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블러드 캐슬(4) (1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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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캐슬(4)

알베르트는 잔존 악마를 소탕하는 수비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쳤다고는 해도 손을 거들 정도의 전력은 남아있다.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하늘을 장악한 본 드래곤이 있었다. 그 등에서 낯익은 여인이 내려왔다.

검은 꼬리와 은빛 날개.

유피는 본신을 드러낸 상태였다. 골격만 드러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아니다. 신석의 가호는 정말로 사라진 모양이다.

“무사한가 보네, 알.”

“그쪽 일도 잘 마무리된 모양이네. 몸 상태는 괜찮아?”

“문제없어. 앞으로 두세 번 정도는 더 싸워도 될 것 같아.”

말과는 달리 그녀의 안색은 어두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봐도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교전이 길게 이어지면 좋을 건 없겠지. 다행인 점은 전투가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루미에르 교의 성가대와 신전기사단의 합류는 파급력이 달랐다.

신성력은 부상자를 치료하고, 악마의 육체를 베어냈다. 발이 묶여있던 다프네 신전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가도의 상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늘로 치솟던 연기도 줄어든 기분이다.

“신석을 성녀에게 맡긴 건 올바른 판단이었어. 이렇게 빨리 조치해줄 거로는 생각지도 못했거든. 성녀에게도 성녀의 입장이라는 게 있을 텐데, 그 각오를 너무 얕본 걸지도 모르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악마의 침공을 막은 건 성녀라는 말이야.”

유피는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본 드래곤이 움직였다. 뼈밖에 남지 않은 꼬리가 휘둘러졌다. 추락하는 악마들에게 날개는 없다. 볼썽사납게 떨어진 놈들은 수비대의 검 앞에 생을 마감했다.

“저런 걸 준비해왔을 줄은 몰랐어.”

“본 드래곤 말이지? 롯과 블라우를 재결합해서 만들어낸 내 자신작이야. 마나를 엄청나게 잡아먹는 것만 빼면 완벽하다고 생각해. 흉내라고는 해도 브레스까지 사용할 수 있으니까. 물론 진짜 드래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어.”

그렇다고 해도 이곳에 나타난 본 드래곤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녀석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악마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과 싸울 수 있는 건 악마 중에서도 군단장급 정도만 가능하겠지. 즉 블러드 캐슬에 모인 군단만으로는 응전할 방법이 없었다.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문제는 없겠지.

급한 불은 끈 것 같다. 조금 안심해도 괜찮지 않을까.

“알!”

유피의 경고에 알베르트가 반응했다.

지상이 아니다. 지하다. 마기의 창이 지면을 뚫고 솟아났다. 공정된 술식이 기적을 발현했다. 찬란한 은빛이 흘러나왔다. 연이어서 튀어나오는 검은 창을 유피의 실드가 막아냈다. 아니, 정확히는 방향을 틀었을 뿐이다. 황도의 지하에서 솟아난 마기는 흡사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꺾인 마기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흘러나온 연기는 덩어리로 뭉치기 시작했다.

형상화한 마기는 본 드래곤을 집어삼켰다.

우악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마기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간 본 드래곤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부서졌다. 충격파가 지상으로 퍼진다. 마기가 새어 나온 지면이 갈라졌다. 알베르트는 미처 날아오르지 못한 유피의 몸을 안고 뛰어올랐다.

“저건….”

[엄청난 마기입니다, 마스터.]

발판을 잃은 수비대와 마족이 한데 섞여 지하로 떨어졌다.

몇몇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수비대를 건져냈지만, 모두를 구해낼 수는 없었다. 유피가 손을 써주진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품은 알베르트는 그녀를 보았다. 한데, 유피의 상태가 이상했다.

“유피?”

“으….”

몇 번이고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알베르트의 품에 안긴 그녀의 안색은 파리해져 있었다. 호흡이 얕다. 두 다리로 서 있기도 힘든지, 그녀는 신체를 알베르트에게 맡기고 있었다. 유피의 몸을 확인한다. 마나와 신성력, 마기. 세 기운이 뒤섞인 혈도가 들끓고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몸이다. 아무리 알베르트라도 함부로 손댈 수가 없다. 통증이 상당한지, 그녀의 입에서 억누른 신음이 흘러나왔다.

[본 드래곤이 역소환되면서 그 충격이 링크를 타고 전해진 모양입니다. 과연 유피입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터입니다. 순간적으로 신체를 보호한 것 같군요.]

‘치료 방법은?’

[란랑에게 물어보는 편이 빠를 것 같군요. 유피의 몸에 관해선 그녀가 전문의니까요.]

지금은 대처할 수 없다는 천칭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다.

유피를 안은 채 알베르트는 건물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그 사이 블러드 캐슬에 생긴 구멍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마기를 뚫고 유유히 날아오른 것은 대마법사 카라스다.

비상하는 그 주변에서 마나가 선을 그렸다. 떠오른 마법진은 두 개. 차오른 마나가 술식을 공정하고, 완성된 술식이 기적을 발현했다.

섬광이 번뜩였다. 금빛과 은빛의 번개가 마기를 갈랐다.

그러나 타격은 없는 것 같다. 일순간 마기가 흩어졌을 뿐이다. 다시 모이는 마기를 본 카라스는 혀를 찼다. 그 뒤를 쫓듯이 셀렌느와 미카엘라가 구덩이에서 튀어나왔다.

“설마 여기는 블러드 캐슬인가?”

지상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던 건지, 주변을 돌아본 셀렌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성가대와 신전기사단을 확인한 미카엘라는 셀렌느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는 루미에르 교의 전력에 합류했다. 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는지, 셀렌느는 건물 위에 있는 알베르트를 향해 내려왔다.

“반가운 얼굴이군, 집사.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어보고 싶네.”

“우연이군요. 저도 저것의 정체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셀렌느 후작.”

알베르트는 황도에서 일어난 지옥도를 짤막하게 설명했다.

마정석은 어떻게 되었는지, 블러드 캐슬 앞에서 어떤 교전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들은 셀렌느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결국, 벌을 받는 건가….”

씁쓸히 중얼거리는 그 옆으로 카라스가 내려왔다.

그는 알베르트를 보더니, 품에 안긴 유피에르를 보았다.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됐는지, 그녀는 카라스와 셀렌느를 바라보았다.

“볼썽사나운 모습이군, 마녀. 회복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가.”

“부끄럽지만, 조금 많이 필요할 것 같아.”

“억지를 부려도 되겠는가? 힘을 빌려다오. 지금이 아니면 저걸 막을 방법이 없다.”

“동의해. 저런 게 강림하면 황도가 부서지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걸.”

“말이 통하는군. 자네의 몸에 신성력은 통용되는가?”

“중앙 광장에서 이곳으로 올라오는 란랑이라는 의녀가 있을 거야. 검의 영애를 호위 중일 텐데, 그 아이를 불러와 줘.”

“좋다. 의녀를 이곳으로 데려오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카라스는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꿈틀거리기 시작한 마기는 이제 황궁을 향해 드리워지고 있었다.

수비대의 항전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로베릭이 이끄는 황실 마법사들이 대항하고 있지만, 형상화하기 시작한 마기를 막을 길은 없었다. 알베르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 불길함은 무엇인가. 어디선가 느껴본 기억이 있었다.

연기처럼 부풀어 오른 마기가 형체를 잡아간다.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뼈로 된 날개였다. 꼬리가 그 뒤를 잇고, 이글거리는 검은 불길이 머리를 자아냈다. 황실을 향해 뻗어졌던 마기가 푸른 손을 만들었다. 검은 화신.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존재는 주먹을 쥐었다. 황궁을 방어하는 실드를 향해 녀석은 주먹을 휘둘렀다.

군단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던 보호막이, 단 일격에 박살났다.

실드가 부서지며 일어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황궁 앞을 지키던 수비대가 폭발에 휘말려 들었다. 더 크게 파인 구덩이 안쪽으로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이 추락했다.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셀렌느가 행동에 나섰다.

알베르트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검은 화신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저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

끔찍한 포효가 울렸다.

단순히 울부짖었을 뿐인데, 그 고함에 몇 명의 수비대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지면에 쓰러진 그들의 귀에서는 한 줄기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피.”

“당황하지 마, 알. 뭘 매개로 해서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강림은 불완전해. 저 상태라면 녀석을 돌려보낼 방법이 있어.”

“그럼 역시 저건….”

“마왕의 현신이겠지.”

어느 정도 체력이 돌아왔는지, 그녀는 알베르트의 곁에서 떨어졌다.

비틀거리는 모습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괜찮겠어?”

“누구에게 묻는 건지 모르겠네.”

무너지기 시작한 황궁을 향해 마왕은 입을 열었다.

그 앞에 검은 원이 생겼다. 엉키기 시작한 마기가 한 점으로 뭉쳤다. 녀석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걸까. 수석 황실 마법사 로베릭이 손을 들었다. 황실 마법사들이 그 지시에 맞춰 마나를 모았다. 얼음으로 된 방패가 놈의 앞에 떠올랐다. 직후, 검은 파동이 황궁을 향해 쏘아졌다.

“--!?”

폭음과 함께 형체를 유지하던 황궁이 무너져 내렸다.

밑에서 접근하는 수비대의 움직임을 눈치챈 놈은 꼬리를 움직였다. 신전기사단과 황실기사단이다. 신성력과 오러가 놈의 공격을 막았다. 착각이다. 미카엘라와 데미안이 있음에도 꼬리의 속도는 느려지지 않는다. 힘을 담아 후려친다. 방어는 의미가 없다. 압도적인 힘 앞에 수십이 넘는 기사가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기다려야 해. 이쪽의 위치를 노출할 수는 없어.”

앞으로 나서려던 알을 유피가 막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원조에 나설 수는 없다. 아직 녀석은 유피와 알베르트를 인식하지 못했다. 앞에서 싸워서는 승기를 가져올 방법이 없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 전 출발했던 카라스가 란랑과 함께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황녀님!”

란랑은 내려오기 무섭게 품에서 은침을 꺼냈다.

유피의 몸에 손을 얹고 상태를 확인했다. 가지각색의 기운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응급조치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절대 안정이 무엇보다 우선이에요.”

“괜찮아, 란랑. 한 번이면 돼.”

“유피에르 황녀님.”

“그럴 생각으로 저 여자도 데려온 거잖아, 안 그래?”

카라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온 사람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은발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무사하신 것 같아서 안심했습니다, 유피에르.”

“별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아니네. 그래. 뭘 하러 온 거야?”

다프네 신전에 있어야 할 프랑소와 성녀가 이 자리에 와 있었다.

그녀는 자조감 섞인 유피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듣지 못했다는 듯 자연스레 걸음을 옮긴 프랑소와는 말했다.

“당신을 치료하러 왔다고 하면, 믿겠습니까?”

“그거 놀라운 발언이네.”

유피는 란랑을 물렀다.

의녀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란랑은 프랑소와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나는 널 믿지 않아, 인족. 혹여 황녀님이 잘못된다면….”

“그때는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저것을 막지 못하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습니다. 사실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나요? 저건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야 이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야.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없어.”

“벗어날 장소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도망갈 곳은 없다.

어디를 가도 저것의 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쓰러뜨리거나, 쓰러질 뿐이다.

“그만해, 란랑. 성녀의 말이 맞아. 무엇보다도 놈을 봤는데, 그냥 물러날 수는 없잖아.”

아직 황도의 전력은 살아 있다. 무언가 행동을 취한다면 지금이 최적의 시기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월아를 소지한 알베르트가 있었다. 신검의 공격이라면 녀석에게도 통용되겠지.

“어울려 줄 수 있지, 알?”

유피의 의중을 읽은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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