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토끼와 뱀(2) (19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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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끼와 뱀(2)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는 듯 아리시엘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드레이 대산이라니….」

    「알에게 준 마도구가 북부를 향하고 있어. 그것도 아주 먼 북쪽을. 우리가 알고 있는 북부의 끝은 아드레이 대산이 전부니까. 세상의 지붕인 그곳밖에 없다고 생각해.」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그 말은 즉 악마들이 아드레이 대산에서 왔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러네, 소피아.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보면 그 말이 맞겠지. 하지만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 차원을 넘어서 강림한다는 건 예상외의 변수가 많이 생기는 법이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마법과는 규칙이 달라. 무엇보다 우리는 악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너무 없어. 녀석들에게 다른 법칙이 적용된다면, 무엇을 생각해도 의미가 없어.」

    소피아의 물음에 유피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아드레이 대산과 관련해서 알려진 이야기가 너무 없다.

    무언가 알고 싶어도 정보 자체가 없다고 해야 할까. 캘러미티를 제외하고는 대산에 발을 들인 이가 없기 때문이겠지. 유피에르도 산의 마녀였던 세실리아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우리와 동세상에 있음에도 완전히 다른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세상.

    그건 문헌 속에만 존재한다는 정령계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확실한 것은 알이 북부 너머로 전송되었다는 거야.」

    「…….」

    아가씨는 얼굴을 찌푸렸다. 말문이 막힌 아리시엘과 달리 소피아는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황녀 전하. 바로 출발 준비를 할까요? 명령만 내리신다면 준비를 마쳐놓겠습니다.」

    시녀의 대답은 든든하다.

    역시나 그녀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다고 할까. 겉멋으로 몇 년이나 같이 여로에 오른 것이 아니다. 지금도 망설이는 주인님의 등을 밀어주고 싶은 모양이다.

    유피에르는 의식을 찾지 못하는 성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레이첼을 비롯한 사제가 신성력을 끌어내고 있지만, 그래도 성녀의 상태가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유피에르가 이곳을 떠난다면, 성녀가 다시 일어날 확률은 극단적으로 줄어들겠지.

    성녀인가. 알인가.

    후자를 챙기는 게 당연하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아니. 알이 돌아올 장소를 만들어 놓는 게 우선이라고 봐.」

    성녀가 목숨을 잃는다면 알이 슬퍼하겠지.

    그런 희생을 내면서까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는 걸 바라지 않으리라.

    「북부와 연락할 방법이 없다고 그랬지?」

    「숨겨둔 수단이라도 있는 거야?」

    「세인트 월과 직통은 아니더라도 성 미뉴에트 가와 연락할 수단은 있어.」

    아리시엘은 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북부에서는 성물로 받들어지는 화이트 울프를 모방한 인형이다. 루미에르 가를 방문했던 교류단으로부터 받은 마도구다. 화합의 증표로 받았던 물건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통신용 마도구인가.」

    「내 손으로는 작동하지 않지만, 너라면 할 수 있지?」

    마도구를 받은 유피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손끝에서 은빛 마나가 반짝였다.

    구호소 안의 광경이 흐려졌다.

    수면을 어지럽힌 것은 토끼였다. 녀석의 발이 알베르트의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무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나뭇가지와 동화되듯이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은 작은 소년이었다.

    “엘프입니다, 마스터.”

    “엘프?”

    천칭이 날아오른다.

    화들짝 놀란 엘프 소년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무를 타고 넘어가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알베르트는 토끼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사라진 걸까. 토끼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밑둥의 물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조금 전과 달리 어떤 광경도 보여주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소년이 몸을 숨기고 있던 것 치고는 흔적이라고 할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알베르트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소년이 흘리고 간 기운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건 지운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기척이 아니다.

    나무 위에서 이어지는 길이 보이는 것 같다.

    소년이 향한 방향은 숲의 안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물이 고여 있던 나무 밑둥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이유는 없겠지.

    토끼를 놓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녀석이 모습을 감춘 건 우연이 아닐 터다.

    “따라가세, 천칭.”

    “…….”

    “천칭?”

    “아. 뭐라고 말씀하셨죠, 마스터?”

    천칭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어딘지 모르게 멍한 그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입가를 찡그렸다.

    “자네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약간, 머리가 아팠을 따름입니다. 그보다 엘프입니다. 따라가시죠, 마스터.”

    “음…. 알겠네.”

    소년의 뒤를 추적한다.

    알베르트는 나무를 타고 달려나갔다. 발밑으로 보이는 숲의 광경은 생소한 모습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은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주변을 살펴보며 나아가던 알베르트는 천칭이 따라오지 않는 걸 알고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자 천칭의 곁에는 무언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어린 소녀, 소녀의 모습을 한 존재다.

    낯익은 그 모습은 에일린이 곁에서 뛰어놀던 정령과 다를 바 없었다.

    천칭이 아무리 손을 저어도 녀석들은 떨어지지 않는다. 볼을 간지럽히고, 팔을 당기고. 장난이 멈추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집어 당기는 정령의 행동에 천칭이 얼굴을 구겼다.

    “마스터.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십시오.”

    “꽤 귀여운 친구지 않나.”

    “…….”

    정령이 있고, 엘프가 있고, 천칭이 육체를 가진다.

    혹시 이곳은 전설의 정령계인 건 아닐까. 천칭을 갖고 장난치던 정령들이 이번에는 알베르트를 목표로 삼았다. 운디네와 실프로 보이는 두 정령은 알베르트의 어깨에 앉았다. 볼을 찔러보고, 머리카락을 당기는 둥.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다. 낙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지. 그때 알베르트의 곁에 있던 정령은 에일린의 친구였던 실프와 운디네였다. 모습은 다르지만, 이 아이들도 그와 다를 것이 없겠지. 사람이 그러하듯 정령도 모두 같은 존재는 아니니까 말이다.

    정령을 대동한 채 알베르트는 흔적을 좇아 앞으로 나아갔다.

    숲의 광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던 나무에 창문을 비롯한 구조물이 생겼다.

    나무 밑둥을 이용한 책상과 의자로 보이는 수풀 뭉치. 인공물이긴 하지만, 자연의 경관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만든 구조물이 보였다. 일종의 촌락과도 비슷하다. 공터에는 미형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뾰족한 귀를 가진 엘프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중에는 땅딸막한 키를 가진 드워프도. 묘인(猫人)을 비롯한 이름 모를 이종족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건 대륙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이제는 인족과 마족밖에 남지 않은 대륙이다. 그나마 눈에 띄던 엘프와 드워프도 점점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협곡으로 몸을 숨겼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까닭은 은연중에 그들을 무시하고, 착취했기 때문이리라.

    “여기는 대체….”

    말문이 막힌 알베르트를 향해 한 남자가 다가왔다. 활과 검으로 무장한 엘프다. 알베르트는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활시위를 먹인 엘프가 말을 걸 때까지 그는 기다렸다.

    “움직이지 마라. 인족이 여기는 무슨 일이지?”

    엘프는 경계심을 넘어 적의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바로 활을 쏴도 이상하지 않은 적개심이다. 엘프가 활을 쏘지 않는 건 단순히 알베르트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정령 때문이었다. 장난치는 정령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인족이 왜 정령석을 가진 거지?”

    “정령석?”

    엘프는 턱짓으로 알베르트의 가슴을 가리켰다.

    조심스레 손을 연미복 안쪽으로 옮긴다. 알베르트의 품에서 나온 것은 푸른빛을 내는 돌이었다. 언젠가 에일린으로부터 받았던 정령석이다.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사용하지 못했던 물건이다. 대답을 재촉하는 엘프의 눈짓에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엘프에게 받았다.”

    “재미없는 거짓말을 하는군. 우리 동포가 인족에게 정령석을 줄 리가 없지. 훔친 건가? 아니면 너희들이 언제나 그러했듯 죽이고 손에 넣은 건가?”

    활시위가 팽팽해졌다.

    정령의 가호가 깃들어있는 건지, 엘프의 화살에서 돌풍이 휘몰아쳤다. 알베르트의 곁에 있는 두 정령은 살기등등한 엘프의 적의를 읽지 못하는지, 여전히 장난을 치기 바빴다. 장난은 알베르트의 얼굴을 갖고 노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연미복 옷깃에 있는 루드비히 가의 문장에까지 손을 뻗기 시작한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정령의 모습에 엘프는 활을 내렸다.

    인족이 무언가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다. 정령들이 자발적으로 그와의 교류를 원하고 있다.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은 엘프도 쉽게 끌어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인간이라면….

    정령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남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엘프는 정령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이 장소에서 굳이 피를 볼 까닭은 없었다.

    “친구들을 봐서 피를 보지는 않겠다. 이곳을 떠나라. 인족은 환영받을 수 없는 장소다.”

    “잠깐만 기다리게. 혹시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환영 속에서 봤던 것처럼. 여기는 정말로 아드레이 대산인 걸까?

    “모르는 건가?”

    엘프가 반문했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그 표정에는 당혹감이 차 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에 들어온 걸까.

    그러나 곧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는 그만둬라. 인족에게 알려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 한 번 더 눈에 띈다면 그때는 경고 없이 쏘겠다.”

    “…….”

    대답을 바라는 건 힘들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눌 의사가 보이지 않는다. 축객령을 내린 엘프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몸을 돌렸다. 더 머물러서 좋을 게 없다. 촌락 안쪽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몇 개나 느껴졌다. 아무래도 손님인 알베르트의 방문을 알아차린 것 같다. 소란을 일으키는 건 바라지 않는다. 이들에게 있어 인간인 알베르트는 명백한 불청객이었다.

    정령과 함께 알베르트는 발길을 돌렸다.

    촌락에서 어느 정도나 멀어졌을까. 끈질기게 들러붙는 시선을 떼어낸 알베르트는 쉭쉭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의 주인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녀석은 알베르트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령도 좋군요. 처음부터 우리 뒤를 따라왔던 건 아닐까요?”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검은 뱀이다.

    천칭과 알베르트를 응시하던 녀석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토끼와 달리 기다리는 기색은 없다. 따라올 생각이라면 따라와라.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면 따라올 필요는 없다.

    이미 올라탄 배다.

    어울릴 거면 끝까지 어울리는 게 맞다.

    알베르트는 검은 뱀을 따라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토끼가 숲의 안쪽으로 향했던 것과 달리, 검은 뱀은 숲의 바깥쪽으로 향했다. 풍경이 바뀐다. 푸른 녹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붉은 모래와 암석이 대체했다. 동식물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불모의 황야.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척박한 대지다.

    생명이 넘치던 숲과 달리 이곳은 생물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땅이었다.

    “여기는 산이 맞는 모양입니다, 마스터.”

    숲의 바깥쪽으로 나오니, 비로소 보이게 된 경관에 천칭은 알베르트를 돌아보았다.

    알베르트는 검은 뱀을 따라가는 걸 멈췄다. 이곳이 어디인지, 무언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알베르트가 있는 산은 상당한 고지대인 듯, 구름이 껴 지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눈은 이미 평범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내공을 활성화한 알베르트는 시력을 높였다.

    구름의 밑. 안개 너머에 있는 것을 본다.

    산의 아래에는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특이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공화국의 복식 형태도 아니고, 마족의 복식 형태도 아니다. 그나마 비슷한 쪽을 꼽자면….

    캘러미티다.

    “그렇가. 이곳은 진짜로….”

    알베르트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설마설마했던 짐작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눈에 익숙하지 않던 것도 당연했다. 제국 어디를 둘러봐도 이런 환경을 가진 장소는 없다. 당연했다. 현시대에서 제국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이 산에 닿은 이는 없다.

    그저 소문만이 무성한 장소.

    어째서 성지로 받들어지고 있는지, 지금에 와서는 그 이유를 아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루미에르 교의 성지였다.

    세상의 지붕, 아드레이 대산이 알베르트의 발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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