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화. 토끼와 뱀(1) (195/200)

 # 195

토끼와 뱀(1)

공터 한쪽에 앉은 알베르트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의식을 잃기 전 무슨 일이 있었던가. 황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성창 궁니르는 마왕에게 결정타를 입히지 못했다. 간신히 완성된 대기적이 실패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 상황을 앞에 둔 채 알베르트가 취한 행동은 단순했다. 그랬다. 결말을 내기 위해서 알베르트가 나섰고, 월아의 빛은 마왕에게 닿았다.

그 뒤…. 무슨 일이 있었지?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마스터. 역소환되는 마왕의 발아래 검은 구멍이 생겼습니다.”

“검은 구멍?”

“그렇습니다. 마왕을 집어삼킨 그 구멍 안쪽으로, 마스터도 빨려 들어갔습니다.”

“…….”

흐릿한 머릿속이 연결되었다.

순간적으로 놈의 시선을 끌었던 월아. 마왕을 꿰뚫던 빛의 창. 쓰러지던 놈을 먹어치우던 검은 구멍. 그 안에서 튀어나온 손이 알베르트의 발을 잡았었다. 평소의 알베르트라면 그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계에 달한 알베르트는 그러지 못했다. 순식간에 영역을 넓힌 검은 공간은 알베르트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상황은 지금과 연결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숲.

여기가 그 어둠 너머란 말인가.

“일단 지옥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자네도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건가?”

“아무리 저라도 만능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몸은 어떻게 된 건가?”

“모릅니다.”

“…….”

“너무 실망하는 거 아닙니까. 저도 모르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마스터.”

무심코 벙찐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말입니다. 지금 마스터가 무사한 건 제가 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투덜거리는 천칭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알베르트는 양손을 확인했다. 치열한 싸움을 거듭했던 두 손이 거짓말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분명 상처투성이였던 몸도 말끔히 회복되어 있다. 들끓던 기혈도 지금은 말끔히 가라앉아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기분은 어느 때보다 몸 상태가 좋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짚이는 곳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어느 쪽도 좋은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몸을 가질 수 있는 장소라면…. 마스터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장소니까요.”

“혹시 아가씨가 안배한 곳은 아닌가? 그곳에서는 자네도 육체를 몸을 가졌으니 말이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두시죠. 그 여자가 이곳에 있었다면 저 또한 마스터의 곁에 없었을 겁니다.”

알베르트의 천칭은 어디까지나 아리시엘로부터 양도받은 것이다. 만약 이 자리에 아가씨가 있다면, 천칭 또한 그녀의 곁에 있었을 것이다.

천칭을 어깨에 태운 그는 눈앞의 동물을 응시했다.

토끼와 뱀.

알베르트가 눈을 떴을 때부터 곁에 있던 아이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토끼와 뱀이다. 두 동물은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물 특유의 경계심이나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이곳에 들어온 알베르트와 천칭을 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동물이라는 건 조금 어떤가 싶군, 천칭.”

“마스터. 제가 아무리 궁해도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습니다.”

“음…. 그런가. 알겠네.”

“진짜로 알고 계신 겁니까?”

“물론일세.”

“그렇다고 해두죠.”

티격태격하는 알베르트와 천칭을 향해 토끼가 다가왔다.

검은 두 눈이 알베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그저 응시할 뿐인 시선. 투명한 눈은 익히 알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이신설교의 선녀, 한소망. 알베르트는 어째서인지 그녀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신설교가 모시는 신이 달토끼와 검은 뱀이었지.”

“확실히…. 그렇기야 했습니다만.”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진중한 알베르트의 시선에 하얀 토끼는 귀를 쫑긋거렸다. 몸을 돌린 녀석은 알베르트를 돌아보았다. 앞으로 나아가고, 돌아보고를 반복한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천칭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어도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차피 나아가야 한다면, 선녀가 연상되는 토끼를 따라가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검은 뱀은 따라오지 않는다.

흥미 없다는 듯 토끼와 알베르트를 돌아본 뱀은 그 자리에서 꽈리를 틀었다.

알베르트는 토끼를 쫓아 숲 안쪽으로 나아갔다.

숲은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토끼와 뱀 외에도 수많은 동물이 살고 있다. 다람쥐가 나무를 타고 돌아다니고, 딱따구리는 집을 만들기 바쁘다. 유유히 풀을 뜯어 먹는 염소와 사냥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늑대. 그런 놈들의 머리 위에서 발을 비비는 파리. 혹시라도 먹을거리가 떨어질까 싶어 나무 위에서 독수리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숲은 자연 그대로의 광경을 갖고 있었다.

“그 외에도 무언가 있기는 하군.”

“아무래도 정령 같군요, 마스터.”

수풀 곳곳에 몸을 숨긴 채 알베르트와 천칭을 훔쳐보는 시선의 주인공은 작은 정령들이다.

불청객인 두 존재가 무슨 사단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면 무언가 재밌는 일을 벌여주는 것은 아닐까. 경계심과 기대심이 한데 섞인 눈이 알베르트와 천칭을 쫓고 있었다.

토끼가 알베르트를 안내한 장소는 작은 연못이었다.

물을 마시던 사슴이 알베르트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그 머리 위에는 작은 요정이 앉아 있었다. 요정은 신기하다는 듯 알베르트를 응시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흥미를 잃은 요정은 연못의 물을 양손으로 떴다. 사슴과 요정. 둘 다 말없이 목을 축였다.

토끼는 연못을 바라보았다.

알베르트를 보고, 다시 연못을 본다.

“마시라는 건가?”

“보라는 게 아닐까요?”

알베르트는 연못으로 다가갔다.

갈증을 전부 달랬는지, 사슴과 요정은 연못에서 입을 뗐다. 흔들리던 수면이 가라앉는다. 투명한 색을 띤 연못은 안쪽의 조약돌마저 전부 비쳐 보였다. 무언가 특별한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수면이 휘몰아친다. 작은 연못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연못 안에서는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황은 어떻지? 움직일 수 있는 기사단은 있는가?」

「백기사단이 남아있습니다. 피에르 경이 좌측 저지선에서 시간을 벌고 있지만,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습니다. 캘러미티 뿐이라면 모를까, 악마가 너무 많습니다.」

세인트 월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지휘관과 부관의 뒤로는 검과 창이 오가고 있었다. 검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은 무시무시한 형상을 한 악마다. 아무도 넘을 수 없다던 세인트 월의 한쪽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임시로 만든 방책이 보이지만, 이미 무너진 방책 위로는 시체가 가득했다.

캘러미티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울부짖으며 돌격하고 있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다. 끈질기게 밀려오는 캘러미티를 베어낸 지휘관은 혀를 찼다. 이곳에서는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방도가 전무했다.

「황도의 지원군은 어떻게 되었지? 전송진을 사수할 시간은 충분했을 터다. 마도병단은? 신전기사단은 이미 도착했는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지원군 자체가 늦을 것 같습니다. 황도 역시 습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황도가? 그게 무슨 말인가?」

「죄송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저도 듣지 못했습니다. 설명을 듣기 전에 전송진을 비롯한 마석을 황도 측에서 파괴했습니다. 전령을 띄우기는 했습니다만, 현시점에서 지원을 나올 수 있는 병력은….」

「…….」

말꼬리를 흐리는 부관의 모습에 지휘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세인트 월에 주둔한 병력만으로는 이 파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망연자실한 지휘관 위로 이름 모를 악마가 떨어졌다. 붉은 피가 튀어 오르는 것과 동시에 연못이 흐려졌다.

“좋지 않군요. 캘러미티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세인트 월이 뚫리면…. 그다음은 황도일세.”

토끼는 딱딱한 표정이 된 알베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조금 전 연못에서 나타난 영상이 무엇인지. 어째서 이런 것을 보여주는지. 토끼는 무엇 하나 대답해주지 않는다. 앞서 그러했듯이, 녀석은 다시 숲 안쪽으로 향했다.

아직도 더 보여주고 싶은 것이 남은 모양이다.

이번에 토끼가 안내한 장소는 잘려나간 거목의 밑동이었다. 물이 고인 밑동 앞에서 토끼는 발을 멈췄다. 알베르트는 빗물을 받아둔 것 같은 웅덩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수면에 조약돌이 떨어진 것처럼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흐려지기 시작한 웅덩이에서 본 적 있는 광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타는 거리와 무너진 건물. 피 묻은 병장기가 흩어져 있는 것도 모자라, 가도 곳곳에는 사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의 시체가 뒤섞여있었다.

그것이 폐허가 되어버린 황도라는 걸, 알베르트는 곧 깨달았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들 사이로 한 소녀가 빠져 나왔다.

용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모양의 모자를 쓴 소녀다. 부상자들을 지나친 그녀는 임시로 만든 구호소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성기사가 소녀를 제지했다. 대화가 오간다. 구호소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는지, 소녀는 열심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성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대치가 길어진다.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던 사제들마저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했을 무렵, 구호소로 한 여신관이 다가왔다. 그녀는 실랑이를 벌이는 성기사에게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성기사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자리를 비켰다. 마침내 구호소 안쪽으로 들어선 소녀는 막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목표로 했던 여인을 앞에 둔 소녀는 무릎을 꿇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됐어. 바깥의 상황을 알지 못한 우리의 잘못도 있으니까. 그보다 물건은?」

「황녀님의 말대로 그 자리에 남아있던 것은 마기뿐이었습니다. 일단 챙겨오기는 했지만…. 이 자리에서 꺼낼 말한 물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기 덩어리를 이 자리에서 꺼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란랑은 황녀, 유피에르 바토리가 보고 있는 환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녀가 돌보고 있는 환자는 성녀였다.

안색이 파리해진 프랑소와는 얕은 호흡을 반복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그녀는 빈말로도 좋은 상태로는 보이지 않는다. 약품을 챙겨온 레이첼이 유피에르의 옆에 앉았다.

「성녀님은 조금 어떠신가요?」

「목숨은 붙여놨어. 남은 건 그녀의 의지에 달려있겠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살려놓고 싶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반반이라고 봐.」

「그럼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성녀님은 반드시 일어나실 겁니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를 낸 레이첼은 신성력을 발현했다.

유피에르의 자리를 대신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피에르는 란랑이 건넨 물건을 받았다. 작은 함 속에 담긴 그것은 사이한 기운이 가득한 마기였다. 진흙과도 같은 그것을 유피에르가 살펴보았다.

란랑이 가져온 마기의 진흙은 많지 않다.

그러나 진득하게 피어오르는 마기는 숨을 압박했다.

「이게 전부야? 아니면 이런 게 얼마나 남아있었어?」

「엄청나게 많아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양이 있어요. 거기에….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양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쯧, 하고 유피에르는 혀를 찼다.

상황은 상정할 수 있는 최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사이 구호소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예의를 갖추는 소피아와 지친 기색이 엿보이는 아리시엘이다. 주변을 기웃거리는 아가씨를 지나 시녀는 유피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지금 다녀왔습니다, 황녀 전하.」

「북부와의 연락은?」

「현재 황도에 남은 통신 수단으로는 연락할 방법이 없답니다. 카라스 님과 셀렌느 님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마석의 복구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즉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네?」

「결론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유피에르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이보다 더 나빠질 수가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알베르트에게 건네준 마도구의 빛도 그녀의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란은 어디로 간 거야?」

알베르트를 찾고 있었던 건지, 아리시엘이 유피를 향해 물었다.

「북부.」

「북부?」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가씨를 보며 마녀가 대답했다.

「장성보다 더 위쪽. 아마도 아드레이 대산으로 향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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