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블러드 캐슬(5) (1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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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캐슬(5)

프랑소와의 손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이 유피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몸 안에서 상반된 기운이 부딪혔다. 충돌하는 신성력과 마기가 통증을 자아냈다. 유피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불편한 몸이군요. 가능하시다면 마기를 억누르세요. 통증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될겁니다.”

“억지스러운 말만 꺼내네. 마기를 너무 눌러버리면 역으로 신체의 균형이 망가질 수도 있어.”

“그걸 막기 위해서 데려온 의녀가 아니던가요?”

프랑소와는 조금 전 유피가 입에 담은 말을 흉내냈다.

란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옷 안쪽으로 손을 옮겼다. 상비하고 있던 하얀 약통에서 크고 작은 환약이 흘러나왔다. 그중에서 검은색과 흰색의 환약을 골라낸 란랑은 유피에게 건넸다.

“말해두겠는데, 임시방편일 뿐이에요. 상태가 나빠지면 제가 막을 거예요.”

“매번 고마워, 란랑. 나 때문에 고생이 많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묻고 싶네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란랑은 입꼬리를 구겼다.

정말 제멋대로인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그녀를 따라 여로에 오른 뒤부터 모든 게 바뀌었다. 란랑을 둘러싼 세상도. 란랑이 보게 된 세상도. 알베르트의 말이 맞았다. 황녀님의 곁을 지키게 된 소녀는 더는 비좁은 약방에 갇힌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곤란하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란랑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잘못되면 평생 원망할 거에요.”

“이것 참. 우리 의녀가 무서워서라도 무사히 돌아와야겠네.”

란랑을 물린 유피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프랑소와를 보았다.

“그럼 이제 저것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서 말해볼까, 성녀.”

“성창(聖槍) 궁니르를 소환하는 대기적을 발현할 생각입니다.”

“대기적?”

생소한 단어를 들었다는 듯 유피가 반문했다.

그녀의 반응에 프랑소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다. 모르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신성력으로 자아낼 수 있는 최고 기적 중 하나야. 루미에르 교내에서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아. 대기적을 선두에서 이끄는 성인(聖人)이 필요한 건 물론이고, 이를 보강하고 증폭시켜야 할 인원이 필수적이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한계까지 그 힘을 끌어내면 대기적을 필두에서 이끈 성인이 목숨을 잃게 된다는 말도 있어.”

“너. 죽을 생각이야?”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제 목숨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드릴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이것 또한 여신님의 뜻이겠지요.”

“…….”

담담한 프랑소와의 대답에 유피의 말을 줄였다.

이미 자신의 목숨을 저울에 올렸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디 힘을 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일단락 지은 성녀는 카라스를 보았다.

대마법사는 전장을 확인하고 있다. 마왕은 황궁을 부순 거로 만족하지 않고, 수비대를 휩쓸고 있었다. 그 전열에 사자기사단과 신전기사단이 합류했지만, 전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간신히 다가오는 발길을 붙잡을 뿐이다.

“카라스 님. 성가대와 이야기는 끝나있습니다. 이목을 끌기 위해서 미카엘라 단장과 신전기사단이 움직일 겁니다. 그쪽의 협조는 맡겨도 되겠습니까?”

“마도 병단은 제시간에 합류할 수 없네. 마탑의 원조를 기대하기는 힘들 거야.”

“마도 병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황실 쪽을 말하는 겁니다.”

“그쪽은 로베릭의 관할이다.”

“제 이야기는 듣지 않더라도 카라스님의 말이라면 따르겠죠.”

부정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공방전을 응시하던 카라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셀렌느로부터 전언이 있다. 네가 개인적으로 부탁한 일이라 하더군.”

“지금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게 끝난 뒤 들어도 늦지 않습니다.”

“형편 좋은 소리를 하고 있군. 들어둬라. 더는 그 남자를 쫓지 않아도 된다.”

프랑소와는 얼굴을 찌푸렸다.

“녀석들이 우리의 몸을 빌려 강림하는 건 알고 있겠지. 실제로 암계의 간부들은 모두 악마의 노리개가 되었다. 세 녀석의 자리를 대체한 것은 군단장이라는 개체였지.”

황도에 나타난 세 명의 군단장.

음욕의 아스모데우스.

탐식의 벨제붑.

분노의 마몬.

셋 모두 악마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괴물들이었다.

“가설이기는 하지만, 놈들의 능력은 강림한 육체의 힘에 비례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본신의 힘이 압도적인 관계로, 인간의 몸으로는 전부 감당할 수 없는 거겠지. 마족을 보아도 자명하지 않은가. 그들도 너무 큰 마기를 다루게 되면 역으로 몸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지. 그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죽음을 맞이하고 말이야.”

“카라스 님. 요컨대 당신의 말씀은….”

“마왕이 현신할 수 있는 육체. 그 강함을 전부 가져올 수 있는 인간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

“뭐, 녀석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로 이래야만 했는지, 처음부터 이것이 목적이었는지. 뭔가 원대한 목적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보다시피 지하는 완전히 부서졌고, 조금이나마 사태를 알 것 같은 인물은 죽고 말았지. 이제 단서를 찾을 방법은 없다.”

셀렌느가 뒤를 밟고 있던 끄나풀들의 생존도 확인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3대 간부라도 목숨이 붙어있었다면 모르지. 그러나 알다시피 그들도 지옥도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 사태가 끝나고 나면 뒷일에 대해서 천천히 생각해두게.”

“알겠습니다. 만약 이곳에서의 일이 잘못되더라도 미카엘라 단장이 잘 수습해줄 겁니다.”

“그런가.”

이야기는 이미 되어있다. 뒤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카라스는 불길한 기운을 흩뿌리는 마왕을 바라보았다.

놈의 힘은 그야말로 괴물에 가깝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수비대의 수는 점점 줄어만 갔다. 더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추측이다만, 마법으로는 저것에 타격을 입힐 방법은 없다. 고작 해봐야 시간을 끄는 것 정도가 전부겠지. 묻겠다, 성녀. 대기적을 발현한다면 놈을 확실하게 끝낼 수 있겠나?”

“동이 트지 않는 밤은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알겠다. 놈의 숨통은 자네한테 맡기지.”

카라스는 고군분투 중인 황실 수비대를 향해 날아갔다.

멀어지는 대마법사의 모습을 본 유피가 입을 열었다.

“비장의 수라면 우리에게도 있어.”

“그 검을 말씀하시는 모양이군요. 확실히, 집사가 든 성검이라면 저것을 베어낼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뿐입니다. 베어내는 것이 전부죠.”

“마치 그것이 전부라는 것처럼 말하네. 성녀. 놈을 벨 수 있다는 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건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확실하지 않은 수에 기댈 수는 없습니다.”

프랑소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대로다. 아무리 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 해도, 모두가 만든 기회를 알베르트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애초에 날고 기는 기사들조차 접근하기 힘든 상황이다. 프랑소와가 알베르트의 실력을 모르는 이상 그를 신뢰하라는 건 억지에 가까웠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회는 제가 만들겠습니다. 우연히도 저런 것과 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니까요.”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알겠습니다. 만약의 경우에는 부탁드리겠습니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다. 거듭된 싸움으로 인해 내공은 물론이고, 신체의 피로도 상당하다. 혼자서 기회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알고 있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대기적이 실패한다면 뒤는 없다.

“대기적이 발현하면 녀석은 그 신성력에 반응할 겁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 황실수비대와 신전기사단이 협조할 겁니다. 카라스 님은 물론이고, 미카엘라 단장을 비롯해 데미안 단장도 이 자에 있습니다. 아무리 녀석의 힘이 강하다 해도 발을 잡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죠. 그렇다고 해도 안심은 금물입니다. 저것을 쓰러뜨리려면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할지 미지수입니다.”

“마법을 바라는 게 아니라, 신성력을 원한다는 말이네.”

“네. 당신의 신성력은 특별하니까요.”

성녀의 피.

그 안에 어린 힘은 각별하기 짝이 없다. 순수한 마기를 지닌 마왕이 상대라면, 그녀의 힘은 큰 도움이 되리라. 프랑소와의 신성력과 그녀의 힘은 동질의 것일 테니까.

“대기적의 완성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까?”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시간은 많을수록 좋겠죠.”

결국,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프랑소와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수비대의 전력은 꽤 줄어들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잘 버티고 있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전선에 합류한 사자기사단의 힘이 크겠지.

“내버려 둬요, 란. 굳이 지금 움직일 필요는 없어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내가 움직이는 게 맞아.”

적어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다.

고개를 끄덕이는 유피를 본 알베르트는 전장으로 내려갔다.

*&*

전장에 남은 악마의 수는 몇 되지 않았다.

마왕의 강림으로 인한 여파도 있지만, 단순히 수비대의 전력이 올랐기 때문이다. 기사 개개인의 전력이 뛰어나다. 수비대 중에서도 일반병을 포함한 부상자는 뒤로 무르고, 주전력들이 행동에 나서고 있다. 그들의 검은 신성력이 뒷받침하고 있다. 일반 악마를 상대하는 것뿐이라면 상황을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그러나 놈은 달랐다.

알베르트는 마왕을 주시했다.

녀석의 존재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침식하고 있었다. 마기로 인해 대지가 검게 물들고, 생물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은 인간도, 악마도 다를 것이 없다. 마왕을 피해 달아나는 악마들은 하나하나 목표가 되고 있다.

「가련한 양이 여신님에게 간청드리오니. 이 기도를 듣고 계신다면 부디 답해주시기를.」

군단의 수는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다.

알베르트는 건물 벽을 미끄러지듯이 타고 내려갔다. 마왕은 아직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에 지나지 않겠지. 이제 막 영창에 들어섰건만, 성녀가 주관하는 대기적은 엄청난 속도로 신성력을 모으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월아를 뽑았다.

기사단과 수비대는 아직 녀석의 곁에 도달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목을 끌지 못하고 있다는 편이 맞다. 이래서야 그들이 시간을 끄는 건 불가능하다.

방향은 일직선. 수비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있는 것은 흩어지듯이 달아나는 악마들뿐.

월아의 빛이 주인의 의지에 답했다.

무명검법

마왕을 향해 뻗어진 하얀 검빛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몇이나 되는 악마를 베어낸 참격은 마왕의 등에서 멈췄다. 타격은 없다. 녀석의 주변을 두르고 있던 마기가 알베르트의 검격에 반응했다. 황궁의 잔해를 짓밟던 마왕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알베르트다.

「…….」

우악스러운 주먹 위에 검은 마기가 맺혔다.

[옵니다, 마스터!]

무명검법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검막이 부서졌다.

그 위력에 휩쓸린 것은 알베르트만이 아니다. 주변에 있던 악마들은 물론이고, 합류 중이던 기사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쳤다. 대처하지 못한 수비대가 충격파에 휘말렸다. 지면을 잡아 충격을 줄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는 것도 잠시 몇몇 기사들은 건물 외벽으로 뛰어올랐다.

후속타가 들어올 것을 경계한 알베르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왕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조금 전 검격을 막은 마기가 이번에는 얼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마기 위에서는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를 취한 것은 로베릭이다. 마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지휘 아래에서 황실 마법사들이 연이어서 포격을 가했다.

“기사단을 원조한다!”

카라스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그것이 사전에 맞춰놓은 신호라도 되었던 듯 전장의 흐름이 바뀌었다. 기사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좌익에서 사자기사단이 움직이고, 우익에서 신전기사단이 속도를 높였다. 마왕의 시선을 잡은 황실 마법사 앞에는 황실기사단이 위치를 사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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