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토끼와 뱀(3) (19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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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뱀(3)

붉은빛의 황야는 탁한 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지면 곳곳에서 마기가 솟아나고 있다. 움직이지 않아야 할 지면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살점에 발을 올린 것 같은 기분이다. 산 것을 밟고 나아가는 것 같은 기분은 빈말로도 유쾌하지 않았다. 생리적인 혐오감이 등골을 자극했다. 지울 수 없는 불쾌함에 알베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이것이 처음 겪는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양양에서 보았던 지옥도. 소하 언덕을 좀 먹어가던 그 경치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검은 뱀은 정처 없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익숙한 산책길을 나서는 것처럼 녀석의 움직임은 거칠 게 없다. 끝없이 나아가던 뱀이 움직임을 멈춘 것은 한 비석 앞에서였다. 뱀은 붉은빛이 도는 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토끼가 보여준 물과 달리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는다.

단순히 지켜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알베르트는 비석 위로 손을 얹었다. 지면이 요동쳤다. 파도치는 것처럼 살점이 꿈틀거린다. 움직이기 시작한 땅은 알베르트와 뱀을 다른 장소로 데려갔다.

붉은 살점이 벽을 만들고, 미로와도 같은 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경치가 흘러간다. 꿈틀거리는 살점과 마기가 섞여 뭔가 광경을 자아내는 것 같다. 그게 환각이 아니라는 걸 알베르트는 이내 알게 되었다.

마기 속에서 나타난 것은 격전이 이어지는 전쟁터였다.

목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함과 비명이 울렸다. 병장기 소리가 하늘을 메우는 건 물론이고, 폭음이 멈추지 않는다. 장성을 향해 밀려오는 적은 캘러미티와 악마다.

무너진 성벽 위에서 일련의 부대가 놈들이 올라오는 걸 막고 있었다. 저지선을 만들어놓은 채 지키는 전투를 이어가고 있다. 제국의 병력은 아니다. 마치 마물과 마물이 싸우는 것처럼, 장성을 지키는 이들은 이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국의 사람들이 마족이라고 불렀던, 연 제국의 병사들이다.

개개인의 전투력은 장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훨씬 뛰어나다.

검이 오갈 때마다 쓰러지는 건 캘러미티다. 수비대의 수는 거의 줄지 않는다. 문제는 수다. 아무리 수비대 개개인의 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장성을 향해 밀려오는 캘러미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진짜로 경계해야 할 적은 캘러미티가 아니다. 그사이에 섞여 있는 악마들이야말로 이 침공의 주역이다.

팽팽하던 줄다리기가 일순간 기울었다.

장성 한편을 향해 무언가 떨어졌다. 파편이 비산했다. 튀어 오르는 돌조각 사이로 핏덩이가 흩날렸다. 장성에 내려앉은 것은 거구의 악마다. 염소와 말을 반쯤 섞어놓은 것 같은 놈의 머리에는 녹용과도 같은 뿔이 자라나 있었다. 녀석은 발아래에 짓밟힌 수비대의 육편이 부들거렸다. 그것이 귀찮다는 듯 놈은 발에 힘을 실었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염소 악마를 막기 위해 병사들이 움직였다.

반응한 것은 다섯. 악마의 무력을 보았을 때, 이들만으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원할 수 있는 병사는 더 없는 걸까. 어느 쪽도 손을 쓰기 바쁘다. 손이 부족한 것은 수비대지, 캘러미티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창을 바로 쥐는 수비대의 모습에 악마는 웃음을 터뜨렸다. 각오를 마친 병사를 향해 악마가 손을 들었다. 검은 불꽃이 피어오른다. 놈의 주먹에 마기가 담기는 순간, 하늘에서 붉은 불꽃이 떨어졌다.

장성이 부서지는 건 아닐까 싶은 폭발이 일어났다.

악마의 머리부터 몸까지 꿰뚫은 불꽃이 마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악마가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주먹 자국이 남았다. 열화가 피어오른다. 불길밖에 남은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한 남자였다.

「잘 버텨주었다. 내려갈 준비를 해라. 이곳은 우리가 맡겠다.」

1황자 시더 아르테니아.

장성으로 내려온 것은 바로 그 남자였다. 그 뒤를 사수하듯이 대도를 든 여인이 떨어져 내렸다. 주변을 덮고 있던 핏자국이 날아갔다. 어깨에 도를 걸친 그녀는 흠, 하고 장성 밑을 내려다보았다.

「꽤 많네요, 황자 전하. 어떻게 할까요?」

「날뛰고 와도 좋다.」

「이야. 역시 제 마음을 잘 아신다니까.」

긴 갈색빛의 머리를 한 갈래로 묶은 여인, 아이네르는 굶주린 야수와도 같은 미소를 그렸다.

「콜린이 도착하면 기다리다 못해 먼저 갔다고 전해주세요.」

「전해주마.」

몰려오는 캘러미티를 향해 아이네르가 뛰어내렸다.

도 한 자루에 의존한 그녀는 곧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젊다는 건 좋군요.」

「우총관. 자네도 아직 젊다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건 황자님 밖에 없습니다. 노부는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죠.」

허허, 하고 시더의 곁에 다가온 노인은 소매로 손을 옮겼다.

안쪽에서 환약과도 비슷한 검은 공을 꺼낸 그는 장성 밑으로 던졌다. 커다란 폭발이 있었다. 노인이 투척한 것은 일종의 벽력탄이었던 모양이다. 폭발에 휘말린 캘러미티들이 혼비백산 흩어졌다.

「뭐, 상황이 이래서야 손주의 장난을 받아주는 건 먼 훗날일 것 같군요.」

시더가 장성 앞으로 나왔기 때문일까.

무인 중에서도 정예로 꼽히는 호법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시를 내릴 것도 없다. 우총관인 노인을 남겨놓은 채 그들은 장성 곳곳으로 몸을 날렸다. 고전하고 있던 것이 거짓말 같다. 호법대는 캘러미티와 함께 나타난 악마를 손쉽게 제압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조금 어떤가요, 황자 전하?」

「굳이 내가 말할 필요가 있나? 강의 마녀 루이스.」

「그것도 그렇군요. 이미 설명이 필요 없는 상황이니까요.」

빗자루를 타고 내려온 강의 마녀, 루이스가 장성에 착지했다.

「소 장성은 저희 자매들이 맡고 있습니다. 손이 부족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아니, 이대로는 끝이 없다.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전멸하는 건 우리다.」

전투가 너무 길어지고 있다.

장성을 지키는 수비대의 체력은 한계에 가까웠다. 원활한 정비를 위해서라도 전선을 한 번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후퇴라…. 장성을 포기하고 물러나신다는 장소가 사수관(死守關)은 아니겠죠? 얄팍한 방책밖에 남지 않은 그곳에서는, 저 군세를 상대로 반나절도 버티지 못할 거에요.」

「협곡을 낀 사수관은 천연의 요새 중 하나다.」

「그렇죠. 한 300년 정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말이죠.」

「그래서 너희 자매의 힘이 필요하다. 지형을 조금 손보는 건 일도 아니지 않나?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이곳만큼은 아니더라도 요새로 기능하기에 충분하다.」

「어머, 처음부터 우리를 전력에 포함하셨던 건가요? 언제부터 발푸르기스의 자매가 황자님의 산하에 들어가게 된 건지 모르겠네요. 능구렁이가 다 되셨어요, 시더 황자님.」

「흥. 아벨의 의견이다.」

탐탁지 않다는 듯 말을 끊은 시더는 전장을 응시했다.

장성을 향해 몰려오는 캘러미티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악마는 호법대가 쓰러뜨리고 있지만, 그것도 일순간의 기세에 지나지 않는다. 혼란에서 벗어난다면 이 파도는 멈추게 되리라.

「제국도 갑작스러운 침공에 애를 먹고 있다는 모양이에요. 긍지의 상징이던 세인트 월이 함락 직전까지 몰렸다는군요.」

「남 말 할 때가 아니지. 궁지에 몰린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 치고는 긴장감이 없어 보이네요.」

「이신설교에서 백토 부대가 올라왔다. 이 상황에서의 원군은 솔직히 고맙지.」

그래도 장성을 내준다는 의미는 가볍지 않다.

황자 전하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 없다. 무엇보다 황자님의 곁에는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다니던 시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루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한 전선에는 다시 불이 붙고 있었다.

두 번째 파도가 밀려온다.

몰아치는 캘러미티를 보며 루이스는 지팡이를 들었다.

「황녀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들으신 바 있으신가요?」

「유피 말인가?」

「네.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저희에게는 연락 하나 주질 않네요. 정말 매정하지 않나요? 언니가 있을 때도 그랬지만, 너무 제멋대로라니까요. 걱정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도 모른 채 말이에요.」

흔들리는 지팡이가 술식을 자아냈다.

산의 마녀였던 세실리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자매 중에서는 수준급에 꼽히는 마녀다. 하늘에서 나타난 마법진은 푸른 섬광을 불러왔다. 전격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그것은 그야말로 뇌신의 분노에 가깝다. 전격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수백의 캘러미티가 재로 변해 사라졌다.

「칩거를 깬 건 좋다만, 완전히 바깥 물이 들어버렸지. 방랑벽이 생겨버렸다고 해도 좋다. 이전에는 제국의 서쪽에 있는 공화국에 갔다고 하더군. 지금은 아마 제국에 있지 않을까 싶다.」

「하필 지금 말인가요.」

「그래, 시기가 좋지 않지.」

시더의 대답에 루이스는 반대쪽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마도 제국이 있는 방향이겠지. 한데, 그 시선이 알베르트와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다는 듯 루이스가 입을 열었다.

「너는…?」

그 순간이었다. 마기가 자아내던 장성의 광경이 흐려졌다.

붉은 살점으로 만들어진 벽이 녹아내리고, 목적지에 도착한 것인지 한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극심한 피로가 느껴지는 것 같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나한테 이 광경을 보여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제는 알려줘도 괜찮지 않은가?”

“…….”

뱀은 대꾸하지 않는다.

토끼와 마찬가지로 말없이 알베르트와 천칭을 응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째서…. 저는….”

“천칭?”

천칭은 알베르트를 보았다. 아랫입술을 깨문 그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 동물과 마찬가지로 천칭도 대답을 주지 않는다.

불현듯 알베르트는 선녀의 말을 떠올렸다. 대답을 밖에서 갈구할 필요는 없다.

녀석들은 알베르트가 무언가 찾길 바라는 모양이다. 검은 뱀은 붉은 황야로 나아갔다. 압둘레이 공화국의 사막과도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푸른 녹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메마른 대지에는 기괴한 형태를 한 마물이 가득했다.

온통 눈밖에 달리지 않은 마물. 이목구비가 없는 달걀과도 같은 둥근 마물.

연체동물처럼 생긴 마물을 비롯해 키메라나 다름없는 모습의 마물도 보였다.

검은 뱀은 그사이를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나아갔다.

월아를 쥔 알베르트와 달리 뱀은 앞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수십 개가 넘는 눈이 뱀과 알베르트를 주시했다. 달려드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놈들은 망설이고 있을 따름이다. 그건 월아를 쥔 알베르트 때문이 아니다. 검은 뱀이 그를 안내하고 있는 탓이다.

“이런 걸 뭐라 하더라. 그렇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하죠, 마스터. 만약 제가 죽는다면 아리시엘에게 전해주시죠. 정말로 당신이 싫었다고 말입니다.”

“농담할 기력이 있으면 주변이나 더 경계하게.”

검은 뱀이 안내한 장소는 하얀 신전이었다.

이 붉은 불모지에서 발견한 유일한 건물이다. 알베르트가 그 건물이 신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유는 간단했다. 하얀 건물을 둘러싼 마물들이 순례자처럼 절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베르트의 발길을 잡는 마물은 없었다.

순례자들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신전 안쪽에 무언가 거룩한 존재가 있기라도 한 걸까.

신전 입구에는 숲에서 사라졌던 토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뱀이 그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입구 양쪽에 자리 잡은 두 영물은 신전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앞으로 향하는 알베르트를 봐도,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앞으로는 함께 갈 수 없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안쪽에 그를 기다리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이곳까지 안내해준 것에 감사를 표한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숙이다 말고,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했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는 토끼와 달리 뱀은 고개를 돌렸다.

어떤 목소리도 듣지 못한 알베르트는 신전 내부로 들어섰다.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군.”

“말을 못 하는 거 아닙니까? 애초에 둘 다 동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둘은 이신설교가 모시는 두 신이 틀림없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어떤 연유로 알베르트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 안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가 내주겠지.

“끝까지 어울려주겠나, 천칭.”

“새삼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마스터.”

퉁명스러운 천칭의 목소리를 들은 알베르트는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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