나친 란랑은 찬란한 금빛과 마주했다.
“축하해주러 온 거야, 란랑?”
오늘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아리시엘 루드비히다.
붉은 머리의 시녀, 노아가 아리시엘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전통복을 차려입은 화려한 그녀의 모습에 일순간 말문이 막혔던 란랑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뇨. 우리 황녀 전하께서 몹시 화가 나셔서 말이죠. 어디의 집사분이 왜 안 오냐고 성화시네요. 혹시 짚이는 바가 있는가 해서 이렇게 찾아왔답니다.”
“그래? 그거 알이 잘못했네.”
날 선 란랑의 어조에 아리시엘은 짐짓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이 착실한 남자는 아가씨가 허락하지 않는 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알베르트가 황녀 전하를 찾아오지 않은 건, 그녀가 발을 잡았기 때문이겠지.
그 증거로 서운하다는 듯 알베르트의 얼굴이 죽어 있었다.
한심한 표정이나 짓고 있고. 란랑은 입가를 찌푸렸다.
“황녀 전하가 주는 선물이에요. 가능하시다면 이걸 하고 올라오면 좋겠다고 하시네요.”
“과연, 그 성격 나쁜 여자가 머리를 좀 썼네.”
“아가씨. 유피는 성격이 나쁜 게 아니라….”
“그래. 그래. 솔직하지 못할 뿐이라는 거지? 질리도록 들었으니까 그만 말해도 좋아.”
“…….”
집사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긴 아리시엘은 손을 들었다.
머리를 손질하던 노아가 손을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란랑이 준 물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알.”
“네, 아가씨.”
“보고 올래?”
주어가 생략됐지만, 누구를 말하는지 알고 있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끝나고 만나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경우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란랑과 같이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시녀는 괜찮지만, 알베르트는 이야기가 다르다. 안 그래도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지금, 이야깃거리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는데?”
아, 재수 없어. 이래서 오기 싫었던 건데.
아리시엘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본 란랑은 얼굴을 구겼다.
*&*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한 게 한다.
알베르트는 무대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을 보고 생각했다.
델리아 신성제국과 연 제국.
최악에 가깝던 두 나라가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날이 올 줄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이제는 곁에 없는 파트너를 떠올리며 알베르트는 중얼거렸다.
공통의 적을 마주한 두 제국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타격을 받았다.
북부 장성에서 캘러미티의 침공을 저지한 연 제국도 그렇지만, 델리아 신성제국이 받은 타격은 엄청났다. 쑥대밭이 되어버린 황도. 무너진 블러드 캐슬. 파괴된 세인트 월은 단기간 내로 복구할 수 없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전부 들러붙어도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르는 대작업이다.
언제 다시 캘러미티가 침공할지 모를 그 상황에서, 손을 내민 것은 연 제국이었다.
“왜 그래, 알?”
“아뇨. 성녀님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아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성녀 프랑소와.
대기적을 쓴 반동으로 지금은 몸이 여의치 않은 그녀는 무대가 보이는 건물 위에 있었다. 은색이 아니라 이제는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이 보였다. 귀빈만이 앉을 수 있는 반대쪽 자리에는 하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선녀의 모습도 보였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종교의 귀빈이다. 상석을 준 것도 당연한 일이다.
행사장에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귀빈들이 넘쳐났다.
압둘레이 공화국의 의장을 비롯해 마탑의 대마법사, 카라스 크로만. 연 제국의 마녀인 발푸르기스의 자매. 강의 마녀인 루이스와 호수의 마녀인 에르체베트의 모습도 보인다. 각 가문의 유명 인사가 한자리에 모여있다. 서로 나누는 인사와 소개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겠지.
전 대륙이 주목하고 있는 협정이다.
이번 협정이 이뤄짐에 따라 대륙의 판도는 크게 바뀌게 되겠지.
모노클이 잘 어울리는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금일, 이 영광스러운 자리의 사회를 맡게 된 셀렌느 크로만 후작입니다. 먼저 이 자리에 모여주신 대륙의 귀빈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소란스럽던 광장이 조용해졌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는 셀렌느 후작이 능숙하게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과는 별개로 알베르트는 무대를 응시했다. 마침 셀렌느 후작의 과장된 동작과 맞물려 은빛과 금빛이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델리아 신성제국의 수호신. 루드비히 가의 차기 당주, 아리시엘 루드비히입니다.”
“연 제국의 13황녀, 유피에르 바토리 황녀 전하입니다.”
무대에 올라온 것은 두 여성이었다.
두 제국의 협정이 이루어지는 금일. 역사의 산증인이 될 두 사람이다. 찬란한 금빛과 별무리가 지는 은빛의 여인. 자국의 전통복을 입은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했다.
“돌이켜보면 정말로 긴 전란의 나날이였습니다. 상처와 아픔으로 물들었던 지난날이 오늘까지도 우리의 발을 묶고 있었습니다. 나아갈 길을 잃고, 반목을 번복했던 우리가 이제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분쟁이 이제 막을 내립니다.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은, 여태껏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길입니다. 평화의 시대. 서로를 향해 들었던 검을 내리고, 피가 아닌 풍요의 결실을 나눌 때가 왔습니다.”
새로운 시대.
인간과 마족이 손을 잡고 아직 보지 못한 미래로 나아가리라.
“전쟁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이 앞으로 있을 평화의 길을. 우리는 함께 걸어갈 것이라고 맹세합니다.”
찰나의 침묵.
이윽고 광장은 환호성에 파묻혔다.
*&*
행사가 끝나고 난 뒤, 무대의 뒤편으로 찾아간 알베르트는 지친 표정으로 늘어진 두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피곤해.”
“고생하셨습니다, 아가씨.”
“이 정도로 힘들어하다니, 아직 멀었구나.”
아리시엘은 어깨를 덮은 거추장스러운 숄더를 벗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외투를 받은 알베르트는 유피를 보았다. 한쪽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그녀는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입가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맺혀 있다.
“괜찮은 척하기는. 너도 얼굴이 파리해졌거든. 혹시 말실수라도 한 건지 몰라.”
“만약 내가 그랬다면 옆에서 다리를 너무 떨어대는 누구 씨 때문이겠지.”
“누, 누가 다리를 떨었다는 거야?”
발끈한 아가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유피는 태연하기 짝이 없다. 화를 내는 것도 바보 같이 느껴진 걸까. 머리 옆으로 내려오는 장신구를 매만진 아리시엘이 말했다.
“이틀 후에는 연 제국이라고 했지? 그냥 나 말고 폐하가 하시면 안 되는 거야?”
“폐하는 바쁜 분이십니다.”
“어머,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닐까?”
“유피.”
“뭐, 우리도 할 말은 없지. 시더 오빠도 그렇고, 아벨 오빠도 안 왔으니까.”
나름 고위 인사들이 모였다고는 하지만, 최종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리인을 보냈을 뿐이다. 모양새만 흉내 냈을 뿐인 협정일지도 모른다. 반목이 길었던 만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겠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다.
첫 단추를 끼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다.
“아가씨. 아직 멀었나요?”
“황녀 전하. 슬슬 준비하지 않으시면….”
바깥에서 두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대 위에서 치르는 행사가 끝났을 뿐이다. 이제 각 나라의 고위 인사들을 만나야 하는 가장 귀찮은 절차가 남아 있었다. 이번 협정이 연례가 없는 일이다. 일이 끝나는 것은 아마 깊은 밤이 되고 난 이후겠지.
유피와 아가씨도 알고 있다. 그녀들의 싸움은 지금부터다.
“가자, 알.”
“가자, 알.”
돌아보는 두 여인의 모습을 보며 알베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어디까지나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
그토록 원하던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
마탑의 한편.
그 공방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느 마법사가 그러하듯 공방은 마법서와 알 수 없는 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청결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장소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집사 덕분일까. 공방은 생각보다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마법사 카라스의 수제자인 아리시엘의 공방이다.
이후 제국을 이끌어갈 촉망 받는 인재로 꼽히는 그녀를 위해, 제국은 투자를 아끼고 있지 않았다. 주인이 부재중인 공방 안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초상화가 보였다. 별무리가 지는 은빛의 여인과 부드럽게 웃고 있는 집사. 쌍둥이 시녀와 나이가 다소 들어 보이는 붉은 머리의 시녀. 제국과는 다른 복장을 한 남자와 여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소중한 인연이 그려진 밑으로는 한 책상이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 위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천칭 저울이 있었다.
최근 아리시엘이 심혈을 기해서 만들고 있는 마도구다.
정령석과 마석을 원료로 삼은 천칭 저울은 외계와 접촉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근시일 내에 숲의 마녀인 유피에르에게 보일 그 마도구가, 기분 탓인지 살짝 기울었다.
「들리십니까, 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