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블러드 캐슬(3)
신전 안쪽에서는 어두운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부를 따스한 빛으로 감싸주던 마정석은 더는 이곳에 없다. 마기에 물든 마정석은 황도를 나락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사제들도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마정석의 이상을 확인하고 이를 완화하고자 했지만, 마정석의 상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빠졌다.
신성력을 너무 쏟아버린 탓일까.
필두에서 신성력을 이끄는 프랑소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지독한 현기증이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어렵사리 시선을 든다. 성녀의 눈에 비치는 마정석은 여전히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이것도 여신님의 뜻이라는 걸까요.
신성력을 거둔 프랑소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녀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사제들이 다가왔다. 프랑소와는 괜찮다는 듯 손을 올렸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다들 신성력을 거두세요.”
성녀는 불과 몇 분 전, 얼굴을 비추고 간 여성을 떠올렸다.
유피에르 바토리. 아르웬 성녀의 피를 그녀는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갔다. 뭔가 특별한 방법을 말한 건 아니다. 프랑소와도 머리로는 알고 있는 해결안이다. 그러나 그걸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신전기사단과 성가대. 각 대대 신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 수비 병력을 제외하고 전부 출진했습니다. 미셸 경을 비롯한 두 대대는 블러드 트리로 향했습니다.”
“수고했어요, 레이첼. 미카엘라 단장이 부재 중인지라 힘든 부탁을 하고 말았네요.”
“아닙니다, 성녀님. 한데, 정말 이걸로 괜찮았던 걸까요? 블러드 트리로 향한 전력은 블러드 캐슬로 가야 하는 게 아니었는지….”
“괜찮습니다. 그곳에는 황실기사단이 있습니다. 데미안 단장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상 쉽게 길을 내주지는 않겠죠. 저희가 보낸 병력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오히려 미카엘라 단장이 전선에 합류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사태가 일어난 이후 미카엘라 단장과의 연락은 끊긴 상태다.
신전기사단 소속의 성기사들이 단장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당연하겠지.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들도 바로 블러드 로열로 향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성기사 한 명, 한 명이 아쉬웠으니까. 그러나 미카엘라 단장이 합류할 수만 있다면 신전기사단의 전력은 배로 뛰어오른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게 맞는 판단이었다.
“뭔가 더 전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조금 전 마탑의 통신이 복구되었습니다. 들어온 전언에 의하면 다소 피해는 있지만, 악마들의 포위망을 뚫어냈다는 모양입니다. 리하델 총장님을 비롯한 마탑의 교수들과 학생들도 무사하고요.”
“천만다행이군요. 마탑이 안전을 확보했으니, 이 침공이 더 거세지는 일은 없겠네요. 황도의 안정화까지 필요한 시간은 말하지 않던가요?”
“아, 그것과 관련해서 리하델 총장님이 전언을 보내긴 하셨는데….”
입에 담기 곤란한 내용이라는 듯 레이첼이 머뭇거렸다.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프랑소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요. 마석을 파괴할 예정이니, 마정석의 처리는 우리에게 맡긴다고 했겠죠. 이 상황을 수습할 방법은 역시 그것뿐인 모양입니다.”
“…….”
성녀의 대답에 레이첼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무언의 긍정을 본 프랑소와는 다프네 여신상을 올려다보았다.
혼란스러운 황도와 달리 여신상의 자태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처럼. 여신상을 가만히 응시하던 성녀는 두 눈을 감았다. 여신님은 어떤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이 선택은 전적으로 그녀의 몫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죠. 더 늦기 전에 마정석을 파괴하겠습니다.”
“성녀님….”
성녀의 결정에 사제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마정석의 가호는 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시스템이다.
이를 파괴한다는 건 결국 지금까지 누려온 가호를 포기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프랑소와는 좌중의 소란을 가라앉혔다.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다. 사태는 이미 희생 없이 수습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검게 물든 마정석을 향해 성녀는 손을 들었다.
*&*
블러드 캐슬은 혈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황실기사단을 위시한 수비대의 항전은 필사적이다. 드리워지는 손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몸체만 한 방패로 악마의 진입을 막고, 녀석들의 진형을 무너뜨려 하나씩 고립시킨다. 수비대 안쪽으로 떨어진 악마는 무참히 난도질당했다.
악마는 지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죽음이 손짓한다. 떨어지는 마기를 마법사들이 요격했다. 파편까지는 전부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면에 떨어진 마기는 검은 불길로 변했다.
작열하는 화염 속에서도 군단의 발길은 느려지지 않는다. 마기가 자아낸 화마는 악마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불길을 본 수비대는 침착하게 뒤로 물러났다. 전열을 유지한 채 배후를 내주지 않는다. 추격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격전지로는 황실기사단이 개입했다.
불길이 타오르는 전장을 알베르트와 마몬은 나란히 내달리고 있었다.
검은 구가 들이닥친다. 떠오른 구의 수는 셋. 그와 맞추어 알베르트의 곁에서도 꽃이 피어났다. 구와 꽃이 충돌했다. 폭발이 일어나는 그 아래에서 은빛과 어둠이 격돌했다.
빛이 비산했다.
알베르트는 튕겨 나온 월아를 바로 쥐었다. 놈의 무기는 베이지 않는다. 무기가 아닌 육체 쪽은 통용될 것 같지만, 단순히 월아의 힘에 의지해서는 베어낼 수 없다. 검을 모방한 손톱은 따라오지 않았다. 마몬은 숨을 고르는 알베르트를 응시했다.
「이전보다 더 강해졌군. 마음에 드는 성장이다, 알베르트.」
“그쪽은 더 단단해졌어.”
알베르트가 이전의 그가 아닌 것처럼, 마몬의 힘도 저번에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다.
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가는 합 속에서 알베르트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황도에 침공한 목적은 뭔가? 양양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네들은 죄 없는 목숨을 원하는 건가?”
「그대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마치 우리가 바라는 것이 피뿐이라는 것 같아.」
“설마 부정하는 건가? 이렇게나 많은 이들을 죽여놓고서?”
양양에서 있었던 지옥도의 규모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죽은 사람도. 무너진 건물과 잔해밖에 남지 않은 거리는 복구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이 사태가 어떻게 끝나든, 황도가 제 기능을 되찾으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오해는 풀어두고 싶군. 우리 중에 피를 원하는 자들이 많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유희 거리에 지나지 않아. 아직 모르겠는가? 우리도 그대들과 별다를 바 없다는 말을 하는 거네.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자극 거리를 원하는 이. 무엇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우선으로 삼는 이. 단순히 허기를 달래고 싶은 이. 이곳에 나온 녀석들은 각자 원하는 바가 다르지.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뿐이네.」
마몬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우리는 우리를 불러낸 이들의 깊은 소망에 응답한다. 죄인이 있던 양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한 죄인은 자신들을 박해한 죄인에게 벌을 내려주길 바랐지. 자신들을 잡종이라고 부르는 오만한 순혈 죄인에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우선으로 순혈을 노렸다. 혼혈이라 해도 죄를 범한지라 그 영향권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
알베르트는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양양에서 일어났던 지옥도 사태에서 혼혈 마족은 비교적 상태가 괜찮았다.
무진은 단순히 혼혈이 본신을 드러낼 수 없으니, 영향에서 벗어난 게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처음부터 놈들이 노렸던 것은 마족 전체가 아니라 순혈 뿐이었던 모양이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이는 황도가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중에서도 현 사태를 관망하는 황제가 죽기를 바라고 있지. 우리는 그 소망에 답할 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소의 피를 보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우리는 모두 무료함에 굶주려 있으니까.」
“결국, 피를 보겠다는 말인가. 역시 대화로는 해결할 수 없는 모양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조금 실망이군. 검을 들게, 알베르트. 나와 그대가 나눌 이야기는 그것뿐이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먼저 수를 취한 것은 마몬이다. 노리는 곳은 어깨 위. 공격을 읽었다. 대응한다. 쫓아오는 손톱을 쳐냈다. 생각보다 녀석의 검격은 얇다. 이 참격이 노리는 장소는 어깨가 아니다. 손톱은 멈추지 않는다. 검과 부딪혀도 그 예리함을 잃지 않는다. 손톱이 아니라 발톱에 가깝다. 떨어지는 조수(爪手)를 따라간다. 맥없이 당하던 예전의 알베르트가 아니다. 힘, 속도, 반사신경, 내공. 모두 충분하다. 이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마몬도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
발톱이 흔들렸다.
검로가 바뀌는 게 아니다. 갈라진 발톱은 몇 개의 날붙이로 변했다. 노리는 곳은 머리, 목, 심장. 반응했다. 막아낼 필요는 없다. 성장했다고는 하나, 놈의 근력은 위협적이다. 가능하다면 흘려내는 것이 최고다. 발톱에 실리는 마기가 한층 강렬해졌다. 떨어지는 어둠이 형체를 갖는다. 월아와 맞닿은 그것은 마법처럼 폭발했다.
연기가 시야를 흐렸다.
그래도 알베르트의 검이 느려지는 일은 없다. 아름다운 은빛이 검막을 만들었다. 검막은 연기를 뚫고 쏘아지는 발톱을 튕겨냈다. 마기의 파편이 흩날렸다. 알베르트는 흩어지는 마기 속으로 나아갔다.
유려하고 부드럽게 나아간다.
앞을 밟는 것은 발. 올리는 것은 검. 움직이는 것은 빛이다.
빛의 점이 선을 만든다.
원을 이룩한 그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과 같다. 달콤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일순간 사라지는 내공에 알베르트는 탈력감을 느꼈다. 남은 내공은 많지 않다. 거듭되는 교전 탓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승기를 이쪽에.
다른 수를 취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개화하는 꽃은 여러 송이가 아니다. 필요한 꽃은 하나. 점을 꿰뚫을 검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 묶어야 하는 것은 녀석의 발. 이 검격에서 도망칠 길은 내주지 않는다.
앞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뒤늦게 마몬은 깨달았다.
알베르트의 참격에 끝은 없다. 이 연격은 멈추지 않는다.
물러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월아의 빛이 점차 강렬해졌다.
연거푸 거듭되는 검기는 이윽고 하나의 꽃이 되었다.
천마신공 오의
백화혈무
피어나는 꽃.
쇄도하는 검.
만개한 꽃의 검이 마몬의 몸을 갈랐다.
「…….」
한 박자 늦게 악마의 조수에 균열이 떠올랐다.
균열이 균열의 꼬리를 물고, 빗금이 생겨났다.
「정말인지. 자네라는 인간은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군.」
“그런가?”
「재밌었다. 알베르트 란.」
갈라지는 몸을 억지로 잡아두고 있었던 건지, 말을 마친 마몬의 천천히 찢어졌다.
희끄무레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황도를 침공한 마지막 군단장의 육신이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마몬을 쓰러뜨린 알베르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수비대와 군단의 교전은 거듭 이어지고 있다. 생각보다 군단의 수가 많지 않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더니, 차원 너머에서 침공을 감행하던 군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조치가 취해진 건지 알베르트는 알 수 없다.
「---!」
날카로운 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검은 하늘을 수놓은 주인공은 무시무시한 형상을 한 본 드래곤이었다. 그 힘은 악마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우악스러운 턱이 하루살이처럼 들러붙는 악마를 물어뜯는다. 입안에서 잘게 부서진 악마의 유해가 떨어졌다. 몰려오는 군단을 본 드래곤이 숨을 크게 마셨다.
그 입에서 한기가 꿈틀거렸다.
하늘의 시간이 멈춘다.
용의 숨결에 삼켜진 군단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추락하는 악마들의 밑으로 내달리는 기사들이 있었다. 방향으로 봤을 때 중앙 광장에서 올라온 기사단이다. 어디서 온 원군일까. 그 갑옷에는 익숙한 문양이 보였다. 알베르트의 옷깃에 있는 것과 똑같은 은빛 검이다. 루드비히 가의 사자기사단이 이곳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유피가 말했던 보험이라는 게 우리 기사단이었던 모양이군.’
[그렇군요. 소수이긴 해도 그 전력이 이곳에 왔다면 걱정할 것은 없겠죠.]
기사단의 반대쪽에서는 신성력이 발현하고 있었다.
다프네 신전에서 올라온 루미에르 교의 성가대다. 성기사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가도의 혼란은 거의 소강된 모양이다.
군단의 침공은 멈췄고, 전투는 행방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