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블러드 캐슬(1)
마기로 더럽혀진 황도의 하늘은 검붉은 연기가 가득했다.
악마의 발길이 닿은 거리 곳곳이 불탄다. 살육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과 살육을 막기 위해 뛰어다니는 병사들. 교전이 성립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다. 마탑과 다프네 신전에서 가까운 장소는 그래도 괜찮다. 군단장을 쓰러뜨린 두 곳에서 나온 전력은 천천히 안전지대를 넓혀가고 있었다.
황도의 정문도 마찬가지다.
라시엘 공작이 이끄는 사자기사단이 악마를 짓밟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지원군이다. 루드비히 가의 문장을 본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이 침공의 규모와 비교하면 루드비히 가의 전력은 크다고 할 수 없었다. 작은 소란은 가라앉힐 수 있어도, 전체적인 판도를 바꿀 수는 없다.
쓰러지는 악마의 수보다, 쓰러지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다.
소모전은 의미가 없다. 악마들은 여전히 차원 너머에서 침공을 감행하고 있었다.
황궁 위에서 쏟아지는 악마의 수는 줄어들지 않는다.
황실기사단장 데미안은 거듭해서 몰려오는 놈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의 발치에는 조금 전 쓰러뜨린 거구의 악마가 있었다. 친위대 속에는 부하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상처가 없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뒤를 봐주는 사제들이 있긴 하지만, 수가 많지 않다. 악마들과 교전할 수 있게 축복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신성력은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로베릭. 상황은 어떠한가?”
“다 보고 있으면서 뭘 물어보고 있는 건가? 그런 물음을 던질 시간이 있다면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움직이게!”
수석 황실 마법사 로베릭의 지시에 맞춰 마법사들이 포격을 이어갔다.
5서클 마법에서도 손에 꼽히는 공격 마법으로 칭해지는 익스플로전(Explosion)이 떨어진다. 귀가 떨어질 것 같은 폭음이 울렸다. 진격해오던 악마들의 발길이 일순간 멈췄다. 연기가 가신 장소에는 더는 움직이지 않는 악마의 시체가 가득했다.
“과연 우리 황실이 자랑하는 수석마법사군.”
“우스갯소리는 집어치우게. 마도 병단만 이 자리에 있었어도, 이런 식으로 침략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걸세.”
대단위 마법을 쓰고 난 반동 탓일까. 친우는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가 된 그의 뒤를 봐주면서 데미안은 움직이지 않는 악마를 응시했다.
머리 위로 자라난 두 개의 뿔. 반들거리는 검은 피부에는 비늘이 떠 있다.
혐오감을 불러오는 다른 악마들과 달리 놈은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식한 크기도, 압도적인 형상도 없다. 그러나 놈이 품은 기운은 이곳에 모인 어떤 악마보다 무서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강자 중에서도 강자.
이곳에서 녀석과 검을 맞댈 수 있는 건 그가 유일하겠지.
블러드 캐슬에 가장 먼저 도착한 놈은 저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들어오는 악마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을 뿐이다.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움직일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놈이 움직이면 데미안이 나설 수밖에 없다.
얌전히 침묵을 고수하던 악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형을 유지하는 친위대 앞으로 홀로 걸어온 놈은 손을 들었다. 손 안쪽에서 창과 같은 뼈가 튀어나왔다. 그 끝을 잡은 녀석은 친위대를 향해 쇄도했다.
“잠시 다녀오겠네, 로베릭.”
“뭐? 그게 무슨 말인가?”
난전이 거듭되는 전장을 가로지른다.
명검 수프라에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떠올랐다. 잡병이나 다름없는 악마들은 데미안의 돌진을 막을 수 없다. 순식간에 난전 중인 전장을 돌파한 그는 놈의 앞까지 당도했다.
진형을 유지하던 친위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처럼 쌓인 시쳇더미 위에서 녀석은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괴물 같은 놈.
시간으로 친다면 채 5분이 되지 않았을 터다. 그 순간에 놈은 이곳에 모인 한 대대를 전멸시켰다. 그것도 정예 중의 정예인 친위대를. 숨이 끊긴 시체 속에는 부하 기사의 모습도 보였다.
판단이 늦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놈과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야 했다.
“황실기사단장 데미안 류재스터다.”
「…….」
악마는 대답하지 않는다. 데미안은 놈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애초에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녀석의 무기는 창이다. 먼저 취해야 할 수단은 거리를 좁히는 것. 데미안은 거침없이 놈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수합을 치고 나간다. 놈의 창과 맞닿자 수프라가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무기를 노리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 집중이 떨어지면 오러의 밀도가 옅어진다.
일단 손목을 노려본다. 끊어지지 않는다.
놈의 창은 데미안의 배를 노렸다. 피했다.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놈의 옆으로 돌아간다. 녀석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는다. 창끝이 변화무쌍 움직였다. 근접전을 이어가려던 데미안은 뒤로 물러났다. 심장을 노렸던 걸까. 갑옷의 가슴판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놈이 근접전을 허용한 것은 처음뿐이었다.
변화무쌍한 창의 움직임을 뚫을 수 없다. 기사와의 싸움에 익숙한 것인지, 놈은 안쪽으로 파고드는 데미안의 다리를 몇 번이고 묶었다. 억지로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무언가 하나를 내주지 않고서는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다.
생각을 바꾼다.
힘들게 들어갈 필요는 없다.
창의 변화에 집중한다.
거듭 들어오는 공격이 어디를 노리는지 파악한다. 머리, 가슴, 목, 어깨. 무언가 정해진 느낌은 없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창로가 변한다. 그 움직임을 머릿속에 박아 넣는다. 끊어치는 찌르기. 가슴을 노린다. 접근을 막기 위해 휘둘러지는 창. 거리를 벌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걸 역으로 이용한다.
휘둘러지는 창 위로 뛰어오른다.
찌르기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수는 막을 수 없다. 데미안의 검이 악마의 몸에 닿았다. 모든 것을 베어버린다는 오러 블레이드가, 그 몸을 뚫지 못했다.
아니, 다르다.
검이 닿는 순간 접촉면이 갑주로 변했다. 오러 블레이드가 뚫지 못한 것은 놈의 갑주다. 창이 돌아온다. 연격을 넣을 수는 없다. 녀석의 찌르기를 검면으로 받아낸 데미안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무시할 수 있는 충격이 아니다. 두 손이 얼얼했다.
악마는 오러 블레이드가 닿은 부분을 손으로 훑어내고 있었다. 손가락에 묻은 검은 가루를 확인한 그는 창을 회수했다. 손바닥 안으로 창의 모습이 사라진다. 무엇을 할 생각인 걸까? 가만히 바라보는 데미안에게 놈은 손을 들었다.
손에서 이어지는 손목. 아래팔이 하나의 검으로 변했다.
“뭣…?”
놀랄 틈은 없다.
이번에는 놈이 먼저 움직임을 취했다. 거리를 좁히고 치고 들어온다.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치고 들어오는 검을 맞받아친다. 막아낼 수 없는 검기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지면에 금이 생기고, 벽면이 갈려 나간다. 난폭한 참격이다. 피부에 검상이 남고, 피가 튀었다. 막아도 막은 것이 아니다. 얼굴에 긴 자상이 남았다. 뚝뚝, 하고 피가 흘러내렸다.
“데미안 단장!”
따스한 빛이 데미안을 감싸 안았다. 통증이 가라앉는다. 자상이 사라지고 피부가 되살아난다. 부상자들을 돌봐주고 있던 사제들이 신성력을 발현하고 있었다.
“고맙다. 감사를 표하지.”
“저희도 합류하겠습니다.”
사제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여력했다.
평소라면 일 대 일을 고집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대련과는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놈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내달리는 신성력이 악마를 향해 떨어졌다.
놈은 반응하지 않았다. 빛의 창을 그대로 받아낸 녀석은 몸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확인했다. 오러 블레이드와 맞닿아도 아무렇지 않았던 검은 갑주가 그을려 있었다. 저런 괴물 같은 놈이라도 신성력에는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시간은 내가 끌지. 자네들이 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신성력으로 끝을 내게.”
대답을 듣지도 않고 데미안은 악마를 향해 뛰쳐나갔다.
마기를 담은 것처럼 보이는 검은 원이 비산했다. 저것이 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기에 위험했다. 수상한 동태는 사전에 차단한다. 데미안의 선택은 맞았다. 지면과 맞닿은 원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혓바닥이 팔딱거렸다.
저것을 준비할 시간은 주지 않는다.
조금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검을 들고 있는 상대라면 오히려 상대하기 쉽다. 눈앞에서 두 검이 오간다. 오러 블레이드를 두른 수프라와 악마의 검이 합을 나눴다. 검을 나누는 상대가 사람이라면 서로의 호흡을 확인할 수 있는 지근거리다. 악마도 숨을 쉴까? 아니, 녀석은 제대로 된 이목구비조차 없다. 붉게 빛나는 두 눈만이 데미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오러 블레이드로도 뚫을 수 없는 놈의 갑주를 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미카엘라 단장이라면 어땠을까. 성녀의 명을 받아 지하수로를 감시하고 있는 신성기사단의 단장. 그가 검에 두르는 기운은 오러가 아니다. 모든 성기사들이 그러하듯 신성력을 주력으로 삼고 있다. 그 남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상황이 좀 더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검이 오갔을까.
데미안을 쉽게 뚫을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악마는 자세를 바꿨다. 검을 길게 늘어뜨린 채 몸을 바싹 붙인다. 찌르기다. 겨누어진 칼끝이 데미안의 심장을 향했다.
달린 것은 암광.
남은 것은 충격.
찌르기를 받아낸 데미안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따라올 이격을 받아칠 준비를 한다.
고개를 든 그에게 들이닥친 것은 검이 아니다. 마기로 점철된 검은 구다. 원에서 나온 혀가 생각났다. 닿아서는 안 된다. 균형이 무너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슬아슬한 차이를 남기고 구가 빗나갔다. 지면에 떨어진 구에서는 혀가 나오지 않았다.
암광이 모인다.
검은 구는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큭!”
연기 탓에 시야가 어둡다.
뒤따라올 연격을 경계했으나, 악마는 그를 향해 움직이지 않았다.
마기가 향한 곳은 데미안의 뒤에 있던 사제다.
경고음을 낼 시간은 없었다. 데미안을 돌파한 녀석은 신성력과 충돌했다. 고위 사제가 준비한 신성력이다. 요동치는 마기가 녀석의 현주소를 알려줬다. 뒤로 돌아간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게 그을린 신체와 이가 빠진 검. 악마도 무사하지 못했지만, 이와 부딪친 사제들은 누구 하나 서 있지 못했다.
“빌어먹을.”
왼발에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폭발에 휘말려든 탓이다. 통증조차 없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상태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 정비할 시간은 없다. 몇 안 되는 사제들은 쓰러졌고, 전선은 여전히 위험한 상태다. 여기서 기사단 최대의 전력인 자신이 빠져버리면 추는 순식간에 넘어가리라.
사제들이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한 놈은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붉은 눈에 어린 투지는 여전하다. 신성력에 그을린 정도로 놈은 흔들리지 않는다.
시야 한 편에 로베릭의 모습이 보였다.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았을 때, 친우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다. 지휘를 위해 앞쪽으로 자리를 잡은 게 화근이었던 거겠지. 뚫리기 시작한 진형은 손볼 곳이 너무나도 많았다. 원조를 바라기는 힘들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혼자서 만들 수밖에 없다.
각오를 다진다.
한쪽 다리가 묶였지만, 포기하기는 이르다. 희미해지던 오러 블레이드가 힘을 되찾았다. 재차 전의를 불태운 데미안이 악마를 응시했다.
녀석의 시선은 데미안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부대의 뒤편. 황도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교전이 멈추지 않는 전장 속에서 무언가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기운은 마치 보란 듯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루미에르 교의 지원 병력인가? 그렇지 않으면 마탑의 마도 병단인가? 아니, 다르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그 기운은 두 세력과는 별개의 것이다.
모르는 기운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 데미안은 이 기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악마가 다루는 마기와도 비슷한 이 힘을 다루는 것은….
무인이다.
눈부신 은빛이 떨어졌다.
미동조차 하지 않던 악마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데미안은 보았다.
캉!
검과 검이 부딪혔다. 날카로운 것이 떨어졌다. 검으로 변했던 악마의 오른손이 지면에 박혔다.
악마의 검을 날려버린 이는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집사였다.
「그래. 자네가 여기에 있을 줄 알았지. 그렇지 않은가, 알베르트 란?」
“꽤 모습이 변했군, 마몬.”
기다렸던 호적수의 등장에 마몬은 웃음을 터뜨렸다.