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천칭(2) (199/200)

 # 199

천칭(2)

알베르트가 자아내는 검무는 멈추지 않는다.

꽃이 피어나고, 그 아래로 빛이 흩날렸다. 아름답다는 걸 넘어 환상적인 광경이다. 한낱 하계의 인족이 만든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소년은 빛과 꽃 사이를 거닐었다. 한 걸음만 삐끗해도 사선으로 향하게 될 길을, 그는 여유롭게 나아갔다.

고개를 물리고, 발을 빼고, 지면에서 가볍게 떨어진다.

필사적인 알베르트에게는 미안하지만, 겨우 그것만으로도 그의 검은 소년에게 닿지 않았다.

압도적인 수준 차이.

아무리 알베르트의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그건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족의 관점이다. 시대의 산증인과도 같은 소년의 눈에는 우스워 보일 따름이다.

「너희 인족은 시간이 흘러도 배우는 것이 없구나.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서. 대체 뭐가 남는다는 거지? 분쟁은 아무것도 낳을 수 없어. 탄생이 아닌 파괴만을 가져올 뿐이지. 아직도 모르겠어? 힘은 그저 수단에 지나지 않아. 네가 손에 넣은 힘이 널 이 자리로 데려온 거야. 이곳에 앉아 나와 이야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준 거지.」

대화에 귀를 기울일 이유는 없다.

녀석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두른다.

「널 보고 있으면 이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하계의 손님이 생각나네. 그때 이곳을 방문했던 손님은 둘이었지. 한 명은 너희 제국을 대변하는 기사. 한 명은 무림을 대변하는 무인. 둘 중 하나를 이곳에 두고 가면 침공을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선택을 했거든. 그게 뭔지 알아? 바로 힘을 합쳐 이 몸을 향해 검을 든 거야. 승산 따위 있을 턱이 없는데 말이지.」

웃음기 가득한 소년의 목소리에 알베르트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말하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꽤 분발했지. 인족의 몸으로 그만한 힘을 지닌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거든. 그래서 자비로운 난 녀석들에게 죽음이 아닌 난제를 주기로 했어. 건방진 인족에게 어울리는 숙제를.」

그건 정말 재밌었다니까. 킥킥, 하고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죽지 않는 몸을 주고, 서로의 기억을 지운 채, 언젠가 두 사람이 약속의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죄인에게 내린 저주를 거두겠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해? 아, 너는 알고 있겠구나. 그 두 사람을 실제로 만났으니.」

“---!”

뿌드득, 하고 알베르트의 어금니가 갈렸다.

월아의 빛이 일순간 짙어졌다.

어둠을 가른 검붉은 강기가 소년을 향해 뿜어졌다.

악마를 베어낸 빛을 본 소년은 손을 내렸다. 월아의 빛은 소년을 삼켰다. 날카로운 감각이 몸을 덮쳤다. 미약한 통증.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고통일까. 빛에 삼켜진 소년이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까! 우리가 이 무의미한 다툼을 벌이는 사이에도 하계의 인간이 죽어가고 있어. 네 선택은 뭐지, 하계의 손님?」

“…….”

알베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월아를 휘둘렀다.

*&*

눈앞에서 오가는 빛은 보이지 않는다.

천칭은 마스터와 소년의 싸움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은 이제는 지나가 버린 풍경이다.

먼 과거의 이야기다.

이제는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구시대의 이야기.

「그렇군. 파트너의 말이 그렇다면 내 응하겠네. 자네는 항상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했으니까. 그렇겠지? 그것이야말로 여신님의 뜻이니까.」

자신을 파트너라고 불러줬던 초대 마스터.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늘 이 순간까지, 천칭은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달토끼와 검은 뱀의 눈이 떠오른다.

마스터는 그 두 존재가 자신을 보고 있는 줄 알았겠지만, 사실은 달랐다. 달토끼와 검은 뱀은 알베르트가 아니라, 천칭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보여준 광경도 마찬가지다. 알베르트에게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니다.

천칭이 만든 풍경을 보이기 위해서다.

무엇을 위해서? 깨닫기를 바랐던 것이다. 성좌라는 것이 무엇인지. 혼선이 생긴 기억. 공백이 있음에도 그걸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일종의 암시를 주기 위해서.

천칭은 눈부신 금빛과 처음으로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너는, 뭐야?」

「세상을 대변하는 일곱 개의 의식 중 하나인 천칭입니다. 반갑습니다, 2대 마스터. 아리시엘 루드비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녀가 천칭을 적대적으로 대한 건 아니었다.

매사에 냉철하게 대하던 여인도 천칭과 단둘이 있을 때면 약한 면모를 비추곤 했다.

「힘들다면 그만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게 책임이라는 거야.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도망칠 수는 없어.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까. 제국을 대변하는 루드비히 가의 가주. 제국의 수호신, 아리시엘 루드비히가 바로 나야.」

「그렇습니까? 정말 재미없는 이야기군요. 뭐, 마스터의 뜻이 그렇다면 제가 최대한 협조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걱정하지 마시기를. 저는 세상을 대변하는 일곱 개의 의식 중 하나인 천칭입니다. 마스터의 길이 더럽혀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거 든든한 말이네.」

오래된 기억이다.

어째서 지금에 이르러서야 떠올렸는지, 알 수 없는 기억.

그럼 언제부터였을까. 아리시엘이 자신을 적대하고 무시하기 시작했던 건…?

무슨 일이든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발화점은 어디였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분명….

「재밌군요. 그 여자, 마족입니다.」

「뭐?」

아리시엘의 반문에 유피에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알이 타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다과회에 그녀를 초대한 것은 아리시엘이었다. 항상 있는 일이다. 바쁜 오전 일과를 마치고 나면 점심을 들고 한가롭게 쉬는 시간을 갖는다.

아리시엘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녀의 집사는 완고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일만 해서는 버틸 수 없었다. 휴식은 누구에게나 필요했다. 그리고 알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했어?」

「아니, 혼잣말이야.」

입을 가린 아리시엘은 천칭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이야?

「왜 당황하는지 모르겠군요. 마스터도 알고 계셨지 않았습니까?」

「…….」

「무슨 일이야? 표정이 별로 안 좋은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아무것도….」

찻잔을 내려놓은 아리시엘이 이마로 손을 옮겼다.

일순간 망가졌던 표정이 가까스로 돌아왔다. 유피에르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이 계기였던 걸지도 모른다.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본다. 천칭은 희뿌연 머릿속을 하나하나 짚어보기 시작했다.

「아가씨.」

「왜 그래, 알?」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리시엘의 일이라면 훤히 꿰고 있는 집사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그 순간에도, 이 남자는 항상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리시엘은 알을 보았다. 그는 알고 있을까. 자신의 호의가 향하는 여자가 증오스러워 마지않는 마족이라는 것을. 아니, 알고 있을 리 없다.

알도 자신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유피에르가 마족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절대 자신에게는 소개하지 않았을 터다.

「알.」

「네, 아가씨.」

유피에르는 마족이야.

목 밑까지 차오른 말을 아리시엘은 삼켰다.

진실을 알게 된 알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이 충직한 집사가 받을 상처가 얼마나 클지. 그녀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오늘 밤에는 유피를 불러서 식사나 할까?」

「드문 일이군요. 아가씨가 유피를 찾으시다니….」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야.」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연락하죠. 분명 그녀도 기뻐할 겁니다.」

「정말로 그럴까?」

「물론입니다. 유피는 아가씨를 좋아하니까요.」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좀 더 큰 계기가 있었을 터다.

「있지, 천칭. 마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건 아닐지도 몰라.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나.」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마스터. 확실히 마스터의 말이 맞습니다. 모두가 나쁘지는 않겠죠. 하지만 마족은 적입니다. 언젠가 제국을 멸망시키겠죠. 마스터의 가문을 짓밟았던 것처럼, 언젠가 이곳을 전부 짓밟게 될 겁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유피에르를 보고도?」

「유피에르를 보고 더 확신했습니다. 녀석들은 단순한 적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란 듯이, 우리 이웃으로 잠입해있지 않습니까?」

「…….」

말문이 막힌 아리시엘을 보며 천칭은 쐐기를 박았다.

「기회가 있을 때 뿌리를 잘라내는 편이 좋습니다, 마스터. 그 첫 단추로 유피에르를 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방금 뭐라고 그랬어, 천칭?」

「시작이 힘들 뿐입니다. 한 번 끊고 나면 모든 것이 수월하게 풀리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스터. 마스터의 곁에는 제가 있으니까요.」

그래.

분명 그 시점이다.

천칭이 그 말을 던졌기 때문에, 아리시엘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천칭은 속삭였다.

자각이 있는가, 없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천칭이 질리지도 않고 저주의 말을 속삭였다는 것이다. 아리시엘이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기 전까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이번에는 왜 기억에 혼선이 생기지 않았던 걸까? 알베르트 란이 정식 마스터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자각이 없을 뿐이지. 그는 몇 번이나 알베르트의 마음에 부채질했을지도 모른다. 마족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고. 세상의 의지를 대변하기 위해서.

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소년이 따로 수를 쓴 것도 아니건만, 알베르트의 몸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한계까지 끌어낸 내공 때문이다. 소년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마스터는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적을 무찌르는 건 불가능하다. 변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목숨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변수가 한없이 0에 수렴할지라도.

친구.

3대 마스터인 알베르트 란은, 천칭을 그렇게 불렀다.

그것이 마스터의 선택.

그렇다면 이번에는 천칭이 선택할 순간이었다.

“마스터.”

천칭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 닿지 않는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 그가 뻗는 검이 길을 만들고, 그의 의지가 빛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애타게나 바랐던 힘은 마스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비극을 막기 위해서 얻은 힘. 비극을 만들어낸 장본인과 함께 걸어갔던 길. 천칭은 피어나는 꽃을 보며 눈을 감았다.

“됐습니다, 마스터. 이제 그만하셔도 좋습니다.”

월아가 멈췄다.

감았던 눈을 뜬 천칭은 자신을 바라보는 알베르트를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마스터는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칭?”

마스터의 호흡이 거칠다.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표정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어려있었다. 그건 육체의 통증이 가져다주는 아픔이 아니다. 어렴풋이 알베르트는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나는 당신이 싫었습니다, 마스터.”

“…….”

알베르트와 처음으로 만났던 날.

아직 소년이던 그의 몸을 보좌했던 일.

숲에서 유피에르와 조우했던 날.

무공이라는 힘을 손에 넣었던 일.

마족의 진실. 마족의 땅. 그 모든 것을 본 마스터는 이곳까지 도달했다.

알베르트 란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여로는 아가씨인 아리시엘 루드비히의 길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지겠지.

단지, 그 곁에 자신이 없을 뿐이다.

“먼저 사과하겠습니다. 제 여행은 여기까지입니다.”

“천칭.”

이것이 옳은 선택이다.

천칭은 소년을 향해 날아갔다.

“기다리게, 천칭! 자네는, 정말 그거로 만족하는가?”

“그것이 제 의지입니다. 변변치 못한 알베르트 란의 친구. 세계를 대변하는 일곱 개의 의식 중 하나. 긍지 높은 성좌 천칭입니다.”

알베르트의 목소리에도 천칭은 멈추지 않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성좌를 본 소년은 익살스럽게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너는 깨어나서는 안 될 성좌다.」

“그럴지도 모르지, 마왕.”

「누가 누구를 보고 마왕이라는 건지.」

소년의 목소리에는 짙은 냉소가 어려있었다.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남자에게 쓸 시간은 없다. 천칭은 망연자실한 알베르트를 응시했다.

“작별입니다, 마스터. 저는 괜찮습니다. 무사히 돌아가서 아리시엘에게 안부나 전해주시죠.”

찬란하고 고귀했던 금빛.

여전히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옛 마스터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천칭은 마음속에서 맴돌던 그 말을 간신히 입에 담았다.

“지금까지 미안했다고 말입니다.”

사라져가는 빛.

닫히는 문 앞에서 친구는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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