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블러드 캐슬(2) (1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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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러드 캐슬(2)

    노아는 별실의 마족과 대면하고 있었다.

    에일린과 함께 저택을 방문한 마족이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머리는 흑백이 공존하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새하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은 붉은 입술만이 밖에 드러나 있었다.

    그녀가 저택에 머무른 지도 벌써 이틀째다.

    겁도 없이 주인님과 만나기를 요구한 마족은 이렇게 별실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인님과 마족 사이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노아는 일개 사용인 신분이었으니까. 확실한 것은 이야기가 끝나고 난 후 주인님과 사자기사단은 저택을 비웠고, 마족은 별실에 남게 되었다.

    빅토리아 시녀장의 지시로 마족의 수발을 들게 된 노아는 찻주전자를 들었다.

    빈 잔을 채운다. 어딘가의 집사처럼 유려한 물줄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뿐일까. 긴장한 탓에 찻물이 주변으로 튀었다. 실수다. 노아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손이 엉키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마족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면사 아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호선을 그리는 입가만으로도 그녀의 용모가 뛰어나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찻잔을 드는 마족의 움직임은 미려했다. 긴장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긴 그녀는 별실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노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마족은 절대 평범한 신분이 아니다.

    “노아라고 하셨죠? 에일린에게 들어보니, 란과 잘 아는 사이라고 하던데요.”

    “네? 란이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저택에 마족인 그녀와 연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노아의 반문에 마족이 대답했다.

    “알베르트 란이요.”

    노아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발음 차이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뿐이다.

    “알을 알고 있나요?”

    “네. 란에게는 신세를 졌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하고 마족은 우아하게 웃었다.

    양양과 낙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던 탓이다. 만약 그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얼굴을 못 본 지 벌써 10년이 넘어가는 것 같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네요. 실례가 아니라면 근황을 물어보고 싶은데. 어떤가요, 란은? 이곳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검을 쥐고 있었나요?”

    “그 정도야 뭐…. 아가씨의 검을 봐주긴 했죠. 주방에서도 많이 들었고요.”

    “주방, 이요?”

    네, 하고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이 하는 요리는 맛있거든요.”

    “…….”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마족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면사 너머로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뭔가 부담스러워진 노아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마족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란이 하는 요리는 맛있군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그 외에 또 다른 이야기는 없나요?”

    “알에 관한 이야기라면 넘쳐나죠.”

    노아는 알베르트가 저택으로 귀환하고 난 이후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저택에 온 이후 처음으로 한 일은 어떤 것이었는가. 저택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뭘 했는지. 의외로 이 행동이 서툴러서 보는 맛이 있었다고 할까. 그런 알베르트를 뒤에서 지켜보던 사용인들이 많았다.

    누가 뭐라 해도 폭풍의 중심에 있던 남자다.

    사용인들이 흥미를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알게 모르게 그를 뒤에서 괴롭히는 이들도 있었고, 감시하는 이도 있었다. 뭐, 그런 사실을 외부인에게 밝힐 수는 없다. 굳이 이야기해줄 필요도 없고 말이다.

    노아의 이야기를 들은 마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란은 즐겁게 지낸 모양이군요.”

    양양에서 만났던 그는 나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

    강박관념에 휩싸인 것처럼 무의식중에 잃은 것을 헤아리고 있던 사내. 그것은 시간이 흘러 낙양에서의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게는 다른 누구도 아닌 란이 지고 있는 짐이다. 양도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힘을 쌓고 올곧게 짊어지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검이라 해도, 날카롭기만 해서는 꺾이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휴식은 필요했다.

    마족은 노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붉은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시녀. 저택에서 사용인으로 지낸 시간이 꽤 긴지, 그 행동거지에는 연륜이 묻어있었다. 살짝살짝 훔쳐보는 시선을 보내는 건 분명 그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은 거겠지. 문 앞에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제국에게는 주적이라 할 수 있는 마족이 저택에 들어와 있다. 경계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당연하리라.

    “그런데 온 시기가 나쁘셨네요. 알은 지금 저택에 없어요.”

    “알고 있답니다. 그래서 제가 이곳에 온 거랍니다. 혹여라도 동포들이 움직여서는 안 되니까요.”

    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마족은 노아의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생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부디 오늘 그 자리에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목숨이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부디 달토끼님께서 그들을 굽어살피시기를.”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시선은 황도를 향해 있었다.

    *&*

    라시엘 공작이 이끄는 사자기사단은 진격을 멈추지 않는다.

    황도를 침공하는 악마는 분명 위협적인 적이다. 그러나 이를 상대하는 사자기사단도 능숙했다. 기사 혼자서 움직이는 일은 없다. 서로의 등을 봐주고, 악마를 천천히 압박해간다. 실력 면에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마치 악마와 몇 번이고 싸워본 모양새다. 검에 불어넣는 오러는 최소한의 강도를 유지할 뿐, 주무기로 삼지 않는다.

    의지해야 할 힘이 잘못되어 있다.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는 단장님이라면 모를까. 그들이 다루는 오러로는 녀석들을 쓰러뜨릴 수 없다.

    마족과 마찬가지다.

    악마를 쓰러뜨리는 주력은 신성력이다. 다행히 비축해둔 성수는 충분했다. 상대의 강함을 가늠하고, 유연하게 대처한다. 라시엘 공작의 지휘를 따라 기사단은 천천히 혼란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러나 느리다.

    로엔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 전황을 바꾸기에는 수가 적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전송진을 타고 황도로 온 사자기사단은 겨우 두 대대. 정예 중의 정예만 골라냈지만, 이것에서 벌어지는 건 모의전이 아니다. 수천에 달하는 목숨이 오가는 전쟁이다. 200밖에 안 되는 사자기사단으로 전황을 바꿀 수는 없다.

    후속 병력의 도착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전송진은 끊긴 지 오래고, 통신조차 원활하지 않다. 황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오클랜드의 레넌트 후작에게 이상을 전하긴 했지만, 군대를 소집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다. 원군의 도착까지는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피해는 얼마나 발생할 것인가. 과연 그때까지 황도가 버틸 수 있을까.

    혼란을 해결하려면 근본적인 부분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밝지 않은 전황에 로엔은 입을 열었다.

    “단장님. 2대대를 저에게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통신부터 확보하겠습니다.”

    “마탑으로 향할 생각인가? 옳은 판단이군. 마법사들의 발이 묶였다면 그들을 구하고 지원을 받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의 전력을 파악할 수 없다. 경솔하게 움직였다가는 역으로 전멸당한다.”

    “본대와 함께 움직여서는 늦습니다. 황도의 근간이 되는 것은 백성입니다. 단장님도 보셨지 않았습니까? 도시 전체가 이 모양입니다.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지 알 수 없습니다.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황도는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별동대가 필요합니다.”

    로엔의 말도 맞다.

    사자기사단이 수습한 곳보다 수습하지 못한 곳이 훨씬 많다. 황도의 수비대만으로는 악마들과 대적할 수 없다. 그들을 지휘하고 지원을 보내줘야 할 마탑과 다프네 신전은 침묵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최선의 수는 두 요충지를 확보하는 것이겠지.

    그걸 모르고 있을 단장님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자기사단은 현재 마탑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속도로는 늦는다.

    과연 두 요충지가 사자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전멸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 진격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런 그의 걱정을 알고 있는 걸까. 라시엘 공작은 발을 멈췄다.

    “로엔 발 나하드.”

    유그피르의 검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홈을 타고 흘러내린 악마의 피가 지면을 적셨다.

    “초조해하지 말아라. 우리 제국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

    나지막한 그 목소리에 로엔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쓰러졌던 수비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사자기사단의 진격에 맞추어 합류한 병사들이 전우의 부상을 돌보고 챙기고 있다. 루미에르 교의 사제들은 자리에 없으니 응급조치밖에 할 수 없다. 부상의 정도는 가볍지 않다. 그러나 병사들은 사기를 되찾았다.

    부러진 검을 들고, 꺾인 창을 바로 쥔다.

    그 눈에서는 전의가 엿보였다. 로엔은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결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단장님. 부디 이 무례를 용서하시길.”

    “그렇게 생각한다면 선봉은 맡기겠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로엔을 필두로 한 사자기사단은 진격을 이어갔다.

    두 요충지로 향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앙 광장을 확보해야 했다. 부대는 진격할수록 수가 불어났다. 저항 중인 수비대가 차례차례 합류한 결과다. 이윽고 중앙 광장에 도착한 사자기사단은 인형과 교전 중인 악마를 볼 수 있었다.

    인형과 악마.

    생각지도 못한 조합을 본 라시엘 공작은 기사단의 진격을 멈췄다.

    잠시 상황을 추이한다.

    어떤 마법사의 사역마인 걸까. 인형은 조직적으로 악마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공격을 유도하고, 빈틈을 노린다. 악마는 공격 한 두 번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소모전으로 가면 불리한 건 인형 쪽이겠지.

    그러나 쓰러지는 건 언제나 악마다.

    라시엘 공작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인형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소녀가 악마를 제압하고 있었다.

    깔끔한 동작이다. 노리는 곳은 언제나 악마의 허점.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든 것도 아니다. 적수공권. 허나, 날붙이 하나 보이지 않는 손은 악마의 숨통을 끊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사자기사단에게 익숙했다.

    마족의 무인.

    제국의 기사와 비슷하지만, 한층 더 높은 무술을 구사하는 마족의 주전력이다.

    소녀 무인의 뒤에서 라시엘 공작은 반가운 목소리를 들었다.

    “아버님?”

    “아리시엘?”

    황도로 상경한 딸아이다.

    아리시엘 공녀의 모습을 확인한 사자기사단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형을 몰아세우는 악마를 쓰러뜨리고 중앙 광장의 안전을 확보한다. 아리시엘의 곁에 있던 무인은 사자기사단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것도 잠시. 라시엘 공작을 향해 뛰어가는 그녀의 뒤를 조심히 따라왔다.

    “다친 곳은 없느냐?”

    “네, 란랑이 지켜줬어요.”

    드레스가 피로 더럽혀지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전장에서 만난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든 아리시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딸아이의 온기를 느끼던 라시엘 공작은 고개를 들었다.

    딴청 부리듯이 주변을 둘러보는 소녀를 응시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다. 분명 마족의 황녀를 보좌하던 사용인이다. 정갈한 기운을 품고 있었던 것은, 그녀가 무인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뵈네요, 라시엘 공작님.”

    “무례한!”

    “됐다. 이 난리통 속에 아리시엘을 지켜줘서 고맙구나.”

    “황녀 전하의 명을 따랐을 뿐이에요. 공작님이 감사를 표할 일은 아닌 것 같네요.”

    라시엘 공작의 품속에 있던 아리시엘이 란랑을 돌아보았다.

    “고마워, 란랑.”

    시선이 마주치자 아리시엘은 웃음을 머금었다.

    살짝 얼굴이 붉어진 란랑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렸다.

    “말투와는 달리 착한 아이예요. 제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게 아니야. 란이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알의 부탁이 있었다고 해도, 신경 써준 건 사실이잖아?”

    “…….”

    쳇, 하고 란랑은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탑에 남아있을걸, 하는 혼잣말이 들렸다.

    “알베르트가 보이지 않는구나.”

    다른 사용인들은 어떻게 되었냐는 라시엘의 물음에 아리시엘이 대답했다.

    “마린과 루인은 마탑에 있어요. 아마 황도 내에서는 지금 마탑이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싶어요. 스승님은 보이지 않지만, 총장님이 있으니까요. 아, 다프네 신전도 괜찮아요. 그쪽으로는 유피에르가 갔는데. 성녀님도 무사하신 모양이에요.”

    “두 곳이 전부?”

    “네. 상황이 이렇게 되자마자 움직였거든요.”

    아리시엘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격로를 바꿀 필요가 있다.

    마탑과 다프네 신전의 안전이 확보됐다면, 그곳으로 향할 이유가 없었다.

    생각에 잠긴 라시엘 공작을 향해 란랑이 말했다.

    “그 건에 관해서 황녀 전하의 전언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허락하마.”

    “마탑은 공녀분의 말대로 란이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다프네 신전은 우리 황녀님이 확보하셨고요. 급한 불은 껐으니까, 두 세력 모두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할 거예요. 황녀 전하가 말씀하시길. 사자기사단이 늦지 않게 도착했다면 블러드 캐슬로 진격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작님의 수완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으시겠죠?”

    제국의 수호신.

    몇백 년의 세월 동안 마족을 집요하게 괴롭혀 온 루드비히 가다. 그 전력은 그들을 상대해온 마족이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걸린다.”

    “그 점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란랑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하늘에서 날아가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그에 이끌리듯 라시엘 공작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황녀 전하가 힘써주고 계시니까요.”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분명, 일찍이 멸망했다고 일컬어지는 드래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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